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소 지향의 일본인
이어령 지음 / 문학사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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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역시 고등학생 때 '국화와칼'과 함께 읽었던 책으로 국화와칼은 읽었다는 기억만 있는 반면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쥘부채'라는 키워드와 함께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일본인의 축소지향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쥘부채는 역시나 다른 문물과 마찬가지로 중국, 한국에서 전해졌으나 이 부채를 한 손에 쏙 들어오도록 축소시킨 건 일본인이었다. 이 책을 이제와 다시 읽으니 그동안 책이 개정된건지 아니면 정말 이런 내용과 이런 구성이었는데 또 나의 두뇌가 나를 배신한 건지, 아마도 나의 두뇌가 나를 배신한 것일 게다. 쥘부채라던가 트랜지스터라던가 구체적인 물건이 제시된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는데 일본의 정신적, 행동적 측면에 대한 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냥, 이 책보다 일본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책을 나는 아직까진 본 적이 없다.

'국화와칼'은 고전이다. 그야말로 고전이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에 와서까지 실용성이 있다. 지금에 와서도 일본인의 성향에 대해서 이해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지금 당장 내가 일본에 가서 어떠한 문제에 직면한다면 나는 이 책의 내용을 한번 떠올려

볼 것 같다. 그리고 일본인의 정서에 맞게 행동하는 게 어떤건지 생각해 볼 것이고. 시대가 변하고 있고 일본인들도 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만 생각하느냐고? 우리나라도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다. 그래서 요즘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기도 하고 그런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는 노인공경, 연장자 우대가 남아 있다. 설사,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노인 공경, 연장자 우대 했다고 욕 먹을 일은 없다. 그냥 이런식의 해결책이라는거지. 그리고 또 하나. 역시나 뭐든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받아들인다. 지난 학기에 '일본문화의 이해'라는 강의 들으면서 탐탁지 않아 했는데 그래도 한학기 동안 강의 들은 게 도움은 된 것 같다. 와비니, 리큐니 하는 것들, 아예 뭔지도 모르고 책을 봤다면 또 기억 못하고 넘겼을 법 한데 대충이라도 뭔지 알고는 있으니 그것들을 예로 들면서 일본인의 축소지향적 측면에 대해 설명을 하니 무슨말 하는지는 알겠다는 거지. 이 책은 출판할 때 일본에서 일본어판으로 출간한 책이라 나중에 한국어 번역 요청이 들어왔을 때, 일본 문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한국인들이 보면 잘 이해도 안 되고 번역하려 해도 마땅히 번역이 안 될 것 같다며 차일피일 미루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맞는 말이다. 일본 문화에 대해 알고 싶고 더 깊이있게 이해하고 싶은 독자라면 일본 문화에는 뭐가 있는지를 다룬 책부터 먼저 읽어보고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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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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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스미스 구하기라는 제목에서 이 책은 애덤스미스에 관한 책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구하기'라는 말에 있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책의 시작은 해럴드라는 한 남자가 경제학자인 리치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된다. 이 해럴드라는 남자에게는 자칭 애덤스미스라고 하는 영혼이 빙의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둘을 이어주는 매개자 역할로 줄리아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자칭 애덤스미스라는 영혼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해서 지극히 현실적이며 이성적인 리치가 곧이 곧대로 믿어줄 리 없다. 그는 애덤스미스를 시험하게 되고 그러면서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면서 그가 애덤스미스임을 인정하게 되고 그리고 그의 뛰어난 지성에 감복하게 되고 후에 그가 떠났음을 알았을 때는 시련이라도 당한 듯이 허전해하게 된다.

 

 여기서 애덤스미스는 현 시대의 인물 속에 자신의 영혼이 들어가면서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하며 자기 스스로를 구해내기로 한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선택된 리치는 이 시대 어느 경제학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리치가 대변하는 이 시대 상황이란 무엇인가. 바로 시장원리의 기본이 무너진 시대 속에서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애덤스미스는 그 무너진 기본, 시장원리를 떠받치고 있는 도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적절한 예를 들어놨는데 잠시 살펴보자.

 

 해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해달은 지난 2세기 동안 수렵의 대상으로 거의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가죽에 대한 높은 수요 때문이었다. 해달의 운명은 그 유명한 '공공 목장의 비극'을 따르고 있다. 해달은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공공의 자산이었다. 따라서 해달은 보호하는 특정 개인이 금전적 이익을 거둘 수는 없었다. 대신 해달을 수렵하여 상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늘어났다. 해달의 수가 적어질수록 뜻하지 않았던 결과가 생겨났다. 해달은 성게를 잡아억기 때문이다. 천적이 없어지니 성게는 배로 증가하여 수중 식물들을 먹어 치웠다. 바닷속 해조류 숲이 사라지게 되자 그곳에 살던 어족들도 무더기로 사라졌다. 이번에는 그 물고기를 먹던 새들도 모습을 감추었다. 단기적으로 보면 수렵꾼들은 이득을 얻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훨씬 큰 정도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 생태계 재앙은 1911년 해달의 수렵을 금하는 국제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 지어졌고 해달의 수는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었다.'

 

 이 이야기는 해달을 그것이 속해 있는 환경과 따로 떼어 이윤을 내기 위한 단순한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시장과 제도적 조직, 사회적 가치가 모두 얽혀 있는 통합 체제다. 비인격적인 시장을 다루는 수학적인 모델을 가지고는 그 복합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애덤스미스는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을, 그들의 이기심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또한 애덤스미스는 독점과 노동력 착취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그리던 시장은 제도적 조직, 사회적 가치가 모두 얽혀 있는 통합체로서의 시장과 그 속의 사람들은 각자의 본능과 이성이 적절히 결합된 이기심과 덕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즉,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애덤스미스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경제학자와 그 속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기계처럼 애덤스미스 하면 보이지 않는 손 하면서 여기까지만 생각할 뿐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기 이전에 썼던 도덕감정론은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이다. 애덤스미스가 말했던 자유시장만을 쫓을 뿐, 그 자유시장의 전제조건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이 책에서 다시 불려 나온 애덤스미스는 자유시장은 여전히 지지하면서 자신이 일찍이 말했던 인간의 덕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 속에 좋은 구절들이 많은데 잠깐 소개를 하자면 '모든 경제적 활동은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한다.(윌리엄 레트윈)',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 이기심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 자신의 행동의 타당성에 진심으로 신중을 하가는 것이...덕의 진정한 정수이다.(애덤스미스)'. 이 외에 내가 진정으로 감동을 받고 개인적을 반성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내가 정리를 좀 해서 말을 하자면 이런 것이다.

 

 애덤스미스는 양심은 본능과 이성 두가지를 모두 사용하여 형성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자기보존이나 자기애의 본능은 한계를 넘지만 않으면 고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인정받고자 하는 본능 또한 있는데 이것은 타인, 자신 모두에게 해당한다.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하기 전에 그 행동을 할지 하지 않을지에 대해서 내면에서는 대화를 벌인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고 해도 자신이 상상하는 관중,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관중의 인정을 토대로 결정을 내린다. 즉, 자기자신과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애덤스미스는 이러한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양심을 계발할 수 있다고 한다.

타인과의 동감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타인과의 동감이란 내 느낌이 적절하다고 타인이 인정해 주는 것인데 이러한 타인과의 동감은 상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상상은 진정한 인간이 되라고 조물주가 내려 준 선물과도 같다. 일단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게 되면 나는 행동과 감정을 의식하게 된다. 감정이나 행동이 실제로 적절한지 보기 위해 그것을 주시하게 된다. 그리고 타인이 나를 보는 것처럼 내 자신을 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이 연극에서 배우일 뿐 아니라 '공정한 관객' 이 되는 것이다.

공정한 관객은 양심을 창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건, 우리는 타인이 던지는 외부적인 찬사를 얻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오는 내부적인 존경과 찬사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찬사에 부응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칭찬받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확실히 양심이 인간의 나약함에 패배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적절한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심에 물어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자신과의 대화라는 키워드로 집중된다. 자신과의 대화.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 가치관을 세우고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어떠한 일에 앞서 그 일이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인지를 점검해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을 할 때에만 우리의 양심은 평온할 수 있다. 이 자신과의 대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이는 즉, 가치판단의 결여가 될 것이고 이렇게 가치판단이 결여된 상태에서 행해진 행동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내가 자신과의 대화를 재개할 때 어떤 형식으로든 내 양심에 상처를 주게 된다.

 이 책은 주로 경제학을 다루고 있지만 그 경제학 속엔 인간도 포함되어 있고 그 인간이란 도덕이 살아있는 인간을 말하고 있기에 나에게 이런 반성을 하게 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자신과의 대화를 게을리 했는지 그래서 간혹 내 가치관에 반하는 일을 저질러 놓고 그 후에 얼마나 아파했는지 등을 떠올려 볼 때, 자신의 가치관, 양심을 위해서 자신과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시장 또한 이러한 자신과의 대화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지금의 모순들이 발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 시장의 처음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위한 시장이었는지 그러한 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기본 전제들이 무엇이었는지 즉, 시장의 가치관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게 되고 이야기 하지 않게 되면서 시장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까? 애덤스미스가 원죄인 양 애덤스미스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고 애덤스미스의 본질을 알지도 못한 채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여하튼, 이 책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아, 애덤스미스가 이런 말도 했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나이를 조금 더 먹고 공부를 조금 더 하고 내가 조금 더 변함으로써 다시 한번 이 책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참, 너무 애덤스미스에 대한 이야기만 했는데 그야말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자면 책은 소설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일단 시작하기는 쉽다. 친구에게 이 책을 빌려 줬더니 처음 몇장만 읽고는 재밌다고, 재밌을 것 같다고 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읽다 보면, 즉 애덤스미스와 경제학자 리치가 영적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시장이 어떻고 도덕이 어떻고 하면서 조금 심각한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부분을 재밌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테고 그냥 가볍게 소설처럼만 보고 싶었다면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중간 적절한 예로써 활용 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나오고 있으니 소설로만 보려 했던 사람들도 이 책을 읽는 데에는 크게 어렵지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던 점은 포커를 치는 장면에서 여러 철학자들이 스미스의 친구로 나오는데 그 이야기가 좀 더 길게 그리고  여러 사상들을 적절히 엮어 내어 재밌게 구성 되어더라면 하는 점이었다. 뭐, 이야기의 중심이 애덤 스미스이니 굳이 다른 철학자들 이야기까지 깊이 다루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잘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냥 조금 아쉬웠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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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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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자들은 신기할 정도의 영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수명이 아주 긴 원자들은 정말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 당신의 몸 속에 있는 원자들은 모두 몸 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몇 개이 별을 거쳐서 왔을 것이고, 수백만년에 이르는 생물들의 일부였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우리는 정말로 엄천난 수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고 나면 그 원소들은 모두 재활용 된다. 그래서 우리 몸 속에 있는 원자들 중 상당수는 한 때 셰익스피어의 몸 속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은 우리는 모두 윤회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 몸 속에 있던 원자들은 모두 흩어져서 다른 곳에서 새로운 목적으로 사용된다. 나뭇잎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몸이 될 수도 있으며, 이슬방울이 될 수도 있다. " -p148

"결국 우리는 나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도 없고, 거리를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별들에 둘러싸여서, 우리가 확인도 할 수 없는 물질로 가득 채워진 채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물리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 있다는 셈이다." -p188

"생명이라는 것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생명은 그저 존재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물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주 흥미롭다." -p353

"지구라는 별은 너무나도 대단하고 신비롭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진리이고, 그렇다는 사실이 앞으로 증명될 것이라고 믿는다." -p436

"또다른 친구였던 알렉산데르 폰 훔볼트는 그런 아가시를 보면서 과학적 발견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을 하고, 그 후에는 그 중요성을 부정하며, 마지막으로는 엉뚱한 사람에게 그 업적을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p441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었던 구절들.

 

이 책은 자연과학사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지구가 어떻게 탄생했는가, 이 우주를, 지구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구에 생명체는 어떻게 탄생했으며, 그것들은 어떻게 멸종되어 갔고, 또 일부는 어떻게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는가, 우리 인간의 조상은 누구이며, 우리는 어떻게 지금 이 곳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런 이야기들. 그리고 어떠한 이론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라던지, 그걸 먼저 발견했으나 본인이 그 중요성을 미처 인식하지 못해 자신보다 더 늦게 발견한 사람에게 그 공이 돌아간 이야기라던지, 정말 사소한 우연에 의해 어떠한 이론이 발견된 배경이라던지, 자연과학사가 마냥 어렵고 딱딱하기만 할 것 같지만 이 책은 마냥 어려운 이야기를 그나마 재미있게는 읽을 수는 있게 되어 있다. 절대,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이 어렵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여러 용어들은 생전 처음들어 보는 것들이고 이런저런 이론에 대한 설명은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가지 다행인 것은 그런 것들은 그냥 지나쳐도 이 책을 읽는 데 큰 문제가 없다는 것. 외워서 시험칠 것들도 아니니 우린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좀 머리 아프다 싶으면 그냥 눈으로 활자를 읽고만 넘어가시라, 그러다 보면 자신이 흥미로워 할 만한 내용들이 이어져 나오기 나오고 우린 그 부분에 대해 재밌어 하면서 이 책을 읽어 주면 된다. 게다가 일부는 정말이지 공감까지 하게 된다는 것. 생명이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 이기에 그리고 그 생명은 어찌보면 모두 하나이기에 더더욱 와 닿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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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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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2권 겉표지에 보면 '이것은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들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다.'라고 적혀있다. 1권 700페이지나 되는 분량을 읽어 놓고도 이 구절에 동감하지 못했다. 2권을 다 읽은 후 책을 덮으니 이 구절이 내 눈 앞에 어때? 그렇지? 라고 하는 듯 보여졌다. 그래, 그랬다. 2권을 다 읽은 후 이 구절을 보면서 나는 맞는 말이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으리라.

이 책은 딱히 누가 주인공이다, 라고 할 수가 없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서 자신의 눈에 비친 타인에 대한 이야기와 이야기 도중 자신이 그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세세한 감정까지 1인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에 따라서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경우, 지나치리만큼 세세한 감정까지 잡아낸다. 상대방과 예술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도 상대방은 내 의도를 이렇게 받아들였군,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 할까 하다가 아니, 그냥 상대방이 받아들인대로 적당히 맞장구나 쳐 주자, 이런 생각에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까지 모조리 다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들라크루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그가 어떤 심경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히라노 게이치로가 받아들인 클라크루아의 모습과 그 사람의 고뇌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들라크루아의 예술론과 그의 고독에 깊히 동화 되었기에 이런 장대한 책을 낼 수 있었겠지.

나는 끝내는 이 책의 주인공이 들라크루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쇼팽은, 만인에게 사랑받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재능과 생활을 유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소설 속에서는 마치 쇼팽이 주인공인 것 같다. 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 쇼팽의 지인들, 이 모든 사람들이 쇼팽 주위를 감싸고 있고 이들을 위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들라크루아 쪽으로 시선이 넘어오면 그의 연인과 몇 장면, 사용인인 제니와 몇 장면, 가까운 친구들과 몇 장면, 하지만 이는 대부분 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
이야기의 흐름은 쇼팽을 따라가지만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들라크루아가 쥐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쇼팽의 죽음 부분에선 두 천재의 대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쇼팽의 죽음을 앞에 두고 들라크루아가 보여 준 행동을 통해 이 책의 주인공은 들라크루아라는 나의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쇼팽은 만인에게 사랑 받고 그 만인에 의해 재능을 인정 받고 그 인정으로 그의 예술가적 지위와 생활, 그리고 죽을 때 까지의 안식처, 등을 제공받았으며 모든 이가 그의 천재를 위해 그를 아끼고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들라크루아는 애초에 화단의 이단자로 분류되어 있어 그의 성장과 지위에는 불안요소가 존재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그때마다 적절한 처세로 자신의 창작 활동 앞에 나타난 난관들을 헤쳐나간다. 그리고 화가로서 자신의 작품이 오래도록 안전하게 보관 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짜 내며 자신의 화가로서의 생명력을 자기 스스로가 키워 나갔다. 이는 나에게 냉혹한 천재의 모습으로 비쳤다.

들라크루아의 천재는 들라크루아로 하여금 자신의 가족의 죽음, 가까운 지인의 죽음, 심지어는 쇼팽의 죽음마저 외면하게 만들었다. 쇼팽이 위독한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이유는? 언제 죽을 지를 몰라서. 지금 당장 죽을 지 저 상태로 얼마나 있다 죽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한번 그 곁에 있으면 쇼팽의 임종까지 그 옆을 지켜야만 한다. 그 기간동안 자신은 창작활동을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쇼팽의 죽음을 외면하고 그의 창작을 위한 활동을 하게 되고 결국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그의 부음을 받고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와서 조차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파리를 떠난다. 그의 죽음, 그의 부재에 대한 슬픔을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서? 아니, 그 슬픔으로 인해 자신이 창작활동을 하지 못할까봐. 죽기 직전의 쇼팽을 외면한 것과 다르지 않은 이유로 쇼팽의 죽음이라는 슬픔까지 외면해 버린 채 파리를 떠나 창작활동에 몰두 하게 된다. 들라크루아는 냉혹한 천재이다.

아니, 그의 천재가 그에게 너무 냉혹했다. 그를 철저히 사용해서 그 천재를 드러낸다. 이 두 천재, 자신의 천재를 자신의 통제아래 두려고 했던 쇼팽과 그 자신의 천재에 휘둘려버린 들라크루아. 쇼팽은 연주에 있어 모든 걸 그의 통제아래 두기를 원했고 자신의 요구사항이 수용되지 않으면 그의 창작활동에 악영향을 끼칠 줄 알면서도 거부했다. 자신의 예술적 재능이 정치를 위해 사용되길 바라지 않았고 정치에 부응한 적도 없다. 그는 그의 천재를 지극히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천재를 끝내 모두다 사용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위해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하고 그 시대의 정권교체에 유연하게 대응해 모든 정권에서 그의 창작활동을 보장받았다. 쇼팽은 모든 이가 그의 재능을 조심스레 다루어 쇼팽이 원하는 상황에 맞춰 주었지만 들라크루아는 본인이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갔다. 쇼팽은 쇼팽 스스로 그의 천재를 사용하고 통제했지만, 들라크루아는 그의 천재가 그를 사용했기에 쇼팽은 끝내 그의 천재를 모두 다 사용하지 못했고 들라크루아는 창작의 고뇌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는 창작을 해 내야만 했다.

아, 말이 무지 길었다. 어쨌든 이건, 냉혹한 천재 들라크루아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은 들라크루아라는 냉혹한 천재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천재로 인해 그의 지인들의 죽음과 죽음 후의 슬픔까지 외면해야만 했던, 그렇게 자신의 천재 앞에 자기 자신을 모조리 바쳐야만 했던 한 천재의 이야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히라노 게이치로는 진정한 천재가 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천재적인 재능만 갖춘 그런 천재 말고, 그 재능을 세련된 기술로 펼쳐내 보일 수 있는 그런 천재 말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성실성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히라노 게이치로. 요, 이쁜 녀석. 일본에 가면 내가 널 가만두지 않을테야! 

 

오타 신고.

2권 p45

고뇌하는 그녀 -> 고뇌하는 그 (문맥상 그녀가 아니라 그,일걸요.)

2권 p300

거슬리는 부분이 겁니다. ->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있는,이 빠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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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자서전
피터 드러커 지음, 이동현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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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피터드러커 자서전이라고 하는 이 책에 정작 피터드러커 자신에 대한 기술은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스스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다른 이들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을 내비치는 방식을 택했다. 자서전에 대한 이러한 방식은 스스로를 관찰자라고 칭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책 속에서 가장 피터드러커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글은 그가 스스로 개정판을 내며 쓴 글이다. 그 글 속에서 그는 크리스마스 일화를 들어 스스로를 관찰자라 칭하는데 이 일화 속에는 관찰자로서의 피터드러커뿐만 아니라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경영학자에 대한 자질까지 엿보인다. 이 일화 하나로 바로 피터드러커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관통해낸다.  

 이 책 속에는 피터드러커가 만난 사람들에 대해 기술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사람은 그의 할머니였다. 아, 나는 이 할머니가 너무 좋다. 그의 할머니는 참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쓸모없게 된 물건들을 은행 계좌에 넣어달라고 했던 할머니는 거절당하자 그 지점의 계좌를 없애 버린다. 그리고서는 같은 은행의 다른 지점에 계좌를 개설한 후 물건들은 집어 넣지 않는다. 왜 굳이 같은 은행을 선택했냐는 질문에 그 은행이 좋은 은행이니까라고 답한다. 그러면 왜 다른 지점에는 물건들을 맡기지 않았냐고 물으니 그 지점에서는 자신에게 빚진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할머니의 생각에는 오래전부터 거래하던 지점은 자신에게 빚진 것이 있었고, 때문에 자신의 물건들을 맡아 줄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일화를 보면서 파울로 코옐료의 호의 은행이 떠올랐다. 이 할머니는 인간관계 속에 서로 주고 받은 호의까지 거래의 대상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마찰을 빚은 치과의사에게 계속해서 치료를 받는데 자신과의 마찰은 마찰이고 그 의사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이 할머니는 이성적으로 문제의 본질을 구별해 내어 그에 맞는 행동을 선택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할머니의 모습에서 피터드러커를 생각했는데, 그의 경영학적인 자질은 어쩌면 할머니로부터의 유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피터드러커가 성장해가며 만났던 인물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자연스레 피터드러커가 살았던 시대의 흐름과 같이한다.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 살아가야했던 걸 생각하면 저 시대가 불행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피터드러커가 부럽기도 했다. 그들의 세대가 부럽기도 했다. 그들의 윗세대가 전쟁으로 인해 많이 죽었고, 때문에 그 빈 자리를 채워야 했기에 이들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도 주요한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좀 더 많은, 그리고 좀 더 파격적인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참 부러웠다.  

 나치 시절로 들어서면 헨슈와 셰퍼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들에 대한 비유도 인상적이었다. 헨슈는 악을 자신의 야망에 이용하겠다고 한 사람으로, 셰퍼는 더 나쁜 것을 막기 위해 악과 손을 잡은 사람으로 나오는데 결론은 둘 다 그 악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나치와 손 잡은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유형 중의 하나이지 않았을까?

 버키 풀러와 마셜 맥루안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는데 버키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 하나 없이 황무지에서 40년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비전에 헌신한 사람이었고, 마셜은 비전을 찾는데 25년을 소비한 끝에 자신의 비전을 붙잡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의 시대가 왔을 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럴 수 있기를 바랬다. 나 또한 25년이 걸리더라도 나의 비전을 붙잡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비전에 헌신할 수 있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시대가 왔을 때 그 시대에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랬다.

 뒷 부분에 가면 GM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많은 기술을 하고 있는데 피터드러커가 만났던 사람들 모두가 그러하듯이 모두 그 나름대로 의미 있고 또 읽는이에게 시사할 만한 점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다. 이 책은 피터드러커 자서전인 동시에 그가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중 인상적이었던 사람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그가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듯이 독자들도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예전에 읽었던 '피터드러커의 마지막 통찰'도 그랬는데,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그 답을 스스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고나 할까. 때문에 이 책은 나에게 있어 읽으면 재밌으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게 만드는 책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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