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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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가 있다.

수년 전 이혼을 하고 아이의 양육권을 남편에게 뺏기고, 다시 되찾아 올 궁리를 하는중이었다.

그것이 다시 오기전까지는...  그것은 열일곱살 겨울에 처음 온 이후로 두번째의 일이다.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것. 그해 겨울 침묵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일년 가까이 병원을 전전했지만 별 차도를 못 느끼고, 정작 침묵이 풀린 것은 아주 우연한 순간이었다.  학교 수업시간에 처음 듣는 외래어를 불어선생이 발음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침묵의 병은 사라졌다.  지금 그녀가 희귀어인 '희랍어'를 듣고 있는 이유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스스로 병에서 탈출하고 싶은 적극적인 마음에서였다.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있다.

열다섯에 독일로 이민을 간 그 남자는 십칠년을 독일에서 생활하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한국에서 그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다. 그 남자는 어렷을 때부터 시력이 점점 나빠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할아버지 를 대대로 이어온 유전적인 요인이었다. 의사가 예견한 것 보다는 어둠에 잠길 시간이 훨씬 연장되고 있는 시점이다. 환한 태양이 있을때는 한 쪽 눈을 통해 세상 모습을 구별해 낼 수 있는 형편이니까.  희뿌옇긴 하지만 완전한 어둠이 아니란게 가느다란 위안을 주고 있다.  언젠가는 어둠속으로 들어가야 할테지만...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희랍어 라는 희귀어를 통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다.  희랍어 강사와 수강생으로 매주 만남을 갖지만, 개인적인 만남이라기 보다는 각자의 필요에 의해 한 공간에 있다고 보는게 더 맞다. 그러다 눈이 안 좋은 남자가 어두운 지하실에서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책은 소설치고는 대사가 많이 없다. 독백처럼 때론 일기처럼 여자의 이야기와 남자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설명해 준다.

남자가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 이야기, 가족 이야기, 친구 이야기... 

여자의 엄마이야기, 딸 이야기, 살아온 과정의 이야기...

독백처럼, 옛 이야기 들려주는 해설자 처럼 조용 조용하고 담백한 말투가 이어진다.

 

말이 언제 다시 트일지 모르는 여자와, 시력이 완전히 꺼질 일만 남은 남자의 미래가 선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희미하고 뿌연 안개가 쌓인 길일 것이다. 그들의 매개체인 희랍어 처럼, 남들이 가는 보통의 길에서 벗어난 희귀한 길을 가야하는 사람들이다.  그 두 사람의 만남이 좋은 것인지, 서로에게 더 부담스러운지 잘 모르겠다. 또 만남이 계속 이어질지 어떨지도 소설속에선 결론을 내려주지 않았다.  만나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즈음에 책의 마지막 장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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