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어두운 골목 모퉁이를 막 돌자 뒷좌석에서 운전자를 부르는 다급한 소리가 들린다.
“아저씨, 잠깐!”
채희가 정민을 불렀지만 차는 이미 골목으로 들어선 참이다.
“아! 모퉁이 돌지 말라니까. 나 내려야 된단 말이야.”
“애가,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니까. 그러니까 집이 어디냐고?”
정민이 채희를 다그치며 백미러로 채희를 본다. 순간 자동차 유리창 밖으로 서성대는 사람의 모습이 얼핏 지나간다. 고방장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형체를 따라 뒤로 돌아가자 정민의 시선도 채희에게서 유리창 너머의 그림자에게로 옮겨진다. 정민이 차를 세운다.
“에이-씨~~, 모퉁이 돌지 말라고 했잖아.”
채희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정민을 쏘아보고는 차에서 내린다. 채희가 두어 발자국도 체 가기 전에 벌써 저쪽에서 채희를 알아보고는 달려온다.
“리디아.”
채희를 덥석 안고서는 여자가 한숨처럼 내뺃는 이름. 처음 듣는 아이의 다른 이름은 고반장에게도 정민에게도 그 여자의 옷차림만큼이나 낯설다. 잘 다녀진 정갈한 회색원피스에 머리 위로 씌어 진 같은 색깔의 두건.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는 수녀다.
“됐어요. 돌아 왔으면 그걸로 됐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죠?”
그녀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아이를 여기저기 살피면서도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죄송합니다.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정말로 고반장은 채희에게 여러 번 전화번호를 물어 봤었다. 하지만 채희는 굳게 입을 다문 체 도무지 말을 하지 않았다.
고반장의 소리에 그녀가 그제야 그와 정민을 의식한다. 두 사람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불안한 듯 흔들린다.
“일산경찰서에 고형사입니다. 이쪽은 노정민 형사고요.”
그가 인사하자 정민도 같이 고개를 숙인다. 정민은 이상하게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아마도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러겠거니 하고 혼자서 생각하고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킨다.
두 사람의 소개를 받은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커진다. 그녀는 채희를 살짝 비키듯 등 뒤로 가리고는 애써 짐작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따라 예를 갖춘다.
“레지나 수녀입니다. 리디아를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마 다 숨기지 못한 긴장감이 떨리는 목소리 사이로 새어 나온다.
“저기…”
“잠깐만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반장의 말문을 그녀가 막는다. 그러고는 고개를 뒤에 있는 채희에게 돌린다.
“리디아. 마틴 신부님이 기다리세요. 먼저 집으로 가 있을래요? 나도 곧 갈게요.”
그녀가 채희를 내려다보며 부탁한다. 분명히 부탁조지만 거절 할 수 없는 단호함이 있다. 채희는 금방 돌아서 가지 못하고 망설이며 슬쩍 고반장을 본다.
“그러게 아까 사진 달라니까.”
채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레지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웠다.
“리디아.”
그녀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채희를 부르자 아이가 결국 돌아선다. 채희가 돌아서자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발이 아이 쪽으로 나간다.
“어…야?”
그런 정민을 레지나가 막지만, 반대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채희의 고개는 돌아간다.
“차 돌리지 말라니까.”
정민과 눈이 마주치자 채희가 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벙긋댄다.
“뭐라고?”
정민이 채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큰 소리로 되묻자 레지나가 뒤를 돌아본다.
“리디아, 제발.”
아까와는 다른 너무나 슬픈 목소리. 분명 제발이라고 말했다. 잘 쓰지도 않는 그런 힘든 말을, 아이에게…….
“바보.”
채희가 정민에게 던지듯 한마디 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뛰어간다. 정민이 채희를 따라가려고 하자 레지나가 다시 막아선다.
“안됩니다.”
채희가 떠나자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해 버렸다. 목소리는 여전히 불안감을 감추지 못 한 듯 가볍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전혀 흩트려짐이 없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시나 봅니다, 수녀님.”
고반장은 해명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듣고 싶은 애기도 있었다. 그건 꼭 사건에 연관 된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요. 애기 안하셔도 됩니다. 리디아를 무사히 데려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먼서 가보겠습니다.”
레지나가 몸을 돌린다.
“얼마 전에 잃어버린 딸아이의 개를 채희가 찾아줬습니다.”
돌아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춰 선다.
“채희가 사진만 보고서도 정확히 알려줬습니다.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레지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서는 고반장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친다.
“채희……. 리디아가 이름을 말하던가요? 채희라고?”
그녀는 아이가 개를 찾아 줬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오히려 채희가 스스로 이름을 말 했다는 것에 더 놀라는 듯 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리디아를 알고 계신다면 … 돌아가 주세요. 다시 말을 한 것도 이렇게 다니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리디아는 그냥 아직… 그냥 아이일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일은 안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보지 않은 것을 말하거나 알 수는 없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레지나가 다시 걸음을 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녀가 제자리에 다시 서자 정민이 처음으로 레지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보지 않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믿을 수도 없지 않냐?’ 하……. 수녀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그렇다면 그 옷, 입고 있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민과 레지나, 양쪽 모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정민의 눈동자가 먼저 움직인다.
“믿는다는 것, 안다는 것이 먼저래서 이 옷을 입을 수도 있지만 믿고 싶어서, 알고 싶어서 입을 수도 있지요.”
그녀가 말을 하면서 처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살짝 웃는다.
“그래서였군요. 이제는 조금 알겠습니다. 채희가 이름을 말 한 이유.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제가 실례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제가 아직 수도가 부족합니다. 밤길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레지나가 두 손을 모으고 두 사람에게 짧지만 깊이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 그녀가 간다. 아이가 사라졌던 언덕길로……. 길 끝에 보이는 빨간 색 십자가를 향해. 언덕위로 늘어진 그녀의 그림자가 차츰 짧아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아무도 없는 언덕위로 뾰족이 솟은 십자가만이 두 사람의 시야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