주체화는 라캉에 의하면 거울단계(상상적 동일화)를 넘어 상징계의 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빗금 그어진 기표로서 그렇게 말이다. 라캉의 상징적 동일화의 개념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 속에서 '호명'의 개념으로 재탄생했다. 상징계는 주체를 통해 작동된다. 즉, 상징계는 자기를 활성화시킬 주체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에 의해 이 주체의 자리가 채워져야 한다. 이렇게 큰타자는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는 이 부름에 응답하여 스스로를 주체로 내세우려면 그는 자신을 지워야 한다. 자신을 지운다는 의미는 예를 들면 관계맺는 공간과 밀접하게 연관맺고 있는데 농민이었다가 노동자가 된 사람이나 학생이다가 선생이 된 사람이나 솔로였다가 결혼한 사람이나 각각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항상 그 이전의 자신을 제거하여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가 어떻게/왜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느냐이다. 즉 누군가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거세 위협이라는 '외부적 억압'을 제기한다면, 알튀세르는 호명에 의한 '상상적 오인'이라고 하는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 가능성을 전제하였다. 그런데 왜 주체가 그 자리를 선택하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그 선택은, 그 자리차지함은 '우연(맹목적 필연)'에 호소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속에서는 주체화밖에 없고 그렇게 된다면 주체화의 거부, 즉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 혁명불가능성이 애초부터 전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극한으로 밀고 가 뚫어버린 사람이 지젝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젝은 라캉의 '강요된 선택'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라캉이 말하는 강요된 선택은 존재(육체)와 의미(상징계)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누군가가, 즉 선-주체가 육체적 존재를 택한다면, 그는 쾌락을 얻지만 상징계 밖에 처한다. 고대의 추방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고대적 추방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결국 이것은 상징계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 속에서 그의 쾌락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반면 상징계를 선택한다면, 즉 큰타자의 호명에 부응한다면 그는 삶의 의미를 얻지만, 동시에 쾌락을 상실한다. 즉 그는 상징계에 의해 노예적으로 착취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라캉의 강요된 선택은 누군가가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주체에게는 쾌락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던가 아니면 차선의 선택으로서 상징계를 선택하던가 양자택일의 강요된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선택은 불가피한 강요에 의한 선택이며,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는 것은 겉보기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주체에게는 극단적인 경우 죽음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는 주체가 상징계의 동일화를 벗어날 가능성을 암시하게 된다. 결국 돌파구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죽음의 선택이 곧 라캉에게서 상징계로부터의 분리이다.(지젝은 상징적 죽음에 대한 예로 항상 여성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안티고네와 잉그리트 버그만이 바로 그들이다. 극단적으로 여성만이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상징계 속의 주체는 결국 '강요된 선택'(상징적 죽음이냐 주체화냐)과 '환상의 뇌물'을 통해 이중적으로 포박된 존재인 것이다. 주체화란 상징계의 큰타자에 의해 '강요된 선택'을 통해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이를 매꾸기 위한 환상을 그 구멍에 진연하는 그런 것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상징적 죽음이라는 '진정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여성만이 상징적 죽음이 가능하다고 한다. 왜 남성은 안되는가? 가부장제적 사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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