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는 오랜만에 집에서 쉬고 있었다. 커피 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그녀가 브러시를 손에 들고 애견을 부른다.
“마루야, 이리 와. 간만에 머리 좀 빗자. 누가 보면 주인도 없는 줄 알겠다.”
그녀의 부름에 소파 위에 누워 있던 노란 색 리트리버 한 마리가 카펫위에 내려와서는 그녀 앞에 납작 엎드린다. 그녀는 개가 거리의 개인 것처럼 말했지만 개는 언 듯 보기에도 윤기가 흐르는 게 뚜렷한 이목구비하며 제법 좋은 종인 것이 한 눈에 보인다. 다만 하얗게 센 눈 주위의 털이 개의 나이가 적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보는 다갈색 눈동자도 깊이가 있어 보이는 게 눈만 보면 꼭 사람 같다.
“우리 아기를 누가, 머리도 안 빗겨주고.”
그녀는 시원스레 빗질을 하는 내내 개에게 애정의 말을 건넨다.
드르륵 드르륵.
테이블 위에 휴대폰이 요란하게 움직이다. 깜짝 놀란 정아가 반사적으로 휴대폰 폴더를 연다.
“여보세…….”
“나야, 급해. 한 열 살쯤 됐고 갑자기 쓰러졌는데 의식이 없어.”
자신이 누구인지는 얘기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자기 얘기만 하는 건너편의 목소리. 사실 누구인지 얘기하지 않아도 정아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안다.
“그럼 병원 가.”
“못 가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급하다고. 어디야? 집으로 좀 빨리 가 있어.”
“너 지금 1년 만에 전화했어. 그거 알아? 아니, 1년도 넘었지. 그때도 이랬었지 아마. 다짜고짜 환자 차트나 빼달라고,”
“그래서 해줬어?”
“아니. 지금도 뭔지 모르지만 싫어. 딴 데 가.”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흘러내린 단발머리를 쓸어 올리며 폴더를 닫으려고 하자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다.
“누나, 정말 급해. 앤 애란 말이야. 게다가……. 하여튼 그냥 병원은 안 된다고. 안되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녀는 의아했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기에 싫은 누나 소리까지 하면서 부탁하는 걸까?’
“집이야. 대충이라도 말해 봐.”
“10세가량의 여자 애. 얘기 중에 갑자기 가슴을 쥐고 쓰러졌어. 호흡이랑 맥박이 빠르긴 한데 비정상적은 아니고 계속 헛소리를 하는데 의식이 없어.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때렸니?”
“뭐?”
정민이 자신이 들은 말이 의심스러운 듯 되묻는다.
“때렸냐구?”
“미쳤어? 내가 애를 왜 때려? 아휴, 정말. 끊어. 거의 다 왔어.”
일방적으로 통화가 끝나자 정아는 휴대폰을 다시 탁자위에 놓고는 검진가방이며 링거 걸이를 자신의 방에 가져다놓는다. 환자의 상태를 모르지만 한시라도 급하다 싶으면 그대로 정민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싶어 현관을 나가 대문을 향해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마침 그녀의 눈에 정민의 차가 보인다. 그녀가 막 대문을 열자 정민이 아이를 안고 들어온다.
“외상은?”
“아이씨, 정말, 미치겠네. 나 안 믿어? 안 때렸어. 안 때렸다구.”
정아쪽으로 고개를 돌려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하다. 이마 위로 땀방울에 적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이며 구겨진 바지에, 등 뒤로 새어나온 땀까지. 정아는 무슨 일이 길래 웬만한 일로는 꿈쩍도 안 하는 동생이 이렇게 당황하고 다급해 하는 건지 내심 더 궁금해진다.
정민이 정아에게는 묻지도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현관으로 들어서서는 아이를 그녀의 침대 위에 눕히자 그녀가 재빠른 동작으로 아이에게 와서는 동공을 살피고 맥을 짚고는 청진기를 가방에서 꺼낸다. 가슴 여기저기 청진기를 대던 그녀가 정민에게 묻는다.
“애한테 무슨 짓을 했어? 그냥 얘기만 한 거 갖고 애가 쓰러지니? 시실대로 말해. 경찰에 신고 할 거니까.”
그녀는 정민이 애한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부러 그의 속을 뒤집는다.
그때까지도 침대 앞에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가 그제야 침대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대답한다.
“그냥 몇 가지 물어만 봤어. 진짜야. 근데 애 괜찮은 거지? 그리고 경찰이 코앞에 있는데 경찰을 부른다는 게 말이 돼? 나도 다 체크 해 봤단 말이야.”
“그럼 그냥 병원에 가지 뭐 하러 싫은 소리까지 하면서 나한테 왔어?”
정민은 아이에게 링거를 꽂는 정아의 옆으로 다가서서는 말없이 아이의 얼굴을 본다.
“나도 아직 잘 몰라. 나도 지금 정리가 다 안 된다고. 어쨌든 일어나기는 하는 거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놀란 거 같아. 쇼크 상태랑 비슷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의식이 있어. 단지 아이가 일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저녁까지는 기다려보겠지만 그래도 깨어나지 않는다면 병원으로 데려 갈 꺼야.”
정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정민은 조금 고른 숨을 더 크게 한번 내 뱉는다.
“그럼, 그땐 내가 먼저 데려 갈 거니까, 그런 적정은 하지도 마. 방금 전까지 얼마나 팔팔했는데.”
“말 안 할 거야?”
정아가 설명을 재촉하자 정민이 방을 나가버린다.
“아, 몰라. 좀 기다려. 고반장님 오실 거야. 그리고 제 만 놀란 줄 알아? 나도 놀랬단 말이야. 나도 숨 좀 돌리자고.”
그는 대충 대답하고는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며 눈을 감는다. 마루가 소파 위로 올라와서는 그에게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척을 한다. 그가 눈을 뜨고 곁눈질로 마루를 한 번 쓱 보고는 다시 정아가 있는 방을 슬쩍 쳐다보고 이내 또 눈을 감는다.
“차라리 개가 훨 낫네, 누. 구. 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