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의실 301호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강의실이었다. 학교에 처음 들어와서 '영화의 이해'강의를 들은 것도 이 강의실이었다. 301호 강의실은 커다란 스크린과 프로젝터, 그리고 영사실까지 갖춘 강의실이었는데, 본관 건물의 협소함 때문에 이 강의실을 쓰려는 여러 학과의 강의들로 늘 북새통이었다. 강의실 의자 가운데 몇개는 늘 고장난 상태였다. 내가 학교를 오랫동안 쉬었다가 복학하고나서 와보니, 그동안 못쓰는 의자가 늘어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강의실이 참 좋았다. 적당한 경사각을 가지고 있었고, 창가에는 햇볕이 잘 들었다. 뭔가 안온한 느낌을 주는 강의실이었다.


  3학년 2학기 때였던 것 같다. 금요일 오후에 서양 미술 비평 강의를 그 강의실에서 들었는데, 그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보고 싶은 DVD를 가지고 와서 혼자 그 강의실에서 영화를 틀어놓고 보았다. 영화관 스크린 보다는 좀 작지만, 그래도 영화관 혼자 전세내고 보는 느낌은 들었다. 정말이지 학교 다니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 츠지모토 노리아키의 다큐 '미나마타(1971)'도 보았다. 자막이 없었지만, 일본 드라마에 미쳐서 살았을 때라 대충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다큐의 끝무렵이었나, 자신들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그 어떤 배상도 거부하는 회사 측 관계자들을 향해 피해자 가족들이 절규하는 장면이 있었다.


  "あなたが にんげんですか!"


  '당신들, 인간 맞아? 인간이 맞냐구!'라고 한 여성이 분노로 외쳤다. 나는 드문드문 알아듣던 일본어를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치 동시통역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한 인간의 진정성과 정의로운 분노, 그 절절함이 가슴을 후벼팠다.


  '지옥의 묵시록(1979)'은 공중파에서 이전에 보았는데, 그래도 큰 화면에서 한번 다시 보고 싶어서 틀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이 흐르는 가운데 미친듯이 쏟아지는 공중 폭격 장면을 보고 나니, 그냥 혼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라 크래커를 하나 뜯었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영화 속의 장면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니, 속이 메슥거렸다.


  영화는 온갖 기행과 광기의 집합체 같았다. 이 영화는 결코 분석 따위가 필요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전편에 걸쳐서 흐르는 그 미쳐버릴 듯한 기운은 보는 사람의 뇌수를 따라 흐르면서 전염되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을 베르너 헤어초크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2)'에서도 받았는데, 나중에 그 영화 자료를 찾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실제 촬영 현장도 거의 혼돈과 파괴, 광기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가장 근원적인 감정에 접근하기에 좋은 도구이기 때문에, 레니 리펜슈탈은 '의지의 승리(1935)'를 만들어 히틀러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르자, 화면 속에서 마틴 신이 맡은 윌러드 대위는 커츠 대령을 찾기 위한 여정을 지루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뭔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마침내 말론 브랜도가 분한 커츠 대령이 나오는 장면에 이르렀다. 말론 브랜도가 보여주는 그 무성의하고 제멋대로인 연기는 대체 뭔가? 도대체 이 영화 어디에서 커츠 대령의 연기가 압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저 작자가 감독 꽤나 힘들게 했겠다 싶은 생각에 이르렀다.


  실제로 말론 브랜도는 대사도 제대로 외우지 않았고, 자신이 생각해낸 대사로 연기하기 일쑤였으니 코폴라는 진찌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커츠 대령의 이미지를 날렵한 인물로 상정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말론 브랜도는 체중 관리를 하지 못해 엄청난 거구로 나왔는데, 그것이야말로 그나마 커츠 대령의 압도감을 드러내는 데에 유일하게 기여했을 뿐이다. 어떤 이는 말론 브랜도의 연기를 보고 나서 '저 사람은 진짜 공포와 두려움이 뭔지도 모르며, 그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예비역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저 사람 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혹평했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말론 브랜도는 정말이지 커츠 대령을 대충, 무성의하게 연기했는데, 그것이 커츠 대령이 가진 본래의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을 역설적으로 더 잘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원작자인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가 만약 이 영화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암흑의 핵심'은 나에게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뭔가 어정쩡한, 말하다가 그만 둔 그런 소설이었다. 작품성으로 치자면, 내게는 콘래드의 다른 소설 '청춘'이나 '로드 짐'이 훨씬 더 인상적이고 좋았다. 불우한 집안 환경 때문에 십대 소년 시절부터 선원으로 바다를 떠돌았던 콘래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다가 내 인생의 하버드였다."


  그의 그 말대로 선원으로 살았던 그 시간들이 소설이 되었고, 이른바 '해양소설'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창작을 하려면 그렇게 평생을 두고 파먹을 뭔가는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가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콘래드가 이 영화를 봤다면 좋아했을지는 차치하고, 이런 말을 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나의 커츠는 저렇지 않다구!"


  어쨌거나 윌러드는 커츠 대령을 처치하라는 임무를 완수한다. 마틴 신 혼자 다 해먹는 영화. 이 영화에서 가장 열심히,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 미쳐 돌아가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그나마 정신줄 붙잡고 자기 몫을 해내는 이 배우야말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감독인 코폴라는 제작비 구하는 문제로 제작자들과 싸우고 난리치느라 힘들었고, 나머지 배우들과 스텝들도 고립된 촬영 현장에서 거의 아노미 상태였다고 하는 것은 영화를 보면 그냥 알게 되는 명백한 사실이다.


  "어휴, 미친 영화야, 미친 영화. 죄다 미쳤어."


  나는 301호 강의실의 불을 끄고 나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코폴라는 이 영화가 '반전 영화()'가 아니라고 누누히 강조했다. 그렇다. 이 영화는 광기, 그 자체에 대한 영화이며, 광기가 스크린 밖으로 흘러내려서 보는 사람마저 감염시키는 영화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광기의 그 바닥이 어디인가를 보려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 사진 출처: vanityfa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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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영화들은 아주 오래전에 보았는데도 영화 속 그 장면들이 결코 잊혀지지 않을 때가 있다. 영화 'Five Easy Pieces'가 내게는 그러하다. 1970년에 밥 라펠슨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우리말 제목으로는 '잃어버린 전주곡'으로 번역되었다. 5개의 작은 소품. 이 제목은 잭 니콜슨이 연기한 주인공 바비 듀피어가 어릴 적에 배운 피아노 소품집의 이름에서 따왔다. 영화의 배경이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시간이라 그런지, 추워지는 때에 더 생각이 나기도 한다. 


  영화를 본 것은 EBS 세계의 명화 시간. 언제 방영되었나 검색해보니 1999년 9월 17일이다. 본 지 20년도 더 된 영화. 나 혼자만 알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의 보석상자 안에 있는 영화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도 잘 모르겠다. 영화는 주인공 바비 듀피어의 내면을 따라가는 여정이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를 이해했던 것 같다.


  석유 시추공으로 거칠고 무절제한 삶을 사는 바비에게 모든 것은 지루하고, 한심하며, 의미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하루하루를 되는대로 살아간다. 어느날 누이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바비의 집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만나달라는 것. 그는 오랫동안 집을 떠나서 살았다. 여자친구인 레이엇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바비는 그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냉소로 일관한다. 그가 집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게된 레이엇은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은 길을 나선다. 


  그 여정은 중산층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의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던 바비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부, 출근길의 바비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상황을 살피려고 차에서 내려 앞의 트럭에 올라가본다. 트럭에 있는 피아노 뚜껑을 열어 연주하는 곡이 쇼팽의 환상곡 F단조 Op. 49. 그렇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트럭은 옆도로로 빠져나간다. 차에 있던 그의 동료가 바비를 부르지만, 트럭은 이미 다른 길에 접어들었다. 이 장면은 피아니스트에서 막노동꾼으로 삶의 행로를 바꾼 그의 삶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예기치 않은 상황들, 선택들의 연속들인지도 모른다.


  바비가 집으로 향하는 여정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해주는 단서를 보여준다.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레즈비언 커플을 태우고 가다 들른 식당에서의 장면.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바비 듀피어라는 사람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싸구려 길가 식당에서 점심 메뉴를 주문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시시콜콜히 말하지만, 종업원은 그런 건 메뉴판에 없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일축한다. 바비는 종업원을 향해 자신의 응축된 분노를 모욕적으로 쏟아낸다. 메뉴판에 적힌 질서정연한 글씨들을 혐오하는 그는 기존의 사회 질서 모두를 배척하고, 그것에 대한 심한 염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집에 도착해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더럽고 무식하게 보이는 시추공과는 전혀 딴판이다. 형의 약혼녀 캐서린이 바비가 피아니스트였다는 것을 알고서 연주를 부탁하자 그가 연주를 시작한다. 쇼팽의 전주곡 Op.28 중 4번은 무척 짧은 곡이지만, 이 연주 장면은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길게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벽에 걸려있는 바비의 어린시절과 가족의 사진을 피아노 선율처럼 천천히 흘러내려 가며 보여준다. 나는 아직까지도 쇼팽의 전주곡 4번을 들을 때마다, 이 장면이 떠오른다. 자신이 원했지만, 결코 살아내지 못한 피아니스트의 꿈과 엉켜버린 인생의 선택들...


  "당신은 도무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뭘 원하죠? 자신을 사랑하지도 존중하지도 않고, 가족과 일, 그 어떤 것에도 애정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사랑받길 원하죠?"


  바비에게 한순간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캐서린도 결국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어째서 그가 그 안온한 삶을 박차고 자신을 마구잡이의 삶으로 내던졌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가진 재능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가진 자들의 위선에 대한 혐오이든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항이든 바비는 자신을 둘러싼 그 틀에서 살 수 없었다. 아무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바비는 그곳을 떠났고, 그에게는 가족들이 경멸하는 하층민 애인 레이엇이 옆에 있다. 그는 가족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여자를 모텔방에다 두고 오지만, 여자는 바비를 찾아오고 레이엇과 가족들과의 대면은 파열음을 일으킨다.


  바비는 다시 떠난다. 레이엇과 함께 다시 떠나오기는 했지만,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레이엇을 버린다. 추운 겨울 날씨에 외투와 지갑마저 다 내버리고 차에서 내린 그는 북쪽으로 간다는 트럭을 얻어타고 떠난다. 그가 집에 오는 길에 만났던 레즈비언 커플들이 간다고 했던 곳은 알래스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쓰레기 같은 사회,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피해서 순수한 장소인 알래스카로 떠난다고 했다. 바비의 목적지가 알래스카인지는 알 수 없다. 바비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Go nohwere. 아무 소용이 없는, 성공하지 못한, 이란 의미의 관용구.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바비의 삶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실패한 낙오자의 삶일 뿐이다.


  이 영화의 DVD타이틀의 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He rode the fast lane on the road to nowhere."


  목적지가 없는 삶, 또는 목적지에 결국 도달하지 못하는 삶. 그러한 삶은 모두 쓸모없고 무의미한 삶인가? 누군가에게는 바비가 보여주는 일탈과 객기는 어른이 되지 못한, 중2병스러운 방황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이가 다 정해진 삶의 행로를 가는 것도 아니며, 평균적인 삶의 행로가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타인의 삶에 대해 '의미없음'을 정의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물론 바비가 보여주는 기존의 사회, 질서, 가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와 혐오가 타당한 것도 아니며, 바비의 내면도 그가 그렇게 진저리를 내는 중산층의 위선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다. 그는 레이엇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결국엔 버리기 때문이다.


  잭 니콜슨은 1969년에 '이지 라이더(Easy Rider)'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하기는 했어도, 그가 본격적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는 바로 'Five Easy Pieces'라고 할 수 있다. 감독 밥 라펠슨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잭 니콜슨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으며, 결국 그의 선택은 옳았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진정한 연기 괴물 잭 니콜슨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과도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고, 그나마 정상적인(?) 모습의 잭 니콜슨을 볼 수 있어서 신기하기도 한 영화다. 바비 듀피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끝없이 부유하는, 그래서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행로를 걸어가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좌절된 꿈의 부서진 조각을 끌어안고 사는 이의 내면을 잭 니콜슨은 충실히, 그리고 가슴 아프게 구현해낸다. 



* 이 영화의 제목을 '잃어버린 전주곡'으로 번역한 것은 너무 감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냥 영어 원제목으로 놓아두는 것이 나을 듯하다.

** 영화 속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은 피아니스트는 당연히 따로 있다. 정말로 피아노 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연기도 잭 니콜슨은 잘 해낸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잭 니콜슨이 진짜 연주하는 것이냐고 묻는 이들도 많이 있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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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의 '다큐 잇it'은 우리 일상의 구석구석을 조금은 색다른 시선으로 보는 프로그램이다. 종영된 '다큐 시선'의 뒤를 잇는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최근에 본 흥미있는 회차는 '청약 통장'과 '주식, 아직도 안하세요?'였다. 전자는 자기만의 방을 마련하기 위한 젊은 세대의 치열한 분투를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담아냈고, 후자는 재테크 시대에 주식 열풍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주식을 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내 눈길을 끈 것은 거기에 등장하는 이들의 일상에 등장하는 유튜브 화면이었다.


  '청약 통장'편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다가 독립한 20대 청년이 자신의 원룸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의 책상 모니터 화면에서는 유튜브의 '먹방'이 재생되고 있었다. 청년은 혼자 밥먹을 때는 그 먹방을 틀어놓는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게는 뭔가 신박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아, 요즘 젊은 친구들은 혼자 밥먹을 때는 저렇게 먹방을 틀어놓는구나... 그런가 하면 '주식, 아직도 안하세요?'편에서는 기러기 아빠로 집에서 주식 투자를 하는 이가 나오는데, 그가 점심 먹을 때 모니터 화면에 틀어놓는 유튜브는 명상, 종교 관련 주제의 영상이었다. 목탁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불교경전이 나름 인상적이었다. 그가 그걸 틀어는 이유는 주식 투자로 매순간 긴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라고 했다. 혼자 밥 먹는 이들에게 유튜브는 그렇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다.

   

  동영상 플랫폼이 대세인 시대에 다양한 주제와 소재로 이제는 돈벌이 전장터가 된 유튜브에서 그래도 오랫동안 선전하고 있는 분야가 아마도 '먹방' 같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 게시판에, 뒷광고 논란으로 활동을 중단한 먹방 유튜버가 새로 올린 영상이 올라왔다. 댓글들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그 유튜버에 대한 악플이 하나도 없었고, 다시 활동을 재개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대세였다는 점이다. 대체 이 유튜버는 어떤 차별점이 있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열렬히 활동 재개를 원하는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먹방을 보았는데, 정말 새로운 세계였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아주, 잘, 깨끗하게 먹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불편한 그 과도함(excessivenss)이 지배하는 화면에 대체 무슨 매력이 있는 것일까...


  먹방, 음식만 전문적으로 먹는 것을 보여주는 방송. 아예 이제는 영어로 'Mukbang'이라는 공인된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알고 있는 먹방이라고 해봐야, 이제는 종영된 'VJ 특공대', '6시 내고향' 같은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먹방 영상들은 대개가 맛집, 지역 토속음식들이어서 그걸 본 시청자들은 그곳을 '탐방'을 하기 위한 참고 영상으로 여겼다. 그것 말고도 아주 고전적인 '한국인의 밥상'이 있기는 하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음식을 소재로 한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이 늘어나면서 공중파는 물론이고 케이블 채널까지 화면에는 음식과 먹는 장면이 넘쳐난다. 지금은 트롯 열풍이 방송을 평정해서 트롯 관련 프로그램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음식 관련 프로그램은 인기를 끌고 있다.


  기성 세대에게 기존 TV 프로그램의 먹방은 맛집 탐방으로 이어지는 것에 비해, 젊은 세대에게 유튜브 먹방은 그 자체로 소비되는 일종의 치유 프로그램처럼 보인다. 혼자 밥 먹을 때 외롭지 않을 수 있고, 외모 강박에 시달리느라 살찌는 음식도 맘껏 못먹는데 그걸 대신해주는 먹방 유투버도 있고, 쪼들리는 형편에 사먹기 힘든 비싼 식재료를 맘껏 포식하는 것을 보며 대리 만족도 느끼고, 이런 요인들이 먹방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워낙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어서, 이걸 바라보는 시선들도 다양했다. 심리학에서는 불안장애와 섭식장애 쪽으로 파고 있고, 사회학에서는 1인 가구 증가로 인한 사회 현상으로 보고, 매체와 문화 연구 쪽에서는 먹방 시청자 행동 분석으로 밀고 있다. 먹방 연구는 마치 각종 학문들의 각축장 같다.


  내게는 먹방의 그 과도함이 그것을 보는 이들이 가진 현실적 '고통'과 '외로움'의 크기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보여서 안보는 것을, 어떤 이들은 먹방을 보면서 편안함과 위로를 느낀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건, 먹방의 기저에 흐르는 그 정서의 층위가 단지 '누군가 먹는 것을 즐겁게 본다'에서 괴로운 현실에서 '나를 숨쉴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언가'에까지 닿아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10대에서 먹방과 쿡방의 (月)시청 시간이 평균 12시간, 매일 시청하는 비율도 15%에 달한다는 최근의 연구결과(이화여대 융합보건학과 김혜경 교수팀 연구 참고)는 꽤나 무겁게 다가온다. 대부분 심야시간대에 혼자 먹방을 시청한다는 청소년들에게 먹방은 학업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소비재인 것이다. 계속되는 경기침체 속에서 구직과 진로에 대한 압박감이 심한 젊은 세대에게도 먹방이 먹히는 이유도 그 지점에 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먹방은 어떤 면에서는 음식과 먹는 행위 그 자체에 집착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뒤틀린 폐쇄성을 보여준다는 생각도 든다. 맛집 탐방을 하거나 직접 요리를 해서 누군가와 같이 식사하는 대신에, 방에서 그 모든 것을 대신해주는 먹방을 시청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들이 지닌 고통과 외로움의 총량도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방은 그것이 시작된 한국을 넘어 세계로 국경을 계속 확장해가고 있는데, 이 확장성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의문을 남긴다.


  소통과 온기에 대한 요구. 그것이 범람하는 먹방의 함의일 수도 있다. 누군가와 같이 따뜻한 밥을 먹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누는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저런 삶의 괴로움을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먹방이 띄워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 시대에 인간관계는 더 단절될 수 밖에 없고, 악화되는 각종 경제 지표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힘든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떠났던 먹방 유튜버들은 다시 돌아오고, 새로운 먹방의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도 나타날 것이다. 먹방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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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서부 와카야마 현에 위치한 산단베키(三段壁)는 총길이 2km, 높이 60m에 달하는 주상절리 암벽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이곳은 다른 의미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생을 끝마치려는 이들의 최종 목적지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그 절벽에는 한 대의 전화가 있고, 그 전화를 통해 이생의 마지막 전화가 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목사가 있다. 후지야부 목사는 그렇게 자신과 연결된 이들을 다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오랫동안 해왔고, 그가 구한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900명에 이른다고 한다. EIDF 2019 출품작인 카세자와 아츠시의 '생의 마지막 한걸음(A Step Forward, 2018)'은 후지야부 목사와 그가 운영하는 자활공동체의 사람들을 담은 다큐 영화다.


  감독 카세자와 아츠시에게 이 영화를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그에게 영화를 가르친 스승 사토 마코토(1957-2007) 감독의 죽음 때문이었다. 일본 다큐멘터리의 거장 오가와 신스케의 뒤를 잇는 세대의 감독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던 그의 갑작스런 죽음, 특히 그가 택한 그 죽음의 방식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가족과 함께 택시를 타고 가던 그는 신호대기가 걸린 교차로에서 내려서, 근처 건물에 올라가 투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제자 카세자와 아츠시는 스승의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기자에게 후지야부 목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이 다큐를 만들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한걸음'은 그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한밤중에 산단베키로 급하게 차를 몰고 가는 후지야부 목사는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마지막 전화 통화를 시도한 여성을 태우고 돌아온다. 그는 자살 시도자들의 재활을 돕는 자활 공동체를 운영하는데, 일본에서는 무척 보기 드문 개신교 목사로 그의 이런 활동은 굳건한 종교적 신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목사이지만 전직 배구선수인 그는 대부분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지낸다. 공동체 사람들에게도 무척 격의없이 대할 뿐만 아니라 친구, 동료, 아버지 같은 느낌을 준다.


  그가 운영하는 자활 공동체는 비영리 단체로, 포장 도시락을 배달해서 그 수익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적게는 몇달, 몇년을 머무는 공동체 사람들은 여러가지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대인관계의 어려움부터 돈관리의 문제도 그들을 힘들게 만든다. 이 다큐에서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모리'라는 사람은 전직 요리사인데, 그는 목사에게 식당에서 일할 때의 자기중심적인 자세며, 헤픈 돈 씀씀이에 대해 질책을 듣는다. 후지야부 목사는 그 장면에서 마치 훈육을 하는 사감처럼 보인다.


  목사의 이런 적극적인 개입, 심지어 가족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방식은 보는 이를 약간은 낯설고, 놀랍게 만든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 자살을 시도한 이들로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후지야부 목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감독은 그런 논란과는 별개로, 가족 공동체를 지향하는 목사의 그러한 신념과 열정이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다시 사회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EIDF2019 관객과의 대화현장 인터뷰 참조).


  다큐에서 등장하는 이십대 후반의 전직 요리사 모리는 카메라를 친구처럼 편하게 대했기에 감독이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그의 이야기를 담았다. 모리는 서툰 대인관계의 문제도 있었고, 또 그를 안쓰럽게 여긴 어머니가 보내준 큰 돈을 마구 써버려서 목사에게 한소리를 듣기도 한다. 후지야부 목사는 모리가 사회로 나가서 다시 자립하려면 그런 일상의 생활방식에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나름의 엄격함을 가지고 대한다. 모리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리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서 요리사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후지야부 목사의 지치지 않는 열정, 그 노력은 그를 도와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여러 조력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어떻게든 한 생명이라도 구하려고 애를 쓴다. 다큐 초반부에 목사가 차에 태워서 돌아온 여성은 바로 그 다음날 떠나버린다. 자살을 시도한 이들이 저렇게 바로 가버리면 다시 시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음을 돌려서 며칠 더 머물게 하려고 하지만 여자는 떠난다. 여자가 택하게 될 그 '끝'이 보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더 무겁다.


  감독은 자살을 시도하는 이들이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는 하나,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단절된 인간 관계, 삶에서의 여러 좌절의 경험과도 같은 복합적인 요인이 있고, 그런 면에서 후지야부 목사가 공동체를 가족의 형태로 이끌어 가는 것은 치유를 위한 대안적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사가 그들을 '아픈 사람들'이 아닌, 사회로 내보내기 위한 훈련생으로 생각하는 그 시각은 때론 불편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다큐는 후지야부 목사가 자신이 공동체 구성원과 소통하는 방식, 즉 지시적인 말투라던가 질책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 다큐는 끝부분에서 관객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는 소식을 들려준다. 목사는 모리의 어머니에게 온 전화에 대해 말한다. 모리의 죽음을 알려주는 목사의 목소리는 마치 고통으로 떨리는 것처럼 보인다. 모리가 공동체를 떠난 지 3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결국 그는 자신이 막아낼 수 없었던 그 죽음에 대해서 괴로워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일을 그만 둘 수 없다고 말하며 살아있는 동안 해야할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생의 마지막 한걸음'은 우리가 잘 모르는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벼랑 끝에서 한걸음을 더 걸어가면 그들의 삶은 끝나고, 거기에서 발을 돌려 이생으로 향하는 그 한걸음을 걸으면 다시 살아갈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발을 돌이킨 이들에게 손을 잡아주는 것, 그것은 사명감을 가진 목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손을 잡아달라고 말하는 모두를 도울 수는 없겠지만, 도와주겠다는 마음가짐은 늘 가져달라는 것이 이 다큐를 만든 감독의 부탁이었다.


  어제, 스폰지밥 만화와 H.O.T.를 무척 좋아하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무겁고 칙칙한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주고 싶어서 코미디언이 되었다던 그가 떠나간 그곳에서 편히 쉬길 바란다. 박지선 씨의 명복을 빌며 이 글을 쓴다.



*'생의 마지막 한걸음' 스틸 컷: 사진 출처 EIDF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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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K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허허실실 웃으면서 속없는 사람처럼 굴었지만, 나중에 알게 된 그는 굉장히 치밀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K를 떠올려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래전, 다니던 학교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은 변변한 휴게 공간이 없어서, 화장실 한 칸을 자신들의 휴식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K에게 그런 내 생각을 말했더니 K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 사람들이 불쌍하고 안돼 보이겠지. 하지만 말야, 그 사람들은 그렇게 일하고 지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 화장실에서 짬짬이 쉬는 것도 즐겁고 괜찮게 여길 걸.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 사람들이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라구. 내가 일하면서 본 많은 인부들이 그랬어."


  내 온정주의적 시선에 찬물을 끼얹던 K의 건조한 말투가 생각난다. K는 확실히 나보다 세상과 낮은 곳에서 사는, 잘 보이지 않는 계층의 사람들을 잘 알았다. 영화 '기생충(2019)'을 보면서 나는 문득 K의 말이 떠올랐다.


  송강호가 분한 기택네 가족은 전형적인 하층민의 삶을 살고 있다. 반지하 방에 거주하는 그들은 집안에 출몰하는 곱등이를 없앤다고 거리의 소독차 연기를 그대로 들이마시며,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시시때때로 노상방뇨하는 남자를 어쩌지도 못하고 참아낸다. 기택이 하는 일마다 안풀려서 온가족이 피자박스 접기로 소일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해내질 못해서 새파란 피자가게 여사장한테 받을 돈을 까이고 하대까지 받는다. 누가 봐도 이 가족은 참 불쌍해 보인다.


  그러던 어느날 기택의 아들 기우의 친구 민혁이 '수석'을 들고 찾아오면서, 이 가족의 모험의 여정이 시작된다. 산수의 경치가 새겨져 있어서 '산수경석'이라고 불리우는 이 돌을 민혁은 재운의 상징이라며 건네는데, 이 돌은 실은 이 가족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신물()과도 같다. 영화는 어쩌면 이 돌과 함께 하는 기택 가족의 모험담 같기도 하다. 나중에 폭우가 내려서 기택의 집이 물에 잠기는데, 이 돌은 가라앉지 않고 떠오른다. 기우는 이재민 대피소에서도 이 돌을 내려놓지 못한다. 왜 돌을 가지고 왔냐는 기택의 질문에 돌이 자꾸만 자신에게 '들러붙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가족에게 걸림돌이 될 이들을 제거하려고 할 때 흉기로 쓰려고 가져가기도 한다. 그러나 도리어 그 돌은 기우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신화의 영웅의 모험담에서 영웅에게는 어려운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여정의 초반에 주어지는데, 기택의 가족에게 주어진 저 산수경석은 온갖 불행과 저주가 들러붙은 무기일 뿐이다.


  벌레의 삶. 이 가족이 모험의 여정을 택한 이유는 그 더럽고도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갖 협잡질과 능글거리는 거짓 연기로 박사장네 집을 잠식해 들어간다. 아들 기우는 영어 과외 선생, 딸 기정은 미술 선생, 기택은 운전기사, 부인 충숙은 가정부로 혼연일체가 되어 박사장네를 거리낌없이 농락한다. 이쯤되면 이 가난한 사람들, 아니 벌레 일가의 그 교활함과 사악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봉준호는 세상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에 대해 갖고 있는 흔한 온정주의적 시각을 사정없이 부숴버리고, 기택 가족으로 대변되는 하층민의 민낯을 까발린다. 캠핑을 떠난 박사장 가족의 집 거실을 점령하고 양주 파티를 벌이는 기택 가족의 행태는 그들의 몸에 밴 사고의 천박함과 추악한 이기주의를 드러낸다.


  '기생충'에는 기택 일가와 비슷한 벌레의 삶을 사는 또 다른 이들이 등장한다. 바로 박사장 집 가정부 문광과 근세 부부다. 문광은 가정부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며 박사장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을 넘지 않는다. 마치 박사장네가 살고 있는 그 집 자체로 보일 정도로 충실한 일꾼으로 살던 문광에게 기택 가족의 등장은 날벼락 같다. 일자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박사장 집 지하에 기거하던 남편 근세의 생존마저 위협을 받는다. 이들 부부가 기택 일가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그 두 가족의 혈투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들 모두가 박사장네를 계속 속여가면서 살 수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며 엄청난 적의와 살의를 표출한다. 결국 근세는 기택의 딸 기정의 목숨을 앗아가고, 자신은 충숙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벌레들에게 공존과 연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인 박사장은 그런 벌레들에게 '냄새'가 난다며 혐오감을 표출한다. 그는 기택에게 나는 냄새가 지하철에서 맡을 수 있는 '무말랭이 냄새'라고 표현한다.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자신은 그들과는 다른 종족임을 표명하는 동시에, 그가 벌레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에 대해 얼마나 역겨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사장은 그 벌레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선을 넘는다'고 표현하는데, 박사장이 보여주는 우월감에서 나온 그 지독한 멸시와 극악의 냉소를 기택은 참아내질 못한다. 비록 벌레의 삶을 살고 있지만, 기택이 보기에 박사장의 위선은 자신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기택이 자신의 자존감을 냄새 난다며 짓밟는 박사장에게 최후를 선사하면서, 인간답게 살아보고자 선택했던 기택 일가의 여정은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 모든 여정을 함께 했던 산수경석은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기우가 강물에 돌을 넣자 비로소 '가라앉는다'. 그 저주의 부적과도 같은 신물(物)은 자신이 해야할 바를 다했다. 벌레들에게는 벌레의 삶이 어울린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벌레가 인간이 되기를 소망할 때, 그것은 세상의 순리를 어지럽히는 일이 되며 파국을 자초하게 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돌을 가져온 기우의 친구 민혁은 인간 세계에서 온 '재앙의 전령사'처럼 보인다. 


  영화 도입부에 기정과 기우는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화장실 천장에까지 휴대폰을 들이댄다. 마치 두 남매가 인간들이 사는 지상에서 내려오는 신탁을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곰팡이와 곱등이, 꿉꿉한 냄새가 밴 반지하 벌레의 삶이 아닌, 지상에 사는 인간의 삶을 살고 싶었던 남매의 소망은 '전령사' 민혁에 의해 응답받는다. 그러나 실패가 예견된 이 비극의 여정을 통해 영화 '기생충'은 벌레들에게 결코 '선'을 넘지 말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기택 일가의 집을 삼킨 엄청난 폭우는 벌레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지하와 지상을 명백하게 가른다. 결국 기우와 충숙은 원래의 반지하 집으로, 기택은 박사장 집 지하로 돌아간다. 그곳이 그들이 원래 있어야할 자리였다. 


  영화관에서 '기생충'을 본 어떤 이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박사장이 말한 '냄새'를 풍기며 사는 존재임을, 그리고 영화관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어젯밤, 케이블 채널에서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나도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그 어떤 공포 영화 보다 무서운 영화라고 느꼈다. '벌레들'에게 어두컴컴한 지하의 세계에서 조용히 지낼 것을, 인간들이 사는 지상의 세계를 넘볼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고 하는 이 영화에 대해 반박할 그 어떤 말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결코 인간이 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의 비극이 영화 '기생충'에 그렇게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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