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벗 지은이가 이 달 말에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떠난다. 워킹 할리데이 비자는 벌써 몇 달 전에 받았지만,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가을까지 기다려야 했다. 비행기 값에 몇 달 정도 체제비만 들고 떠나는 여행인데도 녀석은 “가능하다면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야.” 하고 말하는 바람에 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더라도, 곧 다시 만날 것처럼, 금방 돌아올 것처럼, 그렇게 헤어지면 좋겠는데, 녀석에게는 그런 선언이, 입 밖에 내어 말하는 결단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해외 여행이라고는 촬영 때문에 모델들 데리고 며칠 다녀온 거나, 여행 패키지 상품 따라다닌 것 말고는 해 본 적 없는 녀석이 말이다.


지난 주말, 집 앞에 있는 주점 ‘지짐이’에서 술을 먹다 말고 박준이 배낭 여행객의 천국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이 책, <온 더 로드>를 지은이에게 건넸다. 술에 취한 건 나였는데 난데없이 지은이가 울음을 쏟고 말았다. “호주 잘 다녀와.” 라는 말에 운 건지, “호주에서 잘 살아.” 라는 말에 운 건지 나는 모른다. 그런 말이 오고 갔다는 기억조차 희미하니까.


열일곱에 처음 만나 지금까지, 녀석의 못생긴 손가락조차 사랑스럽고, 늘 자기 갈아입을 속옷을 우리 집 서랍 한켠에 준비해 두게 만드는 것조차 정겨워지는 세월을 이만큼 지나왔으니, 녀석이 없는 생활이 벌써부터 두려워지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뭐, 또 공항 가서 촌스럽게 눈물바람이나 하고 올 밖에. 늘 바람을 달고 사는 건 난데, 어찌 된 셈인지 내 옆에 있던 사람들이 자꾸만 바람이 되어 떠난다.


5대양 6대주를 ‘원 월드 티켓’으로 돌고 있는 나의 벗 은동이는 지금 아르헨티나에 머물고 있다. 어쩌면 벌써 콜롬비아로 옮겼는지도 모르겠다. 브라질에서는 강도를 만나 목에 칼 들어오는 살벌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만, 상파울루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얼굴에서 빛이 난다. 살맛나는 날들을 보내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루가 서른 시간쯤 있는 사람처럼 바쁘게 사는 완철도 3년 뒤에는 떠나겠노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떠날 거야, 여기가 아닌 곳으로. 여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다른 길 위에 열려 있는 새로운 풍경과 가능성들에 나를 내던지기 위해서.” 라는 멋진 출사표를 던지고 3년 뒤를 향해 달리고 있다.


박준이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나의 벗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이미 길 위에 있다는 것이고, 아직 떠나지 않은 벗들은 길 위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은 책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 이를테면 낯선 풍경을 하나라도 더 많이 보여 주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오류에 빠지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미덕은 충분하다.


세계를 여행하려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카오산 로드를 주제로 삼고, 그 곳에 머물고 있는 젊은 여행자들의 땀냄새 나는 인터뷰를 충실히 싣고 있는 이 책의 미덕은 여행객들이 솔직담백한 속내를 살아 있는 언어로 쏟아내고 있다는 데 있다. 숨김 없이, 용감하면 용감한 대로, 비루하면 비루한 대로, 흔들리면 흔들리는 그대로를 보여 준다는 것이 좋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한 여행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다면 나도 한번 해 볼까?’ 하고 일어서게 만드는 책이다.


“Go with the follow."

박준이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21살의 벨기에 청년 코베 윈스는 ‘모든 것이 흘러가는 대로 두고 따르라’는 이 말을 품고 여행 중이라고 했다. 책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멋진 말들 가운데 이 한 구절이 마음에 와서 박혔다. 돌아보면 나는 내 인생에 발목 잡히지 않고 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 왔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스스로에 대해 거부하고 부정하고, 다른 내가 되고 싶어서 껴안아야 할 내 안의 나를 무시해 왔다. 남들이 보는 나도 부정할 수 없는 나, 내가 되고 싶은 나도 거부할 수 없는 나, 보기 싫은 나도 어쩔 수 없이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쉽지가 않다. 그래서 어린 여행자의 이 말이 좋았던 모양이다.


“가능성에 대한 즐거운 초대”

24살인 벨기에 여인 키티 히터나흐의 이 말 역시 마음에 박혔다. 만나야 할 사람들, 내 발이 가 닿아야 할 곳들, 머물러야 할 곳까지 미리 다 준비해 놓고 떠나는 내 여행이 놓쳐 버린 많은 가능성들에 대한 아쉬움이야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거지만, 키티의 정갈한 원칙은 날카롭게 나를 찔렀다. 때로 ‘여기가 아닌 저기’에 가 있고 싶어서 짐을 꾸리는 나로서는 찔리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나와 한 달 동안 호주에 가 있었던 경화 언니가 프레이저 섬에서 잘 데가 없다고 걱정하는 내게 그랬다. “불안해하지 마, 불안해해도 잘 될 일이면 잘 될 거고, 안 될 일이면 그냥 어그러지게 냅두는 거야. 니가 불안해하니까 나까지 어지럽잖아.” 가끔은 잊고 산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걱정해서 해결이 안 될 일이면 걱정하느라 시간 낭비할 까닭이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말이다. 


책 속에는 사촌동생과 오빠와 함께 여행 중인 21살 김수영의 발랄한 여행도 있고,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인도 춤을 배우고 있는 17살 이산하의 흔들리는 청춘도 있고, 결혼 3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외국 여행을 나온 57살 김선우 아저씨의 따뜻한 여행도 있고, 80쪽짜리 카오산 안내서를 자비 출판해 먹고사는 30살 그리스 총각 디미트리스 찰코스의 엉뚱한 체류기도 있고, 카오산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있는 27살 자메이카 여인 트레이시아의 진중한 날들도 들어 있다.

자기가 살아야 할 곳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싶은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자기 몸에 꼭 맞는 시간과 장소를 발견하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행복했고, 떠날 준비를 하는 벗에게도 그 행복을 나누어 주고 싶었다.


“왜 꿈만 꾸고 있는가? 한번은 떠나야 한다. 떠나는 건 일상을 버리는 게 아니다. 돌아와 일상 속에서 더 잘 살기 위해서다.”


책을 쓴 박준의 말대로, 더 멋진 일상을 일구어 갈 사람들이라면 ‘온 더 로드-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꿈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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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9-12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보고 갑니다. 꾸욱~~ 좋은책 같아요.

들꽃푸른 2006-09-1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가슴 뛰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