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먹어요
우치다 미치코 지음, 김숙 옮김 / 계림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영화 <잡식 가족의 딜레마>를 봤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후원한 영화라서,

그리고 내가 만드는 책과도 관련이 있어서

꼭 극장 가서 돈 내고 보리라 결심했던 영화였다.

예상대로, 꽤 진지한 문제 제기였고,

많은 사람들이 같이 고민해 보면 좋겠다 싶은 주제였으나, 다소 심심한 구성이었다.

비전문가의 내레이션이 몰입에 방해되는 구석도 있었고,

남편을 너무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버린 게 아닌가 좀 걱정되기도 했다.

수의사이면서 조류인플루엔자 현장에 투입된 사람이기도 한데,

그 전문성은 깡그리 사라지고 오줄없는 고집쟁이 아저씨로만 그려 놓은 게 아쉬웠다.

각성한 아내, 육식을 강변하지만 나름 논리를 지닌 남편,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들,

이런 삼각 구조로 갈등을 가져갔다면 이야기가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오지랖 넓은 소리일 뿐이겠다.

 

뭐 아무튼 영화는 공장식 축산과 그렇지 않은 축산을 비교해 보여 주면서

돼지들에게 "공장 대신 농장을" 주자고 이야기한다.

돼지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다면,

좀 더 동물에게 유익한 환경에서 자란 고기를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밀밭을 자유롭게 다니고,

좁은 우리가 아니라 그나마 좀 걸어다닐 공간이라도 확보되고,

사료가 아니라 풀을 먹고,

잠깐이기는 하지만 새끼에게 젖을 먹일 수도 있는 그런 농장의 돼지들은

영화가 의도한 대로, 살짝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고기를 몹시 애정하는 남편과 살고 있는 나 역시, 늘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면, 그나마 해로운 걸 덜 쓴 고기를 먹자, 하고...

그러나 고기가 된 동물 입장에서는 솔직히 생각해 보질 못했다.

나의 이해관계, 내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항생제를 쓰지 않고, 자연의 재료를 먹이고,

스트레스가 적은 환경에서 자란 고기를 선택했을 뿐,

그것이 사육당하는 동물에게 덜 해로운 환경이기 때문에 옳다, 하는 가치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동물권에 대해 더 깨어 있지 못했던 것, 반성한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대목은 또 있다.

공장식 축산이든, 유기농 축산이든 먹기 위해 길러지고 결국은 도살당해 인간들의 밥상에 오른다는 결론은 똑같은 거 아닌가, 하는 고민... 

아무리 자연에서 사는 동물에 가까운 형태로 기른다 해도, 그것은 결국 고기를 먹는 인간들의 죄책감을 덜어 주는 면죄부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예 채식을 하지 않고서는 그런 죄의식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생협에서 고기를 사 먹는다고 한들 그 죄가 덜어지지는 않겠다, 하는 데 생각이 미치니 그것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고기를 끊을 자신은 없고, 뭔가 문제의식은 갖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

 

영화에서 가장 불편했던 건, 돼지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채식을 결심하게 된 엄마가 아들에게 채식을 강요하는 방식에 있었다.

이미 고기 맛을 알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가 채식을 시작하면서 갑자기 고기를 끊으라고 하는 건, 자연스럽지 못해 보였던 것이다. 일종의 폭력처럼 보이는 지점도 살짝...

좀 더 커서 아이에게 선택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

물론, 해로운 걸 먹이지 않겠다는 엄마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산 소고기를 먹이지 않겠다는 선택과 고기 자체를 먹이지 않겠다는 선택은 좀 다른 문제가 아닐까?

수혈을 반대하는 종교를 가진 부모가, 아이가 수혈이 꼭 필요한 상황인데도 거부하다가 아이를 위태롭게 한 경우가 있었다. 이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부모를 욕했다. 무슨 권리로 아이의 생명을 가지고 그런 위태로운 선택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이에게 고기를 먹이지 않겠다는 엄마의 선택은 어떤가.

물론 같은 선상에 두고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수혈을 거부한 그 부모 생각이 났다.

때로 신념은 너무 힘이 세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내 아이에게 나는 고기를 먹이고 있다.

소아과 의사들은 하루라도 고기를 먹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한다.

그게 진짜라면, 우리 세대는 다 글렀다. 날마다 고기 먹고 산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적당한 회수로, 좋은 고기를 골라, 맛있게 요리해 주되

나중에 아이가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얘기는 미리 해 줄 생각이다.

고기를 먹고 사는 잡식 동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무엇인지 말이다.

 

"손녀는 울면서 먹지 않으려고 했지만

'미야 덕분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

자, 어서 먹으렴.

미야에게 고맙다고 하고 먹자꾸나.

우리가 먹지 않으면

죽은 미야에게 미안하잖아.

같이 먹자, 응?'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생명을 먹어요, 52~53쪽

 

기르던 소를 잡은 뒤 그 고기를 가져다 손녀딸과 먹었다는 이야기를 도축업자에게 하는 장면이다. 소 '미야'가 아프지 않게 단번에 죽여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딜레마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장면이어서 아이와 나눌 이야기도 한보따리다.

<생명을 먹어요>가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으려면, 아이가 크는 동안 나 역시 계속 용맹정진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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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제비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레이첼 카슨이 경고한 '침묵의 봄'은 이미 우리에겐 현실인 셈이다.

 

  아직 내가 청송에 살았을 때는, 봄이 오는 것을 귀로 먼저 느꼈다.

  먼산에 언뜻언뜻 진달래가 피어나기 시작하고, 채 초록으로 물들기도 전인 봄산 여기저기에서 쭈삣, 찌짓, 쪼조조 새들이 울기 시작하면 봄이 곧 오고야 말았다.

청송 촌뜨기였던 내가 대구로 이사온 뒤, 늘 여기가 어딘가 싶어 발밑이 허방을 딛는 것처럼 어찔어찔했던 것 같다. 

봄이 와도 새소리가 먼저 알려주지 않는 날들이 영 이상했다.

 

그때 대부분의 이농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울 아부지도 자식들 교육 때문에 도시행을 택했다.

"그때 내가 결단 안 했으모 니는 대학 몬 갔다. 대학이 웬 말이고, 고등학교도 겨우 보냈을 낀데."

다섯 남매 중 막내였던 내가 제 밥벌이하고 사는 게 대견해 보일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다.

대학 못 나왔어도, 아부지 딸로 살았으니 그럭저럭 잘 살아냈을 텐데, 꼭 그러신다.

 

암튼, 없는 살림에 딸린 자식은 주루룩이고 도시 생활이 낯설기는 부모님도 매한가지였을 터.

방이 딸린 작은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으나 이미 결딴난 가게를 사기당해 넘겨받은 줄도 모르고 6개월을 파리만 날리다 결국 가게를 접고, 다시 이사를 했다.

어찌저찌 구한 이층 셋집은 그래도 방이 두 개였다. 그러나 청송 우리 마을에서 첫 번째로 들여놓았었던 텔레비전은 이사를 오자마자 고장이 났고, 나는 매순간 심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방을 나서면 2층 마당이었지만, 주인집 빨랫줄과 장독대라도 건드릴까 봐 엄마는 질색을 했다.

"나가 놀아라이!"

뒷산이 좁다고 뛰어다니고, 온 들판을 헤매면서 놀던 나에게 도시는 불친절했고, 삭막했다.

 

유일한 위로는 새들이었다.

산새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봄이 되니 제비들이 집집 처마마다 고루고루 찾아들었다.

그리고 부잣집, 가난한 집, 가리지 않고 똥을 싸댔다.

참새들도 통통 잘도 뛰어다녔고, 까치도 여전히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주인집 마당에서 기르는 앵두나무며 석류나무에 영그는 열매들도 보기 좋았지만, 그 열매를 찾아 날아오는 새들이 더 반가웠다.

우리가 사는 2층 처마에도 제비 부부가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봄, 나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대구로 이사나와 버린 부모님에게 부아가 나 있던 내게 한껏 입을 벌리고 벌레를 받아 먹는 새끼 제비 보는 낙도 없었다면 그 시간을 어찌 견뎠을지 상상이 안 된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책가방을 멘 채로 고개를 뒤로 쭉 빼고 제비집을 쳐다보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어미 제비가 집에 들어갈 생각은 않고 빨랫줄 언저리를 뱅글뱅글 날다가 도로 앉고, 다시 날아올랐다가 앉고 하면서 엄청나게 시끄럽게 지저귀는 거다.

아래를 보니, 새끼 제비가 한쪽 날개를 제대로 펴질 못하고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참이었다.

이제 막 날기 연습을 시작했는데, 어쩌다 한 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앗싸!"

불경스럽게도, 내 입에서는 그런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무료한 일상에 그 얼마나 선물 같은 사건이란 말인가!

 

엄마가 말리거나 말거나, 빈 상자를 주워다 양배추 겉잎을 바닥에 깔고 신문지를 꾸깃꾸깃 접어 넣어 새끼 제비의 집을 만들어 줬다. 혹시라도 나오고 싶을지 모른다며 상자 한쪽 면은 완전히 터서 시원하게 해 주는 배려까지!

떨어진 새끼를 어쩌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던 어미는 내가 그러는 동안 가까이 오지도 못한 채 울고만 있었지.

"가스나! 가마 놔두면 어미가 알아서 살살 델꼬 갈 끼고만."

엄마의 호통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새끼를 신문지 뭉치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물러서자 그제야 어미는 다시 벌레를 물어와 새끼를 먹이기 시작했다.

둥지에 남아 있는 새끼들도 먹이고, 떨어진 새끼도 먹이느라 무진장 애썼다.

 

다음 날, 학교에 가지 않겠다 버티던 나는 엄마한테 등짝을 얻어맞고서야 겨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내 올 때까지 단디 지키래이!"

"가스나, 마 시끄럽다. 학교나 가라카이!"

아마도 이런 대화가 오고갔던 것 같다.

학교 끝나자마자 번개처럼 튀어온 나는 제비부터 찾았다.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제비는? 어데로 치았나?"

"제비가 밥 믹이 준다 카드나. 퍼뜩 씻고 밥이나 무라."

 

엄마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주인집 아줌마가 빨래 널러 올라왔다가 상자 밖에 나온 제비를 미처 보지 못하고 밟아 죽이고 말았단다.

"그 아지메는 와 가마 있는 제비를 밟았는데? 와? 앙앙!"

대성통곡을 하며 일층으로 내려가려는 나를, 엄마는 있는 힘껏 막았다.

그 아줌마도 알고야 그랬겠냐마는, 어린 나는 그 아줌마에게 맘껏 뭐라고 해대기라도 하면 시원하겠는데 그걸 못하게 하는 엄마가 너무도 야속했다.

주인집과 셋방살이하는 처지가 다름을 알기에는, 나는 많이 어렸다.

 

"제비는 우옜는데?"

실컷 울고 나니 새끼 제비를 어쨌는지 궁금했다.

어미 제비가 어쩌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어미가 보기 전에 얼른 치았다. 저 아래 묻어 줬으끼네, 걱정 말그라."

어미는 남은 새끼들을 무사히 길러 추워지기 전에 남쪽으로 떠났다.

다음해 봄에는 우리집 처마에 아무도 살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집 마당에 영글던 앵두며 석류며, 손 닿는 열매마다 익기도 전에 똑똑 모가지가 부러져 바닥에 떨어진 까닭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조혜란 작가의 <참새>를 읽고,

그봄의 내가 떠올랐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 하는 힘을 지닌 그림책이 어디 그렇게 흔하겠는가.

죽은 새끼 참새를 묻어 주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순결하고 순정했던 시절의 한자락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 아마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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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ter97 2015-06-2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기억이 이렇게 자세하다니ㅋ부러워요^^

들꽃푸른 2015-06-25 12:33   좋아요 0 | URL
살면서 조금 윤색됐을지도 모를 일이긴 해.. ^^ 그래도 쓰다 보니 더 또렷이 떠올라서 나도 놀람! ㅋ
 
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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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왜 위험이 뻔히 내다보이는 암벽등반에 몰두했을까 하는 것도 궁금했는데, 한 20년쯤 후라면 수전 손택 식의 어법으로 '우울한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아직 거기에 대해서도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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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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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세, 그거 받는 재미가 쏠쏠할 겁니다. 만 부가 팔리면 생활비가 되고, 십만 부가 팔리면 노후 자금이 되고, 백만 부가 팔리면 부자가 됩니다. -129쪽

난 결코 대중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186쪽

"진정한 작가란 어느 시대, 어떤 정권하고든 불화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이란 오류를 저지르게 되어 있고, 진정한 작가는 그 오류들을 파헤치며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정치성과 전혀 관계없이 진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진보성을 띤 정치 세력이 배태하는 오류까지도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끝없는 불화 속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 -작가의 말 중-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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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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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96쪽

애무할 거라곤 추억밖에 없는 저 불쌍한 늙은이는.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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