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화면을 가득 채운 노란 구명보트 안으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잔뜩 웅크린 자세로 보트에 매달린 남자는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래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추락한 비행기에서 목숨을 건졌으니 이보다 더한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잠시 후 정지 된 듯했던 카메라가 남자를 화면 가운데에 두고는 서서히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난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무서운 공포를 장르가 드라마인 그 영화 -cast away- 에서 느꼈다. 빛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서 못 해도 수 십 미터는 됨직한 파도 위에 하늘의 작은 별처럼 반짝이는 구명보트. 만약 내가 그 구명보트의 생존자였다면 난 차라리 죽지 못한 것을 한탄했을 것이다.

  그런데 <파이 이야기>에서는 영화 -cast away- 와 비슷한 상황에서 하나가 더 더해진다. 뭐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상대를 알고 나면 차라리 톰 행크스가 부러울 것 같다.

  금빛 같은 옅은 황갈색바탕에 뚜렷한 검은 줄무늬, 몸길이는 약 2m 정도고 무게는 대략 200kg 정도. 이름은 리처드 파커, 종은……. 벵골 호랑이이다. 만약 내가 ‘파이’였다면 차라리 그 사실을 안 순간 심장마비로 즉사하거나 당장 정신을 잃고 그대로 익사하기를 소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고 사는 게 내 맘대로 되던가? 생명은 어느 한순간에 사라져 삶을 허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 반대로 상상할 수 없이 강한 끈질김으로 탄성을 자아내기도 하지 않던가! 어쨌든 ‘파이’도 거의 눈만 뜬 혼수상태에 빠져들었지만 숨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파이’의 이야기가 시작 된다. 푸른 바다, 난파, 상어, 구명보트, 호랑이, 그리고… 파이.

  사실 이 책의 모든 내용은 표지에 다 나와 있다. 참 간단한 그림으로 편집된 표지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파이 이야기>의 표지 그림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앞에서 말한 책의 모든 내용과 등장인물 -푸른 바다, 난파, 상어, 구명보트, 호랑이, 그리고… 파이- 가 다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떼어 놓고 이야기가 될 수 없듯 그림도 어느 하나를 빼놓고 그릴 수 없다. 표지그림만으로는 이 상황에서 ‘호랑이가 빠지면 좀 안전하지 않을까?’ (처음에 내가 톰 행크스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충분히 상상해 보겠지만 책을 읽고 나면 이 그림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벵골 호랑이, 바로 리처드 파커다. 그가 있었기에 ‘파이’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파이 이야기>의 표지는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글로 그 그림의 요소를 모두 만나고 난 후에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살아있는 완전한 이야기가 된다.

  솔직히 이 완전한 이야기에서 난 아직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실화처럼 써져있지만 결코 실화가 아니고 드라마 형태의 이야기지만 읽고 난 후엔 판타지소설 같은 느낌이 더 강했던 <파이 이야기>. 특히 책의 마지막은 <파이 이야기>를 읽은 게 봄이었는데도 아직도 나를 여전히 혼란스럽게 한다. 파이가 자신이 겪은 얘기를 솔직히 한 부분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거짓으로 지어 낸 얘기 사이를 오가는 혼란이다. 워낙 믿을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이야기여서 현실성으로 따지자면 파이가 지어 낸 이야기가 더 현실성이 있지만 너무 고통스럽고 끔찍한 이야기여서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세상이 보기엔 충분히 타당성이 있겠지만 그건 날 너무 아프고 힘들게 한다.

  생각을 왔다갔다하며 이리저리 옮기기를 몇 십분. 그 몇 십 분을 표지만 보며 생각에 잠기다 보면 책의 표지도 결론에 따라 느낌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어쩔 때는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또 어쩔 때는 섬뜩한 공포와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책의 내용만큼 환상적이고 신비롭게 다가오는 <파이 이야기>의 표지. 단지 표지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린 결론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니! 독자로 하여금 생명력을 부여받는 표지는 단연코 이 책 하나 뿐일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파이 이야기>의 표지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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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s 2005-08-19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황색은 파이에게 구원의 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파이를 살 게 해주었던 리차드 파커가 주황색이었잖아요.
파이에게는 리처드 파커가 주황색 구명조끼였던 셈이 아닐까요...
그래서 글자색도 주황색을 쓰신 게 아닌지? ^^

아라 2005-08-19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두조아님의 생각이 맞아요. 주황색은 리처드 파커의 색이고 또 구명조끼의 색이기도 하죠. 그리고 파이한테 이 색만큼 특별한 색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제가 책을 읽을 때 줄을 치면서 읽는 습관이 있는데 <파이 이야기>를 처음 펼치고 색연필들 사이에서 집은 색이 주황색이었어요. 그때는 그냥 표지의 호랑이가 너무 강렬해서 동일한 색깔로 골랐는데 이제 주황색은 저한테도 단순한 호랑이가 아닌 리처드의 색깔이 돼버렸네요. 하지만 구명조끼쪽은 사양할래요. 전 물을 아주 무서워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