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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평점 :
1974년에 발표한 <황토>를 이번에 새롭게 손을 보고 다시 개정판을 내놓았다고 한다.
개정판이라고는 하나 기존 원고의 대부분은 예전 30여년전의 작가의 문체라고 생각하니 새로웠다. 기성작가들도 초기 작품과 최근의 작품이 간혹 차이가 있기도 하는데, 조정래작가의 이 글은 <태백산맥> 이나 <아리랑> 에서의 작가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민초들의 고통을 적나라하고 인간적으로 그려낸 스타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 책에는 열일곱살의 '점례' 부터 오십줄에 들어선 '점례' 가 나온다. 그녀의 일생을 영화처럼 슬라이드 쇼를 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30여년간의 그녀가 살아온 시대 환경은 식민지와 6.25 전쟁이 들어 있다. 생각만으로도 그림이 그려지기는 한다. 두 말 필요없이 험난한 인생이 들어있다.
점례는 예뻤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예쁘다는 건 그닥 좋은일이 못된다. 주재소에서도 악랄하기로 소문난 '야마다'의 눈에 찍혔다. 열일곱살의 꽃다운 나이의 순결한 처자는 부모의 목숨을 담보로 그렇게 짓밟히며 야마다의 여자로 지내야 했다. 짐승처럼 갇혀 지내며 겨우 해방이 되었고, 야마다는 야반도주를 하고 남겨진 건 갓 태어난 아들과 자신 뿐이다. 해방이 되면, 자유가 생기면 나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멸시와 모멸이었다. 왜놈의 아이를 낳은 점례를 누구도 반겨주질 않았다. 사람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몸은 자유인이었어도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또 다른 여인이 있다. 이제 갓 스무살인 그녀를 시집보내기 위해 분주한 친정엄마 였다.
아들이 있는 것을 숨기고 처녀인 것처럼 속여 만난 두번째 남자는 '박항구' 였다. 똑똑하고 자상하고 말 수가 적은 듬직한 남자였다. 야마다와는 혼례라는 것도 없이 치뤄진 일방적인 결혼이었다면 박항구와의 결혼은 혼례도 치루고 동네사람도 초대해 잔치도 벌렸다. 남편은 멀지 않은 공장에서 관리자로 일을 해서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었다. 점례도 자상하고 듬직한 남편덕에 처음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세연이도, 세진이도 태어난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큰 딸 세연이가 3살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놀라운 사실은 말 수가 적었던 남편이 '부위원장' 이란다. 남편과의 대화가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놀랍고 야속한 일이다. 공산당 간부의 아내로 살면서 눈치조차 못챘기 때문이다. 부위원장의 아내로서 점례는 너무 무지했다. 하지만, 한가지 못 사는 사람도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말은 믿고 싶었다. 모두가 고루 평등한 세상이 온다는 말 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국군에 밀려 공산당원들은 점점 북으로 북으로 몰리고 있었다. 서로 뺏고 빼앗기고 끝에 현재 우리의 모습. 38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이 갈리는 현 상황이 소설에서도 벌어진다. 남편은 집안에 있는 모든 서류들을 불 태우고 처자식을 버려두고 "다시 돌아올꺼다" 라는 말만 뒤로한 채 떠난다. 야속한 사람. 다시 볼 수 있을까.
홀로 남겨진 점례. 부위원장의 아내였던 점례를 가만두지는 않았다. 젖먹이 세진이를 업고서 심문을 당하는 점례. 고함소리가 난무하는 지리한 곳에서 세진이는 병이 들었다. 점례를 취조하던 자리에 있던 미군 대위의 남자. 고맙게도 아이를 치료해 주겠다고 한다. 아이의 병을 치료해 주면서 알게 된 미군 대위. 그녀의 무죄를 도와주며, 아이의 병을 치료해 주는 선심을 쓰고... 예쁜 그녀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또 얼마간 미군의 여자로 지내게 된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버지가 다른 세 명의 자식을 키우며 늙어가는 점례의 모습을 통해,
고통스럽고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현대역사를 소설 한권으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무지하고 순박하기만 했던 한 여인을 통해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억울함과 희생, 삶의 고단함...
나라를 잃은 힘없는 민족의 아픔에, 민초들의 고통에 고개가 숙여진다. 안타까운 목숨이 잔인하게 죽어 가고, 일부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이들도 있지만 "오죽했으면..." 이란 생각을 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는 인생들이어서 마음이 아프다. 많은 희생과 뼈아픈 역사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다. 지금의 우리는 고귀한 희생으로 되살아난 존재들인데 그 소중함을 자주 잊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