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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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은 말한다. 나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어요.

남한과 북한으로 갈려 있는 이상 이 배신이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지위, 즉 귀속지위에 의해 우리는 갈등을 해야만 한다. 태어나보니 남한이었고 북한이었던 탓에 우리는 서로 우리의 생각이 옳다고 교욱받으며 자라야 했다. 훗날 알고보니 아니구나...라는 걸 느끼게 된다고 해도 그건 조국에 대한 배신이 되어 돌아온다. 현실적으로 탈북자들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배신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고는 해도 북한 입장에서는 배신자인 것이다.

전 국정원 요원이었던 송강호와 남파공작원 강동원. 이 둘은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지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걸 숨긴 채 기묘한 동거를 하게 된다. 처음의 긴장감 넘치는 상황에서부터 서서히 정이 드는 모습, 이 과정 속에서 강동원이 남한에 대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모습 등 좁은 설정 안에 감독은 사람의 감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모습을 과감없이 깔끔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사실 송강호보다 강동원이다. 송강호에게는 강력한 갈등의 순간이 없다. 송강호는 강동원을 국정원에 팔아넘기려고 했었지만 나중에는 강동원이 자수할 수 있게 배려해 주기도 했고 딱히 강동원에게 먼저 위협적인 행동을 해야만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강동원은 조국에서 내려온 그림자의 존재와 남한에서 형이 되어 준 송강호 사이에 끼어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대부분 남북한을 다뤘던 영화에서는 이 부분에서 조국을 선택하든지 배신하든지 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다.

일전에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의형제를 함께 비교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송강호가 공교롭게도 세 영화에 모두 출연한 바람에 송강호에게 눈이 갔지만 의형제를 보고 난 지금, 이 영화의 핵심은 강동원이 맡은 역이지 않나 싶다. 그 이유는 우선 남북한을 다룬 영화 중 가장 한 개인에 집중한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의 상황, 선택의 상황은 너무 흔하지만 이런 상황의 결과는 결국 조국을 비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조국보다도 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동원은 아무도 배신하지 않은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졌던 자신의 신념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에게 정을 베풀어 준 형에 대한 의리도 지킨다. 북한의 남파공작원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믿음을 지킨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 속의 강동원이 상징하는 바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어느 한 나라에 태어나 그 나라의 논리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설정보다 한 인간으로서의 고민과 신념이 좀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국가 간의 이념 논쟁보다 각자 개인으로서의 믿음과 신념에 따라 서로가 믿는 것들을 지켜나간다면 조금 더 타협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마음 불편한 이데올로기를 지키는 것 보단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에 근거한 타협이 좀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이 영화의 강동원을 보면서 나는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서로가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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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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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년 동안 나는 여유가 된다면 수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버퍼링이 걸린다고 느꼈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3 곱하기 3은 9인데, 이게 바로바로 생각나는 게 아니라 3더하기 3은 6이고 여기에 또 3을 더하니까 9. 이런 식으로 좀 버퍼링이 걸리더란 말이지. 그래서 다시 수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생각할 때 좀 더 그 생각의 단계를 단축시키고 좀 더 논리적으로, 조직적으로 생각하고 싶어서.

박사가 사랑한 수식. 이 영화를 보고..나는 다른 측면에서 수학이 공부하고 싶어졌다. 좀 더 철학적인 측면에서 수학 공부가 하고 싶어 졌다고나 할까. 순수 자연과학을 하는 분들을 보면 그 분위기가 순수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아마도 그들은 자기 연구분야를 통해 우주를, 섭리를 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거기다가 그들은 꾸밈도 없다. 딱딱 떨어지는 깔끔함 속에서도 허수, 루트를 통한 풍부한 상상력과 포용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 영화 속 박사가 그랬다. 딱딱 떨어지는 계승, 우애수, 완전수 등의 깨끗함을 사랑하면서도 루트라는 기호가 가진 포용력을 생각할 줄 알고 허수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 상상력까지 생각할 줄 알았다.
흔히 숫자만을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은 왠지 정없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것은 아마도 보이는 숫자만을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내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웠지만 그 수식에 포함된 기호를 보면 박사는 눈에 보이는 숫자만이 아니라 눈에 그 너머에 있는 숫자까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박사 그 자체가 사랑스럽기도 했지만 박사가 전해주는 이야기들도 좋았다. 숫자를 통해 풀어가는 우주의 자연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런 박사에게 숫자에 대한 이해를 키워갔던, 장래에는 수학 교사가 된 루트의 이야기도 좋았다.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수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업을 하는데 내가 만난 수학 선생님이 루트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좀 더 수학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 속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루트의 어머니인 가정부였다. 이 영화는 이 가정부가 없다면, 이 가정부가 이런 성정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성립할 수 없는 영화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박사의 기억은 80분 밖에 지속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가정부는 출근할 때마다 현관에서 박사와 똑같은 대화를 되풀이 해야 했다. 아무리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이미 들은 이야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고 언제나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진지하고 성실하게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녀 이전의, 대부분의 가정부들은 견뎌내지 못하고 그만 두었지만 그녀는 이를 힘들어하기 보다는 박사를 이해하고 박사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 스스로 숫자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 박사가 기억장애를 앓고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박사와 같은 사람은 그렇게 찾아보기 힘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가정부와 같은 사람은 어떨까? 박사가 가진 284와 가정부가 가진 220의 숫자. 우애수. 이 우애수가 흔치 않은 것처럼 이 박사와 가정부의 조합도 흔치 않은 조합이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질척하게 흐르지 않고 처음의 그 깨끗함 그대로 완전무결하게 끝난 것 같아서 좋았다. 처음의 그 순수함을 마지막까지 유지한 참으로 아름답고도 순수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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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우-여섯 번의 기회 - Saw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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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우선 나는 여섯번의 기회가 연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뢰찾기를 하듯이 중간에 한번이라도 실패하면 그대로 게임 아웃이 되는 것. 그리고 이 기회들 속에서 답을 찾으면 게임을 끝낼 수도 있는 것. 하지만 게임은 사실 실패를 해도, 조금 머뭇거려도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었다. 여섯번의기회라기 보다는 그냥 시간제한이 60분일 뿐이라고나 할까. 이 시간 제한 안에 수행해야 하는 미션이 6개일 뿐인거지.

그래서인지 긴장감이 좀 떨어졌다. 60분이라는 시간이 주는 압박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그냥 넘어가면 되는 것이니까.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묻지 않는다. 그냥 선택을 내렸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냥 넘어간다. 직쏘에게는 그가 옳은 선택을 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앞에 두고 선택을 하는 잔인한 경험을 시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번 영화의 키워드는 복수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똑같이 당해 보아라. 사실 쏘우는 삶에 대한, 삶의 의지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에서 시작됐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 규칙을 지켜라!로 변질되더니 이제는 그냥 복수극이 되어버렸다. 게임 참가자들의 죄목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복수는 복수일 뿐. 왜냐면 처음에 직쏘의 게임에 잡혀 온 사람들은 그 사람들 각각의 문제였을 뿐, 게임을 주관하는 사람과 어떠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게임에 잡혀 온 사람이 바로 게임 주관자와 어떠한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복수를 그럴듯하게 삶에 대한 의지 테스트랍시고 행하고 있는 거지.

여기서 난 이제 쏘우는 그만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에 대해 묻기 위해 도입된 규칙들이 어느새 주인 노릇을 할 때는 그런 과정도 나름대로 흥미롭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복수로 변질된 지금, 더이상 쏘우를 봐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7편이 나오겠지만 굳이 내가 찾아 보진 않겠지?

앞으로 시리즈물을 만드는 감독들은 참고해 주었으면 좋겠다. 닫힌 구조는 안 된다. 열린 구조로 가라.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서 시작된 영화가 복수로 진행되는 것. 이건 닫힌 구조다. 차라리 단순한 복수극에서 시작한 이 게임이 점점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진행되었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 찬밥 대우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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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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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를 봤다. 기대감이라기보단 조금의 궁금증이 있었다. 스토리보다는 그 영상에 대한 궁금증. 영상은 상당히 볼 만 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나도 저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아름다운 것을 볼 때의 감정이었다. 무언가 새롭고 획기적인 것을 볼 때의 경이로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리니지2, 워3 같은 게임을 안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화면들이 새로울지도 모르겠지만 리니지2를 해 본 나로서는...음...저거 페어리 계곡 같이 생겼네...저 동물들은 **같이 생겼네..하는 생각들이 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상들이 유효했던 것은 스피드, 역동성이지 않을까.

영상 못지않게 이야기의 흐름도 빨랐다. 사실 이 점이 난 마음에 들었다. 대개 이런 이야기들은 영화 시작할 때 장황하게 썰을 풀기 마련이다. 과거 어떤 시점에 어떤 일이 있어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뭔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들려는 작업. 그런 작업이 생략된 채 영화는 바로 나비들의 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려한 영상들. 초반에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호흡 그대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 때문에 3시간이 지루하지 않다라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고.

영화를 보면서 화려한 영상에 빼앗겼던 내 혼이 잠깐 돌아오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이크가 네이티리에게 나비에 대한 교육을 받을 때였다. 그 때 그녀가 그에게 이해시키려고 했던 자연을 느끼는 법, 교감하는 법 등을 보면서 잠깐 내 혼이 돌아왔었고, 그녀가 아이와를 두고서 아이와는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균형을 맞출 뿐이라는 말을 했을 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사실 이 영화 속에서는 당연히 거론해야 하는 이야기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식상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난 그런 걸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소수라는 점에서 식상해도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 이 영화가 좋았다.

식상함에 대해 한마디 더 하자면 인간에 대한 설정도 식상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설정이 또 좋더라. 아, 인간이란 어쩜, 이런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은 바로 제이크가 인간인 자기 윗 사람을 배신하고 나비들의 편을 들었을 때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타문명을 침략하는 것이 대부분 인간들의 습성이지만 이런 경우 반드시 그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인간이 극소수라도 있다는 것-이것은 거의 모든 예술작품의 설정임-이 지극히 식상한 설정임에도 감동스럽단 말이지.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런 극소수의 사람들 덕분이라는 생각도 해 보면서.

마지막으로, 인간의 문명이 고도화되면 인간 또한 다시 원시시대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인간들의 미래사회를 그려볼 때, 고도화된 기계 문명을 그려보기 마련인데 나비들의 문명은 그 모습은 원초적이면서도 그들의 데이터처리 방식 등은 그 어떤 문명 보다도 고도화되어 있었다. 인간들은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매개, 절차들이 너무나 많지만 나비들은 그저 한번의 교감으로 모든 게 끝난다. 그리고 자연을 믿고 신뢰하고. 이것은 원시시대의 샤머니즘처럼 보이기도 하고. 인간들의 문명도 고도화되면 눈에 보이는 각종 장비들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교감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까? 현재 인간들의 첨단기술은 따지고 보면 모두 자연법칙, 현상에서 따 온 것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도구의 발견이 인간의 진화가 아니라 퇴화의 시작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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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블리 본즈 - The Lovely B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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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뭔가 마음에 걸리고 마음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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