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역사, 시점과 연속성에 대한 비판
역사개념은 항상 특정한 시간 경험과 결합되어 있고 이 경험은 역사 안에 함축되어 있는 동시에 역사를 주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의 정치적 사유는 역사에 주목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시간개념을 고안하지 못했고, 수천 년에 걸쳐 서구문화를 지배해온 시간개념인 ‘점들’로 형성된 동질한 ‘연속체’로 표상하는 통념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개념을 무력화시켰고 역사 유물론에 균열을 가했으며 이데올로기에 침투할 공간을 내주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개념에 함축되어 있는 시간개념을 상술해야할 순간이 도래했다.
고대의 순환적이고 연속적인 시간개념
플라톤은 천계의 순환적 운동에 따라 측정되는 시간을 움직이는 영원성의 이미지로 규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규정한 시간의 순환적 속성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는데 즉, ‘시점’을 통해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때 시점은 시간의 연속성에 다름 아니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하는 동시에 분리시키는 순수한 경계이다. 달리 말하면 시점은 시간을 무한히 쪼갤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과는 ‘다른’ 것(‘타자성’과 ‘파괴적’ 성격)인 한편, 미래와 과거를 하나로 합쳐서 이 둘 사이에 연속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중성(시작과 끝)으로 인해 시간을 지배하지 못한 서구인들의 무능력과 이로부터 유래한 결과로서 시간을 ‘획득하거나’ 시간을 ‘소모하려는’ 강박의 가장 깊은 뿌리는 흘러가는 시점들로 이루어진, 무한한 양적 연속체로 시간을 이해한 그리스인들의 시간관에서 의해 생겨 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시간관을 가진 문화는 고유한 역사성의 경험을 가질 수가 없다.
중세 기독교의 직선적이고 연속적이지만 끝(종말)이 있는 시간개념
고대 그리스의 시간표상이 원환이라면 기독교에서 그려지는 시간이미지는 직선이다. 고대의 시간이 방향성이 없다면 기독교의 시간은 하나의 방향(원죄-타락-구원)을 갖는다. 또한 고대의 시간이 별들의 운동이라는 자연 현상과 결합되었다면 기독교의 시간은 이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고 이를 통해 시간을 본질적으로 인간적이고 세계 내적인 형상으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의 시간과 기독교의 시간은 똑같은 ‘시점의 연속체’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고대 그리스 형이상학의 순환적 시간상 자체가, 즉 신성의 척도로서 영원성이 회귀하여 시간에 대한 인간 경험을 무화하는 데까지 나아가 버렸다.
근대의 직선적이고 동질하며 공허한 ‘과정’으로써의 역사주의 시간개념
근대의 시간은 기독교의 시간을 세속화했는데, 종말에 대한 표상에서 분리되었고 이전과 이후의 과정에 의해 구조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허한 시간이다. 이러한 공허한 시간표상은 공장 노동이라는 경험에 의해 생겨났으며 순환적 운동보다는 직선적이고 동질한 운동을 위에 두는 근대의 역학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제 이전과 이후(‘과정’)는 그 자체로 그리고 대자적으로도 의미(방향)가 되었다. 즉, 의미는 과정의 전체성과 관련해서만 존재할 뿐 시점으로 이루어진 주재할 수 없는 지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실제로는 이전과 이후의 질서를 따르는 지금들의 단순한 연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로 인해 이제 구원사가 순수한 연대기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의미의 외관은 연속적이고 무한한 과정의 표상(자연과학의 영향에 의해 표상되어 재현된 ‘발전’과 ‘진보’의 역사인식)을 도입함으로써만 구제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이해와 역사이해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자신의 본래 영역으로부터 추방하며 참된 역사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국가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점 모델(‘지금’)에 따라 시간을 사유했다. 따라서 시간을 시점들의 연속적 계열로 규정하고 변증법을 통해 시간을 부정의 부정으로 정의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경험의 무화로 나아갔다. 순수한 부정을 본질로 하는 시간이 그렇듯이 역사 또한 결코 시점에 의해서는 주재할 수 없고 오직 전체과정으로서만 다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개개인이 삶에서 겪는 경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이상은 행복이기 때문이다. 헤겔에게 역사의 참된 주체는 국가다.
이에 반해 맑스에게 역사는 단순히 인간정신의 시간-내-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類的 존재인 인간의 근원적 차원을 묘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에게 역사는 헤겔과 그로부터 유래한 역사주의의 생각과는 달리 부정의 부정인 선형적 시간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근원(유)인 구체적 활동성, 즉 ‘실천(제일의 역사적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 결국 인간은 시간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때문에 역사적 존재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오직 그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신을 시간화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맑스는 이런 역사개념에 들어맞는 시간 이론을 구축하지 못했다.
연속적이고 양적인 시간에 대한 벤야민과 하이데거의 급진적 비판
벤야민은 알다시피 공허한 양적 시점에 대한 ‘지금-시간’, 즉 “인류 전체의 역사를 지극히 간단한 약어 속에 응축시키는 사건들의 메시아적 정지 상태”를 대립시켰다. 그러나 시점들로 이루어진 연속적 시간표상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은 하이데거의 ‘파괴적 반복’이라는 관점이었다. 하이데거는 역사성을 위한 정초 작업에 새로운 시간 경험을 주장했는데, 이 경험의 중심에는 더 이상 점들로 이루어진 주재할 수 없는 휘발적 시점이 아니라 참된 결단의 순간이 놓여 있다. 즉, 인간은 스스로를 마음씀, 즉 시간성 안으로 기투함으로써 자유의지에 따라 본래적인 역사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역사성의 토대를 마음씀(결단?)이라는 인간 존재 안에 놓음으로써 하이데거의 작업은 마르크스의 작업과도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카이로스의 시간
서구의 모든 시간 구상이 새겨놓은 무늬는 시점성의 무늬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르게 사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불가피하게 이 시점 개념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으며, 나아가 시점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시간 경험을 위한 논리적 조건이다. 다른 시간 경험은 파편적이지만 그노시즘과 스토아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노시즘은 그리스적 시간과 기독교적 시간에 반대하는 끊어진 선이라는 공간적 모델을 따라 시간을 이해함으로써 신의 섭리는 시간을 중단시키는 쪽으로 임하며 부활도 벌써 일어났고 또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 본다. 또한 스토아철학자들이 주장하는 해방적인 시간 경험은 인간의 행위와 결단으로부터 생겨하는 것이며, 결정이 기회를 붙잡아서 한순간 삶을 가득 채우는 직접적이고 돌발적인 일치의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자기 안에 이질적이고 상이한 시간들을 촘촘히 그러모은다. 그리고 카이로스 안에 있는 현자는 양적 시간의 노예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완벽한 주인이 된다.
한편, 고대로부터 인간의 본질적인 것으로 향유 개념이 제시되었다. 기쁨의 형식인 향유는 양적인 시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렇다고 영원성 속에도 자리 잡을 수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시간관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차원인 향유를 역사로 만드는 시간관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적이고 연속적인 시간으로의 몰입이 아니라 바로 그 몰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즉, 역사의 시간은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의 순간에 적절한 기회를 거머쥘 수 있는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우리는 통속적 역사주의의 공허하고 연속적이며 무한한 시간에 대해 충족되고 불연속적이며 유한한, 그리고 완성된 향유의 시간으로 맞서야 하며, 더 나아가 사이비 역사의 연대기적 시간에 대해서도 참된 역사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으로 맞서야 한다. 더불어 진정한 역사 유물론자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향은 향유라는 사실을 매순간 회상하면서 언제든 시간을 정지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다. 따라서 향유를 통한 정지 상태 속에서 자신의 근원적 고향인 역사를 늘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은 매순간 바로 지금,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임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