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장영희의 책 이야기가 나왔다. 다리가 불편한 장영희 교수가 여러 대학에서 입학 시험조차 거부당하다가 서강대에 어렵게 입학한 순간의 이야기, 대학 다니면서 체육 수업을 듣느라 비 오는 날 우산도 쓰지 못한 채 휠체어를 끌고 언덕을 넘다가 넘어져 흙투성이가 된 대목 들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참지 못하고 울어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책을 보고 있던 장소가 지하철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더라고 했다.

“근데, 그거 서평 모음집 아니었나?”

책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고전을 소개하는 신문 칼럼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책을 읽으면서 감동받았다는 것이 좀체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 친구랑 만난 다음 날, 당장에 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올해 3월 15일에 1쇄를 찍었는데, 내가 산 책은 8월 30일에 찍은 8쇄본이다. 1년도 안 되었는데 8쇄까지 찍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보편 타당한 어떤 감동이 이 책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겠다, 그것은. 책을 산 그날로 당장 나 역시 장영희 글의 매력에 빠져 버렸으며, 책장을 덮은 지 이틀째, 나는 어느 새 이 책의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친구의 얘기를 듣다가, 그곳이 어디인지 까맣게 잊고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던 순간들 생각이 났다. 교보문고 어린이책 코너에 서서 집에서도 몇 번이고 읽었던 <우동 한 그릇>을 다시 읽다가 훌쩍거린 일, 사형수 윤수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마음 아파서 버스 안에서 몰래 눈물 훔쳤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바보 같은 사랑 때문에 친구 대신 죽은 승룡이의 순박함 때문에 눈물이 났던 만화 <바보>, 먼 땅에서 사랑을 잃고 믿음을 잃었던 네팔 사람 카밀의 절망 때문에 울었던 <나마스떼>까지. 올 여름과 가을 동안만 해도 이만큼이나 되니, 듣는 분들은 혹시 아무 책이나 보면 다 우는 거 아닌가 생각하실라나? 그렇담 내 눈물이 너무 가치가 없어지게 될까?

뭐 어쨌든, 눈치 채셨겠지만 난 눈물이 흔한 사람이다. 그러니 내 친구나 내가 장영희 교수의 책을 보다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 뭐, 또 그저 그런 책이었겠거니 지레짐작하신다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 이 책이 요즘 흔하고 흔한 서평 관련 책들 가운데 단연코 빛나는 점이 있으니, 책에 실린 리뷰들이 저자의 삶에 깊이 닿아 있어서 어느 책 얘기든 허공에 붕 떠 있는 소개 글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본인이 장애를 지니고 있어서 그런지 소개해 놓은 책 가운데도 그런 책이 꽤 여럿 보인다. 펄 벅 여사의 <자라지 않는 아이>나, 장애를 지닌 채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앨리자베스 배릿을 사랑했던 로버트 브라우닝의 작품 이야기나, 허만 멜빌의 <백경> 이야기도 장영희를 거치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브루닉 신부님에게 장영희의 아버지가 제발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는 대답을 듣고는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니, 어쩌면 그런 마음이 담긴 책들에 특별한 감동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어렵지 않게, 그러면서도 에두르지 않는 정확한 분석력을 보여 주는 지혜로운 눈에 찬탄하게 만드는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덤이랄 수 있겠다.


“올해 저희 세 식구는 저희 일생에 가장 사치스러운 일을 하기로 했죠. 북해정에서 우동 3인분을 시키는 일 말입니다.”(<우동 한 그릇>에서)


“우리는 어려운 것에 집착하여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을 극복해야 자신의 고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고독한 것은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알기에 그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고 다른 모든 행위는 그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든 일에 초보자이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초기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합일, 조화가 아닙니다. 사랑은 우선 홀로 성숙해지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해서 당신을 사랑합니’”라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한다.(에리히 프롬)


“내가 이상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인간은 결국 선하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란과 불행과 죽음 뒤에 내 희망을 쌓아 올릴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세계가 차츰 황폐해가는 것을 보고 수백만의 고통을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보면 언젠가는 모든 일이 다 잘 되고 이 잔악함도 결말이 나고, 또 다시 평화와 고요가 돌아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이상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정말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안네의 일기>에서)


“어려움이 닥치고 모든 일이 어긋난다고 느낄 때, 이제 1분도 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래도 포기하지 말라. 바로 그때, 바로 그곳에서 다시 기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스토우 부인)


이밖에도 ‘주옥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명문들이 책에 가득하다. 말이 말로써 끝나지 않도록 삶으로 낮게 그 글귀들을 가져오는 장영희의 솜씨도 대단하다. 지하철에서 자신을 가리키면서 “저 봐, 에비 에비, 너 계속 울면 저 사람이 잡아간다” 하는 어리석은 엄마를 만나고도 절망하지 않는 강인한 영혼, 남들을 비난하는 사람보다는 이해와 사랑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이겨 내려는 장영희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제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장영희가 소개한 여러 책들을 메모장에 적어 놓고, 이미 읽었던 책들이지만 다시 제대로 읽고 싶어진 책들, 늘 누군가의 추천 목록에 들어 있었으나 한 번도 내 것으로 취할 생각을 못했던 소위 ‘명작’이라는 책들, 장영희의 눈으로 읽고 싶어진 여러 책들의 목록을 인터넷 서점 카트에 하나하나 담으면서 나는 또 걱정이 앞선다.

이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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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12-0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사회가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냉혹한지를 잘 드러내 준 책이라 할 수 있지요. 따스한 마음이 잘 드러난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들꽃푸른 2005-12-05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 님,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가슴이 참 따뜻해지는 책읽기의 즐거움에 빠졌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