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들은 아주 오래전에 보았는데도 영화 속 그 장면들이 결코 잊혀지지 않을 때가 있다. 영화 'Five Easy Pieces'가 내게는 그러하다. 1970년에 밥 라펠슨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우리말 제목으로는 '잃어버린 전주곡'으로 번역되었다. 5개의 작은 소품. 이 제목은 잭 니콜슨이 연기한 주인공 바비 듀피어가 어릴 적에 배운 피아노 소품집의 이름에서 따왔다. 영화의 배경이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시간이라 그런지, 추워지는 때에 더 생각이 나기도 한다.
영화를 본 것은 EBS 세계의 명화 시간. 언제 방영되었나 검색해보니 1999년 9월 17일이다. 본 지 20년도 더 된 영화. 나 혼자만 알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의 보석상자 안에 있는 영화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도 잘 모르겠다. 영화는 주인공 바비 듀피어의 내면을 따라가는 여정이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를 이해했던 것 같다.
석유 시추공으로 거칠고 무절제한 삶을 사는 바비에게 모든 것은 지루하고, 한심하며, 의미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하루하루를 되는대로 살아간다. 어느날 누이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바비의 집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만나달라는 것. 그는 오랫동안 집을 떠나서 살았다. 여자친구인 레이엇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바비는 그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냉소로 일관한다. 그가 집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게된 레이엇은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은 길을 나선다.
그 여정은 중산층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의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던 바비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부, 출근길의 바비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상황을 살피려고 차에서 내려 앞의 트럭에 올라가본다. 트럭에 있는 피아노 뚜껑을 열어 연주하는 곡이 쇼팽의 환상곡 F단조 Op. 49. 그렇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트럭은 옆도로로 빠져나간다. 차에 있던 그의 동료가 바비를 부르지만, 트럭은 이미 다른 길에 접어들었다. 이 장면은 피아니스트에서 막노동꾼으로 삶의 행로를 바꾼 그의 삶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예기치 않은 상황들, 선택들의 연속들인지도 모른다.
바비가 집으로 향하는 여정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해주는 단서를 보여준다.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레즈비언 커플을 태우고 가다 들른 식당에서의 장면.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바비 듀피어라는 사람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싸구려 길가 식당에서 점심 메뉴를 주문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시시콜콜히 말하지만, 종업원은 그런 건 메뉴판에 없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일축한다. 바비는 종업원을 향해 자신의 응축된 분노를 모욕적으로 쏟아낸다. 메뉴판에 적힌 질서정연한 글씨들을 혐오하는 그는 기존의 사회 질서 모두를 배척하고, 그것에 대한 심한 염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집에 도착해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더럽고 무식하게 보이는 시추공과는 전혀 딴판이다. 형의 약혼녀 캐서린이 바비가 피아니스트였다는 것을 알고서 연주를 부탁하자 그가 연주를 시작한다. 쇼팽의 전주곡 Op.28 중 4번은 무척 짧은 곡이지만, 이 연주 장면은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길게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벽에 걸려있는 바비의 어린시절과 가족의 사진을 피아노 선율처럼 천천히 흘러내려 가며 보여준다. 나는 아직까지도 쇼팽의 전주곡 4번을 들을 때마다, 이 장면이 떠오른다. 자신이 원했지만, 결코 살아내지 못한 피아니스트의 꿈과 엉켜버린 인생의 선택들...
"당신은 도무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뭘 원하죠? 자신을 사랑하지도 존중하지도 않고, 가족과 일, 그 어떤 것에도 애정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사랑받길 원하죠?"
바비에게 한순간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캐서린도 결국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어째서 그가 그 안온한 삶을 박차고 자신을 마구잡이의 삶으로 내던졌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가진 재능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가진 자들의 위선에 대한 혐오이든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항이든 바비는 자신을 둘러싼 그 틀에서 살 수 없었다. 아무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바비는 그곳을 떠났고, 그에게는 가족들이 경멸하는 하층민 애인 레이엇이 옆에 있다. 그는 가족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여자를 모텔방에다 두고 오지만, 여자는 바비를 찾아오고 레이엇과 가족들과의 대면은 파열음을 일으킨다.
바비는 다시 떠난다. 레이엇과 함께 다시 떠나오기는 했지만,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레이엇을 버린다. 추운 겨울 날씨에 외투와 지갑마저 다 내버리고 차에서 내린 그는 북쪽으로 간다는 트럭을 얻어타고 떠난다. 그가 집에 오는 길에 만났던 레즈비언 커플들이 간다고 했던 곳은 알래스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쓰레기 같은 사회,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피해서 순수한 장소인 알래스카로 떠난다고 했다. 바비의 목적지가 알래스카인지는 알 수 없다. 바비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Go nohwere. 아무 소용이 없는, 성공하지 못한, 이란 의미의 관용구.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바비의 삶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실패한 낙오자의 삶일 뿐이다.
이 영화의 DVD타이틀의 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He rode the fast lane on the road to nowhere."
목적지가 없는 삶, 또는 목적지에 결국 도달하지 못하는 삶. 그러한 삶은 모두 쓸모없고 무의미한 삶인가? 누군가에게는 바비가 보여주는 일탈과 객기는 어른이 되지 못한, 중2병스러운 방황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이가 다 정해진 삶의 행로를 가는 것도 아니며, 평균적인 삶의 행로가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타인의 삶에 대해 '의미없음'을 정의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물론 바비가 보여주는 기존의 사회, 질서, 가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와 혐오가 타당한 것도 아니며, 바비의 내면도 그가 그렇게 진저리를 내는 중산층의 위선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다. 그는 레이엇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결국엔 버리기 때문이다.
잭 니콜슨은 1969년에 '이지 라이더(Easy Rider)'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하기는 했어도, 그가 본격적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는 바로 'Five Easy Pieces'라고 할 수 있다. 감독 밥 라펠슨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잭 니콜슨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으며, 결국 그의 선택은 옳았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진정한 연기 괴물 잭 니콜슨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과도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고, 그나마 정상적인(?) 모습의 잭 니콜슨을 볼 수 있어서 신기하기도 한 영화다. 바비 듀피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끝없이 부유하는, 그래서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행로를 걸어가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좌절된 꿈의 부서진 조각을 끌어안고 사는 이의 내면을 잭 니콜슨은 충실히, 그리고 가슴 아프게 구현해낸다.
* 이 영화의 제목을 '잃어버린 전주곡'으로 번역한 것은 너무 감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냥 영어 원제목으로 놓아두는 것이 나을 듯하다.
** 영화 속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은 피아니스트는 당연히 따로 있다. 정말로 피아노 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연기도 잭 니콜슨은 잘 해낸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잭 니콜슨이 진짜 연주하는 것이냐고 묻는 이들도 많이 있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