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큐슈에서 버스 납치 사건이 발생한다. 생존자는 단 세명. 운전기사 사와이 마코토(야쿠쇼 코지 분)와 어린 타무라 남매(배우들은 실제로 남매이다)가 그들이다.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세사람의 인생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2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마코토의 반복되는 잠적으로 그의 부인은 지쳐서 떠나버리고, 타무라 남매의 엄마는 다른 남자와 떠나고 얼마 안있어 아버지마저 교통사고로 죽는다. 마코토는 마음을 잡고 살기 위해 형님의 집에 머물면서 모처럼 건설 현장에 취직해서 열심히 일하고, 타무라 남매는 말을 잊은채 사람들과 단절돼어 집에만 머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코토는 살해범으로 의심받아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그를 형과 형수, 조카마저 의심하자 마코토는 남매를 찾아가 함께 살자고 제안하면서 그들의 기이한 동거는 시작되는데...

  데뷔작 "헬프리스"로 영화세계에 발을 들인 감독 아오야마 신지는 이 영화로 2000년 칸느 영화제에서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하면서 새롭게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영화, 그런데 정말 예사롭지 않다. 러닝타임이 3시간 37분이나 되는데도 그의 치밀한 연출과 밀도있는 이야기 구성은 관객을 영화로 끌어들여서 시간마저 잊게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떠나는 발견의 여정을 함께 하게 만든다. 특히 특수한 현상을 거쳐 나온 독특한 색감의 흑백 화면은 영화속의 배경이나 인물이 현실도 꿈도 아닌 그 중간 지점의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무겁다. 비극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평범한 삶, 마을의 연쇄 살인 사건. 이처럼 전혀 일상적이지 않을 것 같은 사건이 어느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점이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끔찍한 사건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강탈당하고 공허하게 떠도는 세명의 주인공들은 치유와 회복을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나오키와 코주에 남매, 그리고 야쿠자로부터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을 지닌 남매의 사촌 아키히코와 함께 버스 여행을 떠난 마코토. 납치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을 출발점으로 하고 떠난 그 여행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유레카...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바깥의 풍경이나 사람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안에 있는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황폐해질 수 있으며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것인지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가는 마을에서도 여성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마코토는 그제서야 나오키가 피폐해진 내면의 상처와 그것이 가져다준 공허로 인해 살인을 저질러 왔음을 알아채고 자수를 권유한다. 마코토는 씻을 수 없는 살인의 죄를 지은 나오키를 깊은 포용력과 사랑으로 감싸며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라고, 자신은 나오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영화는 마코토를 통해 상처입은 자의 생에 대한 희망과 무참하고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놓지 않는 사랑과 포용의 모습 또한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것임을 조용한 목소리로 일러준다.

  나오키를 자수시키고 마코토는 코주에를 데리고 바닷가로 간다. 납치 사건 이후로 말을 잃은채 살아온 코주에는 오빠를 보내는 아픔 속에서도 마침내 자신의 내면의 상처를 응시하고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가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약돌을 아빠와 엄마, 오빠와 아키히코, 납치범과 마코토의 이름으로 차례로 부르며 산 위에서 던지고난 후에 비로소 화면은 컬러로 바뀐다. 되돌릴 수 없는 사건, 기억과 상처, 남아있는 삶. 과연 마코토와 코주에는 행복이라는 이름을 만날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전히 길 위에 서있는 그들이 어디로 떠날지 모르지만 더이상 과거는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삶은 때론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을 응시하고 그 안에 잠겨있는 어두움마저도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에게만 희망의 한자락을 발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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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기다림 - 바깥의 소설 23
샤를르 쥘리에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바깥의 소설이라는 테마로 발간된 샤를르 쥘리에의 소설집에는 가을 기다림, 마리아, 소용돌이 이 세편의 글들이 실려있다. 작가가 오늘날의 프랑스 문단의 지배적인 경향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추구해왔기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게된 것인지는 모르나, 어떤이에게는 그가 바깥에서 쓰는 글들이 반갑고 그리웠을 것이다. 그의 글은 카레르나 노통의 문체처럼 감각적이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읽는 이가 무언가 본질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마음안에서 공명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길을 찾는 과정의 한 방법으로써 글쓰기를 받아들인다는 작가의 태도는 독자에게 즐거움이나 신기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구도자의 수행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년전 화제가 되었던 노희경의 TV드라마 대사를 떠올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러했다.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사고가 젊은이 늙은이,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사랑도 그러하다고...  

  세편의 글에 나온 주인공들은 우연한 계기로 만난 아름답고 분별력 있는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이전까지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인생의 행복에 대한 갈망에 눈뜨기 시작한다. 이러한 설정 자체로만 보자면 통속 소설의 일부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도 들 수 있지만 작가의 역량이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만남 이후에 주인공들의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데에 있다. 인물들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와도 같은 사랑의 만남에 전적으로 환호하고 긍정하는 대신에 떨림과 두려움이 가득한 마음을 안게된다. 그 기나긴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되고 사랑과 행복을 향해 두팔을 벌리게 되는 것이다. 샤를르 쥘리에는 소설이라는 틀을 빌어서 가공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기실 작가의 살아온 이야기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독자로 하여금 품게 만들만큼 글 속에는 진정성이 흐르고 있다.

  최근 국내에 많이 소개되고 있는 대개의 프랑스 작가들의 소설들이 난해하다거나 마음 깊이 와닿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문학의 바깥에는 중심과는 또 다른 글쓰기와 작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고요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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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이 받아지길 기대하며 고백한 후에 되돌아 오는 것이 외면과 거절이라면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까? 같은반의 동급생 요시다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이토는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거기에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이들에게는 게이라고 놀림을 받는데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 아이하라만이 친구가 되어준다. 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하라에게 묘한 호기심과 연민을 느끼게된 요시다는 그것이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향한 이토의 마음은 외면한채 요시다는 방학이 되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아이하라의 고향을 알고 있는 이토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밤바다에서 함께 만난 세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그 자신이 게이이기도 한 감독 하시구치 료스케는 이 영화 "해변의 신밧드"로 세계의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자신의 이름을 단번에 알렸다. 단순한 학원 드라마라고 하기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과 감정의 표현들은 너무나도 빼어나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퀴어 영화로 분류하기도 쉽지 않다. 감독은 십대의 혼란스러운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관계의 근원까지 탐구해나가는 저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 내가 사랑하는 그대는 나의 얼굴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대는 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에 매혹되는가? "해변의 신밧드"에 나오는 이토, 요시다, 아이하라가 꿈꾸는 사랑은 서로 만날 수 없는 곳을 향하고 있다. 과연 이 세상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랑을 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세상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사랑 보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이의 시선이 이미 다른 곳을 향해있는 어긋난 사랑이 더 많은데도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대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라. 그는 그대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 그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시선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또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대를 향한 누군가의 또 다른 시선이 있는지 둘러보라. 이 세상에는 단지 마음만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가슴아프고 슬픈 일인지에 대해서도...

  이 영화의 제목이 왜 "해변의 신밧드"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감독은 왜 그런 제목을 붙였을까? 세명의 주인공들은 밤의 바닷가에서 서로의 진심을 알게되고 비로소 사랑하는 이의 얼굴 뿐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이의 얼굴도 마주하게 된다.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서 모험을 떠나는 신밧드처럼 준비가 되어있다면, 우리는 삶이 보여주는 진실의 얼굴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시구치 료스케는 이 영화를 보는 이에게 함께 그 해변가에 서보지 않겠느냐고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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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포로수용소. 이곳에는 합리적인 사고와 지도력을 지닌 소장 요노이 대위(사카모토 류이치 분), 잔혹하고 무지막지한 하라 상사(기타노 다케시 분), 포로들과 일본군 사이의 소통을 중재하는 통역관 로렌스(톰 콘티 분)가 수용소 안의 크고 작은 사건 속에서 지내고 있다. 어느날 요노이 대위는 군사재판에서 영국군 포로 잭 셀리어스(데이빗 보위 분)를 보고 첫눈에 매혹당한다. 사형의 위기에서 잭을 구해 수용소로 데려온 그는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폭압적으로 변해가고 수용소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간다. 그러던 중 포로들이 반입한 라디오가 발견되는 사건이 터지고 잭과 로렌스는 배후로 지목받아 감옥에 갇히는데...

  일본의 영화사에 있어서 오시마 나기사가 일으킨 파란과 반향은 그 무엇으로도 측정하기 힘들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의 면면에는 억압하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부인하고 저항하는 도발성이 드러난다.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에도 오시마의 그러한 정치적인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 이 영화는 동성애가 주가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이 영화를 싸고 있는 수많은 포장 가운데 가장 눈에 띠는 것일 뿐이다. 동성애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서구에 대한 동양인의 애증, 지배와 피지배, 학대와 피학대, 집단과 개인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겹겹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요노이 대위가 잭에게 느끼는 감정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인가? 아니면 자신이 동경하는 서구에 대한 동경과 흠모인가? 사실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요노이 대위는 잭을 본 이후로 자신이 이전과는 달리 매우 흔들리고 있으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조차도 그의 흔들림을 막을 수가 없다. 살육과 공포가 극대화된 전쟁이라고 해도 사람의 뼛속 깊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부하와 포로들에게 잔인한 행위를 일삼는 하라 상사조차도 통역관인 로렌스에게 일종의 유대감과 연민을 갖고 있다. 성탄절에 자신의 명령으로 잭과 로렌스를 풀어주며 즐거워하는 하라의 얼굴은 분명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요노이 대위에게 한 단한번의 키스와 포옹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잭의 마음 속에는, 일본군에게 비굴한 것처럼 보여서 동료들로부터 차라리 자결하라는 빈정거림을 듣는 로렌스의 마음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이 영화를 보다보면 인간의 마음 속에는 그 무엇으로도 헤아리기 힘든 물길이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그 심연을 얼핏 들여다보게 만든 것은 오시마 나기사이기 때문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제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사카모토 류이치의 배우로서의 삼십대의 모습과 그의 영화음악, 데이빗 보위가 보여주는 죽음이 드리워진 매혹, 기타노 다케시의 티 하나 없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영화가 주는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오시마의 전작들에 비하면 파괴적이고 도발적인 감성은 다소 무디게 느껴질지 몰라도 이 영화는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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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4:27   좋아요 0 | URL
이 영화는 영국인이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 영화를 어느 날 우연히 케이블에서 보고 난 후에 인터넷에서 영화에 관련된 정보들을 찾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영화에 대해 제가 가졌던 의문의 원인을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으론 이 영화는 서구인이 동양(정확히는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은 잘 드러나지만 일본이 그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은 잘 드러나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실수는 서양이 일본을 바라보는 방식을 아무런 비판이나 수정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만약 이런 종류의 영화가 서양의 자본을 가지고 백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이나 성찰 없이 서양적인 시각을 그대로 차용하여 만든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습니다. 오시마 감독은 이 영화를 어떤 명백한 '목적의식' 하에 만들었습니다. 바로 칸느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이 그 목표였죠. 그러기 위해선 코스모폴리탄적인 의식이 잘 드러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겠죠. 그래서 영국의 자본을 투자받았고 데이빗 보위같은 백인배우를 기용한 겁니다. 하지만 그 해(83년) 칸느 그랑프리는 같은 일본인 감독인 이마무라 쇼헤이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는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일본적인 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죠. 오시마 감독의 얄팍한 계산과 매우 비교되는 영화사의 한 사건이라 할만하죠. 적어도 제 생각으로는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삶은 쉽게 내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누추함과 외로움, 슬픔이 무척 큰 때에도 더 꼭꼭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햇빛 찬란한 월요일"에 나오는 다섯명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꼭꼭 끌어안고 사는 것에 지치고 이력이 난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일하던 항구의 조선소가 문을 닫자 실직자가 된 이들은 2년이 지난 후에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동네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며 시간을 죽이는 신세가 되었다.

  다혈질이면서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산타, 고된 노동을 하는 아내에 대한 자책과 자괴감에 시달리는 호세, 아내가 집 나간 것을 친구들에게도 숨기고 사는 아마도르, 과거의 추억 속에 사는 러시아 이민 노동자 세르게이,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취업을 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지만 늘 좌절하고 마는 리노. 카메라는 이들의 무미건조한 일상을 따라다니며 담아낸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탄탄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띤다. 조선소의 폐쇄와 관련된 상황이나, 각각의 인물들이 갖고 있는 갈등과 고민을 매우 차분하고 설득력있게 풀어낸다. 감독은 이윤과 효율만을 강조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드리우는 어두운 그늘을 비판하면서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다만 조선사업과 관련해 주인공이 한국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부분은 우리나라 관객에게는 심정적으로 거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이 어디를 가야 일자리를 찾고, 인간적인 삶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산타는 자신의 나라와 대척점에 있는 광활한 호주 대륙에 가서 멋지게 사는 것을 꿈꾸지만 그것은 실현될 수 있을까?  삶의 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택한 아마도르, 그리고 여전히 햇빛 찬란한 월요일의 출근을 꿈꾸며 쉽지 않는 삶을 살아내야하는 친구들. 이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영화는 분명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대신에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그 자리, 던져버릴 수도 없어서 그저 꼭꼭 껴앉고 있는 삶의 괴로움과 피로함에 대해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삶은 그렇게 구질구질하고 칙칙한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고 삶이 장미빛의 꿈과 희망, 기쁨과 평화로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도 분명 아니다. "열자(列子)"에는 고통받는 날을 빼면 일생은 며칠 밖에 되지 않는다는 귀절이 나온다. 감독은 그 고통받는 날들에 대한 길고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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