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경의 <세월>을 읽었다.
예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뒤로 미뤄 두었던 책이다. 자전적 소설로 총 3권 이다.
표지 사진에서 보이는 그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큰 고난없이 자라 평범한 가정을 꾸린 행복한 주부이지 않을까 하는 인상이었다. 그간의 다른 작품을 통해 이해한 바로는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심리학을 부전공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정신분석학 분야에 내공이 상당했던 작가로 기억한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기존에 갖고 있던 선입견이 모두 틀렸음을 알게 된다.
자전적 소설이어서 '김정숙'이란 이름의 여주인공에 작가를 대입시켜가며 읽었다.
환절기에 특히나 더 기승을 부리는 감기바이러스가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의 호흡기와 피부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퍼뜨리지만,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들 각자가 갖고 있는 면역력의 차이일 것이다.
면역력이 왕성한 건강한 몸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고 죽어버리지만,
면역력이 뚝 떨어져 시들시들한 몸에서는 활발하게 운동하면서 지독한 감기를 앓게 한다.
그녀는 정신적인 면역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채 어른이 되었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은 상태로 부딪치는 억울하고 서럽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주를 이룬다.
열두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서도 버림받는 경험을 한다.
남남이 된 부모는 각자 절반씩 아이를 맡아서 따로 지낸다. 남동생과 그녀는 아버지의 보호아래서 생활하지만 그것마저도 가난 때문에 함께 살지 못하고 이 집 저 집을 고아처럼 남매만 돌아다녀야 했다. 왜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조차 듣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남의 집에서 얹혀 사는 더부살이로 눈치밥을 먹으며 산다. 그저 견디는 수 밖에는 없는 나날을 보낸다. 어리다고는 하나 대충이라도 설명해줬더라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고생스러운 생활이 조금은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런쪽에서는 전혀 배려가 없으셨다.
상실감과 버려졌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그 시절, 그 결핍의 순간들로 인해 감정적인 여러 기관들이 손상을 받는다. 하루가 지나면 아버지가 데리러 오지 않을까... 혹시나 오랫동안 부재였던 어머니라도... 하는 마음을 매일같이 품고 있지만 아이들의 희망은 조금씩 절망으로 바뀌어 간다.
낮은 자존감, 배신, 상실감, 예민한 감수성, 고독, 외로움, 자신감 결여, 피해의식, 서러움, 억울함. 등이 그 시절 그 여자가 손상받은 것들이다.
손상받은 감정들은 조그만 상처에도 쉽게 아프고, 두 배 이상의 고통을 수반한다. 쉽게 내성이 생기지도 않고, 상처가 잘 낫지도 않는다. 제대로 치유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 무렵 그 여자 곁에는 기댈 언덕이 너무 없었다.
10대부터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하고, 홀로 실천하는 습관이 몸에 배인 그녀.
성장기에 받은 상처는 내내 그녀를 괴롭힌다. 겉으로는 웃고 명랑한 척 해도 내면에 존재하는 어두움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조그만 행복에도 불안해 하고 어떤 불행이 예정되어 있길래 이렇게 화평한 순간을 주는지 하늘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렇게 크게 느껴지던 상실감도 20대에 찾아오는 시련에 비하면 애교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사주를 보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초년에는 고생한다고 하던데... 시간이 지나면, 나이가 좀 들면 나아지려나? 그 여자의 힘든 시기는 끝이 없어 보이기만 한다.
(...)
누구도 그 사람만큼 살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누구든. 그 사람과 똑같은 세월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
오래전 작품이라 현재는 감정이 어떻게 변했을지 알지 못한다. 그녀의 사주처럼 지금은 많이 편안해졌으리라 믿고 싶다. 좋은 사람도 옆에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어렷을적 상처를 모두 치유 받을 수 있는 편안하고 좋은 사람말이다.
* 작가의 본명이 김정숙이었네요. 전 3권짜리로 읽었는데, 지금은 2권짜리가 검색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