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범우문고 13
김승옥 지음 / 범우사 / 198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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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을 읽으면서 무진이라는 곳이 아주 한상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는 생각을 했다. 작중의 나가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라고 말한 점을 보아서도 그렇지만 무진이라는 장소의 이름도 안개와 바다와 관계되어 있으니 아마 ‘무진’이라는 장소는 작가가 소설을 쓴 의도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적인 공간이 아닌가 싶다.

작중의 나는 서울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살다가 잠시 몽환적이고 탈속적인 공간인 무진으로 내려온다. 나는 글을 읽으며 무진이라는 공간이 ‘무진의 안개’가 잘 대변해 주듯이 아주 어둡고 습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진의 안개에 대해 묘사한 글 중에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라고 한 부분이나 주인공이 ‘무진의 골방에서 불면의 밤과 수음. 담배 꽁초와 편도선, 6 25 전쟁의 상처, 우편 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 등 어둡던 청년 시절을 다시 떠올리는’ 부분, 하인숙이 서울행을 목표로 무진탈출을 꿈꾸고 있는 점을 보아서도 그렇다.

지금 도시에 살고 있는 나도 가끔은 환상적인 공간으로 도피해서 본연의 나의 모습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난 순수한 ‘나’가 정말 순수한 경험을 해보고픈 환상....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정말 환상일뿐이다. 무진기행에서의 무진도 환상적이긴 하지만 그의 후배인 박을 제외하고는 새롭고 순수한 곳은 아무 것도 없다. 주인공은 무진에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들게 되지만 즉, 무진에서 현실을 도피한 ‘순수’와 만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주인공의 ‘환상’일 뿐이다. 나는 글을 읽으며 참 슬픈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순수한 공간이란 없다는 작가의 비관적인 세계관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가면을 쓴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알고 있지만 가끔은 그런 사실이 무척 견디기 힘든 답답함을 주곤한다. 나역시 별사이의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알고 있지만 가끔은 정말 사람들 사이에 놓여있는 관계의 심연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인간이 본연적으로 외로운 존재라고 하지만.. 나는 가끔 그 외로움이 너무 싫어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행복한 바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무진기행에서 나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하인숙과 사랑을 느끼고 관계를 맺으며 잠시 순수함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내의 전보(다시 ‘나’를 현실적인 존재로 되돌려 놓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를 받고 ‘나’는 하인숙을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혼자 서울로 되돌아간다. 잠시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나의 모습’이었던 하인숙에게 썼던 편지를 찢어버리면서 그는 완전히 일상으로 복귀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만약에 그가 정말 하인숙을 서울로 데려간다거나 그녀와의 사랑을 지속시킨다면 이야기는 현실적인 것에서부터 멀여졌을 것이다.

순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 찾아갔던 곳이 순수하지 못 하다면 심한 배반감을 느낄 것 같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순수하지 못 하다는 것을 생각지 못 하면서 이 세상이, 타인이 순수하지 못 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슬픔과 외로움이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고등학교때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이 ‘무의미한 대화의 나열’을 사용해서 소설의 의도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김승옥의 두 소설이 주는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 가면 속의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순수하지 못 한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게 될 때 그것은 ‘무의미한 대화’가 되지 않을까? 사실 본래 인간의 존재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순수’라는 낱말의 본 뜻을 가진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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