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우지도 않은 어린 여자이며, 손녀뻘이나 되는 고등학생의 아이를 여자로 보고 있다고 고백하는 순간 일흔을 바라보는 이적요시인이 매우 불편하고 불편하다. 내가 은교가 아니지만 내 전신을 낯선 남자가 훑고 지나는 느낌의 소름돋음도 느낀다. 하지만 이게 모든(?) 남자들이 갖고 있는 몸속 저 밑에 숨겨진 본능이며 생체학적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물면 불쌍하게도 느껴지면서 비도덕적인 상상을 하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이적요 시인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은교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지금껏 소나무처럼 살아온 그 한평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걸 느낀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여자를 품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어떤 대상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욕망에 시인 자신도 갈등을 겪는다. 은교를 통해 느끼는 감정이 70년을 살아온, 이제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늙은 시인에게 젊음이 뿜어내는 부러운 광채인지, 그저 젊고 싱그러운 여자를 품고 싶은 욕망인지 알 수 없다. 이유는 혼란스럽지만 자꾸 그녀를 보고싶다. 그녀를 통해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 꿈틀거리는 자신의 욕망이 신선하다. 아직 늙지 않았다는 자신감도 기분 좋아지게 한다. 이적요 시인의 단 한명의 수제자 서지우작가. 단 하나의 핏줄인 ’얼’ 보다도 더 자식 같은 제자이다. 서지우 작가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늙은 시인에게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 믿음이 탄탄한 시인과 서작가의 사이에 은교가 들어오면서 이들의 관계는 계속 어긋나기만 한다. 질투심과 욕망과 서로를 보호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당사자들도 그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흔한 말로 ’가는 여자 붙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바람둥이가 즐겨쓰는 말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쿨 한 척 하거나 심각하지 않는 선에서 즐기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뭣이되었든 ’영계’가 맛있다는 말도 함께 떠오른다. (사람에 빗대어 얘기하려니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쓸까 말까 고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린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남자들이 꿈꾸는, 실현해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모든 남자들이라고 하기엔 오류가 있을 수 있겠다. 아니라고 말하는 남자도 물론 있겠지?) 이런 남자들의 속내를 끄집어내어 소설로 만든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속으로 꽁꽁 싸매고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 쿨 하게 느껴진다. 덜 속물처럼 생각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