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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에 내가 본 서부영화는 항상 처참하게 죽어있는 백인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이를 발견한 한 남자가 복수를 다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그 남자는 당연히 죽은 여인의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범인은 말 할 것도 없이 ‘머리가죽을 벗기는 일을 서슴지 않게 행하는’ 인디언들이었다. 범인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없지만 그런 건 보지 않고도 다 알고 있는 백인들은 이제 복수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노인을 포함한 모든 인디언들을 적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복수’와 ‘개척’이라는 명분하에 몇 번의 전투를 성공으로 이끈 백인들이 결국 그 땅에 반드시 새로운 터전을 만들겠다는 결연한 표정이 클로즈업되면 이제 영화는 거의 클라이맥스에 다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 어디에도 원래 그 땅을 먼저 빼앗기고 가족을 먼저 학살당한 것이 인디언이라는 이야기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단지 내 머리가 그런 영화를 재미있게 봤을 때 보다 더 커지고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미국의 ‘개척정신’에 반미 감정이 고조되어서 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그런 영화를 볼 수 없어서가 ‘인디언 멸망사’라는 이 책을 들게 만든 것이다. 누군가가 잊을 만하면 하나씩 개봉되는 세계2차 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주제로 한 영화를 계속 만드는 이유는 그런 영화 뒤에 그런 비참했던 자신들의 과거가 잊혀지기를 바라지 않는 유대인들의 막대한 자본과 아낌없는 물적 지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에 '피아니스트'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전쟁의 참혹함을 실감했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깊은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본 인디언이 나왔던 영화는 10년도 더 전인 '라스트모히칸'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가 바로 이 책에 제목에 나와 있는 듯하다. ‘인디언 멸망사’ ! 유태인들은 독일군에게서 살아남았지만 인디언들은 그들의 땅을 빼앗기고 그리고 살아남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 많은 죽음들과 아픔들을 사람들의 기억에 남길만한 어떤 힘도 그들에게 남아있지 않을 뿐더러 그들 자신조차도 사라져가는 것이다.
이 책은 백인을 상대로 불굴의 투지와 정신력으로 저항하며 항상 전투로 무장하고 있는 인디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벌 떼처럼 많은 백인들을 상대로 자신과 가족과 부족을 지키려는 추장들과 전사들의 이야기이며,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는 한 민족의 몸부림이다. 각기 전투 또는 투항이라는 다른 두 가지 방법으로 살아남으려고 했던 이 민족은 양쪽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전투에서는 벌 떼처럼 밀려드는 백인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이길 수 없었으며, 투항에서도 백인들은 항상 투항을 전제로 내걸었던 모든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역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좋은 인디언들은 거의 다 죽었고 남아있는 인디언들도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라는 한 백인에 말처럼 대다수가 좋은 인디언이 되었다. 백인에게는 죽은 인디언만이 좋은 인디언이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인디언들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이 책을 읽고 울고 있는 나를 다시 바라보는 이유는 농담처럼 얘기하자면 내가 전생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은 인디언 아이이거나 여인이거나 이름 없는 전사였기 때문이라면 차라기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쥐고 있는 내 손이 떨리고 힘이 들어가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으며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아픔 이유는 오히려 내가 전생에 그들의 등 뒤에서 칼을 찌르고 저항하지 않는 수많은 인디언들의 머리가죽을 벗겼던 백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의미는 참회의 눈물일 것이다. 영원히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 그 땅에서 그들과 그 땅을 영원히 앗아간 참회의 눈물.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백인들을 더 닮았다는 데서 오는 자기혐오의 눈물. 이제 어느 누구도 그때처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살 수 없다. 설사 그가 인디언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