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상호 기자 X파일
이상호 지음 / 동아시아 / 2012년 8월
판매중지


신입기자 시절, 한 선배는 내게 물엇다. '역사의 발전을 믿느냐'고. 18년을 두고 만지작거리는 화두를 던져 준 선배. 그는 떠났지만, 책을 통해 되묻는다. '역사의 발전을 믿지 않고 어떻게 기자를 할 수 있느냐'고. 그리고 혼잣말로 남긴다. '역사의 발전을 믿는 기자가 얼마나 큰 용기를 감당해야 하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고.-9쪽

알고도 보도하지 않는 것은 기자에게 범죄 그 이상이다. 법을 어기면 감옥에 갇히고 말지만, 양심을 속이면 세사잉 온통 감옥이 된다.-42쪽

형은 아직도 돌아올 기미가 없다. 칡을 캐오겠다며 삽과 쌀부대를 챙겨 산에 올라간 게 반나절 전인데 아직 소식이 없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향하고 밥때를 넘긴 배에선 진작부터 꼬르륵 소리가 야단이다. 장사하러 나간 엄마는 아직도 멀었다. 형제가 모두 잠이 들어야 엄마는 돌아오신다. 간우리 위에 새겨진 무늬를 이리저리 엮어 상상의 그림을 그리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 형은 아무래도 늦을 것 같다. 소년은 더 이상 허기를 못 참고 어두컴컴한 부엌에 들어간다. 들고 나온 건 밥 한 덩이와 김치 종지. 방바닥에 주저앉아 차갑게 굳은 밥을 서너 숟갈 떴을까? 소년은 빨간 김칫국물 위로 희끗한 밥풀을 발견했다. 밥풀을 집어내려던 소년은 깜짝 놀라 젓가락을 놓치고 말았다. 그곳엔 밥풀 대신 하얀 배추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다. 당황한 소년은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일어나선 하수구에 김치 종지를 쏟아 버렸다. 30년이 넘도록 소년은 단 한 번도 그날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날의 울음은 무슨 빛깔이었을까? 물러날 곳 없는 막다른 곳의 두려움. 가난과 구차한 삶에 대한 부끄러움, 홀로여야 했던 외로움이 한데 얽혀 그날의 간유리처럼 그저 -56쪽

희뿌연 빛깔로 기억될 뿐이다. -태영 부회장과 만나는 자리인지 모르고 불려 나갔던 술자리, 로비 사건의 현장에서 떠올린 어린 시절의 기억!-56쪽

더는 비겁하게 살지 말자. 더 이상 두 번째 줄에 서지 말자. 올라오는 차 안에서 다짐했다. 이후 소송에 걸리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고, 상관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하지만 행복했다. 더 이상 부끄러움과 살을 섞고 싶지 않았다. -배달호의 죽음 앞에서-102쪽

"개죽음, 필요하면 이런 경우 개죽음이라도 달게 받겠어. 그게 내 꿈인 거 알잖아.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내가 죽을 거야."-153쪽

'때'와 '명분'이 함께 올 수 있을까? 둘이 일치할 수 있으면 명분이 역사 속에 빛날 수 있을 것인가? 모두가 때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고 말하리라.-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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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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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자기를 알아보는 짐승은 지구상에 네 종류뿐이라고 한다. 인간, 원숭이, 코끼리, 돌고래. 며칠만 더 거울을 안 봤더라면 나는 4대 짐승에서 탈락했을 것이다. -180쪽

"태양의 자식이란 점에서 나무와 사람은 형제라는 거야."-236쪽

목과 가슴 사이에선 불처럼 뜨거운 것이 오르내렸다. 그 뜨거운 한기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날아간 자에 대한 '경외', 갈 곳이 없는 자의 '절망'.-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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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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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진구렁에 발을 딛고 있어도 눈으로는 별을 만져야 하는 거야."-293쪽

나는 문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 소설 쓰기를 가르쳐 준 사람도 없다. 세상의 작가들이 다 스승이었고 열망이 인도자였을 뿐이다. 어쨌거나 2000년 여름,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나름 포부가 야무졌다. 머릿속에는 두 개의 종탑이 있었다. 신나는 모험 이야기, 겁나는 심리 스릴러. 어느 쪽 종이 먼저 울리지는 나 자신도 몰랐다.
-작가의 말-388쪽

소설가로서 내 꿈은 진짜 꾼이 되는 것이다. 그 옛날, 이야기 하나로 저잣거리에 모인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분노케 하던 만담가는 내 인생의 롤 모델이다. 물론,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도 해 보지 않고는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이다. 돌아갈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겠지만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작가의 말-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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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품절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때때로 반민주주의자다. 나는 복거일의 글에서 이따금씩 보이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곤혹스럽다.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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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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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에 이슬을 매단 채 아침햇살을 받으면 패랭이꽃은 이파리 끝까지 긴장하면서, 쟁쟁쟁 소리가 날 듯한 기운을 뿜어내는데, 흐린 날 아침에 꽃은 긴장하지 않았다.-163쪽

-세밀화는 개별적 생명의 현재성을 그리는 일이지. 그 안에 종족의 일반성이 들어 있거든. 그래서 수목원은 세밀화가 필요한 거야. 그게 원리나 개념으로는 파악이 안 되잖아. 힘든 일이지. 지난한 일이야.
(안요한 실장의 말)-203쪽

꽃눈을 잘라 보니까, 그 안에 뱃속에 점지된 태아와도 같은 꽃잎이 숫자와 형태를 겨우, 그러나 모두 갖구고 쟁여져 있었다. 꽃이 피지 않아도, 꽃눈 속에서, 개화를 예비하는 꽃은 이미 피어 있었는데, 아직 햇빛에 닿지 않은 어린 꽃잎들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꽃으로 피어날 색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고, 흐린 연두색의 먼 저쪽 끝에서 이름 부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색이 배어 나와서 내가 있는 쪽 세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꽃눈 안에서 시화평고원 같은 광막한 공간이 열려 있었고, 색은 지금, 그 지평선 너머에서 풍문처럼 번져 오고 있었다.-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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