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단편 영화를 찍었을 때가 생각난다. 8mm필름으로 5분짜리, 4명이 같이 찍은 조별 과제였다.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환장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각자 개성이 강한 4명이 다들 한마디씩 하면서, 이거하자 저거하자 난리를 치는 동안에 찍으려는 영화는 어느새 산으로 가고 있었다. 나중에 편집실에서 러프 컷(rough cut, 편집 이전의 현상본)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필름을 잘라서 이어붙인 기억이 없으니 나는 편집도 안했다. 촬영을 했던 K가 아마도 했을 텐데, 아직도 K의 이죽거리는 말투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K를 싫어하고 있는가 보다. 아무튼 수업 시간에 시사회를 했는데, 정말이지 남들 눈에 안띄게 바닥을 기어서라도 강의실 밖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그때 느낀 것은 그랬다. 영화를, 특히 감독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영화적 재능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과 스탭들과의 소통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면 최종 결정권자로서 감독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것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가 바로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판가름한다.


  영화 공부할 때 봉준호 감독이 어떻게 작업한다는 것을 건너건너 듣기만 했을 뿐이지만, 그가 뛰어난 영화적 재능과 함께 소통 능력도 '달인'의 수준이라는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자신이 생각한 영화적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감독은 현장의 모든 일들을 중재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재능의 영역이다. '친화력'이야말로 감독이 가져야할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그게 누구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참 힘든 문제다. 특히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그것은 더 중요하다. 촬영 대상과 어느 정도의 라포(rapport, 사람과 사람사이에 생기는 상호신뢰관계를 뜻하는 말)를 형성했느냐가 다큐의 성패를 좌우한다. 자신이 찍고 싶은 이야기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카메라 들이댄다고 자세히 말해줄 사람은 세상에 그 어디에도 없다. 


  1995년 시카고 대폭염으로 인해 739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당시 사회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에릭 클리넨버그는 그것이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폭염 사망자가 다수 나온 시카고 흑인 주거지역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백인 남성인 그가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것을 묻는데, 아주 친절하게 답해줄 주민이 있었을까? 천만에, 그래서 그는 1년 2개월 동안 그 지역 사회를 그냥 돌아다니면서 주민들과 친분을 쌓는데 주력한다. 그런 시간들이 쌓인 후에야 주민들은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 정리해서 책을 써냈다. 그렇게 2002년에 나온 'Heat Wave'는 에릭 클리넨버그에게 여러가지 명예를 안겨주었고, 그의 학자로서의 경력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그는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촬영하려는, 또는 연구하려는 그런 대상에 접근하는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매우 까다롭고 힘들다. 단지 시간만 들인다고 그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친화력 갑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아주 쉽게 해내기도 한다. 다큐 'Cobra Gypsies(2015)'를 찍은 라파엘 트레자가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3개월 동안 인도 북부 라자스탄 지방에 머물면서 토착 유목민 부족인 캘벨리야(Kalbeliya) 부족의 일상을 담아냈다. 이 다큐를 보면, 이 부족 사람들이 얼마나 감독 라파엘을 편하게 대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마치 친구, 가족처럼 여기며 자신들의 생활을 보여준다.


  오늘날 유럽 집시들의 기원이라고 추측되는 인도 북부 원주민 부족 가운데 하나인 캘벨리야 부족은 춤과 코브라 공연으로 유명하다. 코브라 공연은 야생동물 보호 협약 이후로 금지되었지만, 이 부족에게 그 독을 채취하는 일은 허용되고 있다. 주로 인도 전통 의학인 아유르베다에서 쓰인다. 감독 라파엘의 친화력과 실험정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인도 아유르베다 의사를 찾아가 직접 코브라 독을 눈에 대보기까지 한다(아니, 라파엘, 너 왜 그러니?) 잠깐 깜짝 놀라더니, 눈이 시원해졌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래도 친절하게 화면에 '검증되지 않은 의학이니 따라하지 마세요'라고 자막을 넣었다.


  1시간이 좀 못되는 이 다큐의 내용은 별 게 없다. 라파엘은 부족 사람들이 코브라 뱀 잡으러 가면 그거 따라다니고, 또 야생 벌꿀 채취하러 간다고 하면 카메라 들고 나선다. 부족 최대의 축제도 찍는다. 그 부족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나본 외국인은 진짜로 라파엘이 처음이다. 간혹 관광객을 본 이들도 있다고 하지만, 이 부족에게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난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런 거 찍어봤자 돈이 안되니까 그랬겠지 싶다. 이 다큐도 결코 유명한 다큐가 아니다. 이걸 본 어떤 사람은 '깊이도 없고 지루하다'는 평을 쓰기도 했다. 어느 부분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캘벨리야 부족을 친밀하게 담아내는 그 어떤 작품이 있기는 했을까? 문화인류학자가 카메라 들고 3개월 동안 그들과 지냈다고 해도 이 정도 수준으로 찍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다큐가 그래서 인기있는 지점은 의외인데, 바로 학교다. 주로 문화인류학과 수업에서 자료로 쓰이는 모양이다. 수업시간에 봤다는 이야기부터, 이걸 논문의 참고 자료로 쓴 미국 학생도 있었다(그 학생이 쓴 논문은 읽어보니 그저 그랬다).


  감독 라파엘 트레자는 'Cobra Gypsies'를 진짜 자기 맘대로, 멋대로 찍었다. 이 친구는 프랑스 태생으로 그 자신이 음악가라서 이 다큐의 음악도 자신이 다 했다. 굉장히 비트가 강한 음악들이 다큐 내내 흐르는데, 화면과 아주 잘 어울린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작업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혼자 작업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 좀 힘들고, 시간이 더럽게 많이 걸려서 그렇지. 이 친구 작업들 보면 '보르네오 독침 사냥꾼'을 찍은 것도 있던데, 그냥 카메라 하나 짊어지고 낯선 곳을 떠돌면서 찍고 싶은 거 하면서 그렇게 사는 모양이다. 참 자유로운 영혼이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다큐들을 보면, 소재나 주제와 함께 감독이 얼마나 대상에 밀접하고 진정성있게 접근했는가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에서 다큐 감독의 역량을 평가하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 가까운 곳에서 터를 잡고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두면서 친분을 쌓아가고 그들이 '말'을 하기까지 기다린다. 물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초기 문화인류학자들도 써먹은 방법이다. 동물 다큐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북극곰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나중에 메이킹 필름을 따로 보았는데, 그 다큐를 찍은 감독은 1년 반동안 카메라를 가져다 놓고 멀리서 북극곰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곰들이 자신의 존재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2년째 되던 해의 겨울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내가 본 1시간짜리 다큐는 그가 5년의 시간 동안 담아낸 결과물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마음을 다하고, 노력을 다해야 겨우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때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설 때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시도가 헛된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도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이란 것이 덧셈 뺄셈하듯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깨닫게 된다.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다큐를 보게 될 때도 그렇다. 누군가는 그와 비슷한 주제로 찍을 때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Cobra Gypsies'는 완전한, 아주 좋은 다큐는 아니다. 캘벨리야 부족의 일상을 친밀하게 담아낸 점에서는 성공했지만, 성찰의 깊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민속지학에서 쓸 법한 자료 화면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앞으로 캘벨리야 부족을 촬영하게 될 때, 또는 그러한 소수 토착 부족을 담아내는 작품을 하려고 할 때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은 작품이다. 친밀함, 솔직함, 개방성, 그것을 바탕으로 낯선 이들과 그들의 문물에 접근하는 다큐 감독의 좋은 자세를 라파엘 트레자는 아주 잘 보여준다.



*사진 출처: facebook.com/cobragyps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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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20 01:07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내려가면서 [괴짜사회학],[플로팅 시티] 책을 낸사회학자 수디르 벤카테시가 생각났습니다. 그분이 민속지학 방법으로 연구하신 분이시거든요. 다큐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고 한번도 감독의 입장에서 영상을 본적이 없어서인지, 푸른별님의 글이 저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지네요. 이 다큐 한번 보고 싶네요.^^

푸른별 2020-11-20 01:32   좋아요 1 | URL
네, 50분 정도 되는 길지 않은 다큐여서 보기도 괜찮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감독‘ 아닙니다. 영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이 블로그에 주로 미디어와 영화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1995년 7월의 시카고에 열파가 들이닥쳤다. 그냥 많이 더운 정도가 아니었다. 특히 7월 12일부터 16일 동안, 섭씨 40도가 넘는 열파가 절정을 이루었다. 그 5일간에 폭염으로 인한 직간접적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739명에 이른다. 이른바, '1995 시카고 대폭염'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이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0년 전쯤에 본 재난 다큐에서였다. 화면 속에서 시체 운송용 검정 body bag이 산더미처럼 길바닥에 놓여있었고, 쉴새없이 수송차가 그것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시체들을 감당하지 못한 시체 안치소를 대신해 냉동 트럭들이 동원되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1995년의 미국 대도시에서 있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만 했다. 사회학자 에릭 클리넨버그는 시카고 폭염을 사회적 재난으로 규정하고, 사건 기록과 관련 당사자들을 인터뷰한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2002)'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폭염사회'로 번역되어서 나왔다.


  주디스 헬팬드 감독의 '생존율 지도(Cooked: Survival by Zip Code, 2019)'는 바로 그 '1995년 시카고 대폭염' 사건을 오늘날의 시점에서 새로운 성찰로 담아낸 다큐이다. 주디스 헬팬드는 '재난'의 의미를 재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이 다큐를 시작한다. 과연 시카고 대폭염은 지진, 홍수와 같은 순전한 자연 재난인가? 재난으로 규정할 수 있는 요건은 과연 무엇인가? 그러한 질문들을 풀기 위한 감독의 여정은 '재난 대비 박람회'와 FEMA(미국 연방 재난관리청)의 재난 대비 훈련 참관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감독이 직접 발로 뛰는 것을 보여주는 다큐가 되겠다. 마이크 들고 직접 인터뷰도 하고, 내래이션도 본인의 목소리로 한다. 이런 방식은 마이클 무어의 다큐 '로저와 나(1989)'가 아주 잘 보여주는데, 헬팬드도 아마 '같은 과'인 모양이다. 무어는 그래도 diction이라도 괜찮았지, 솔직히 헬팬드의 diction은 내레이션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발음이 그다지 명료하지 않아서, 다큐 내내 불편하게 들리는 면이 있다.


  헬팬드는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시카고 대폭염은 자연 재난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재난임을 입증해낸다. 다수의 사망자들은 시카고 북쪽 지역에 치중되어 있었는데, 그 지역은 흑인 주거지역으로 범죄 발생률이 높은 곳이었다. 희생자들은 고령자, 독신자, 빈민들로 그 살인적인 더위에도 무장괴한이 들어올까봐 창문을 열지 못하고 지내다가 더위에 익혀져버린(cooked) 상태로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시카고 시 당국은 사망자가 폭주하는 상황에서 그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했고, 시장이란 작자는 TV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당신들 부모, 조부모에게 잘 있냐고 안부전화나 좀 열심히 하시오."


  1995년에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지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난하고, 많은 집들은 비어있고, 그곳의 주민들은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런 곳에서 사는 이들은 갖가지 질병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시카고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백인들의 기대수명과 그곳 주민들의 기대수명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연구논문이 보여주는 숫자는 81/65, 무려 16년의 수명 차이가 난다. 말그대로 사는 곳(zip code)이 어디냐에 따라 '생존(survival)'의 가능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25년이 흘렀음에도 시카고라는 도시에서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다큐에 나온 재난 대비 전문가는 정부 당국이 모든 재난 희생자들을 구할 수는 없으며, 위급상황시 우선순위를 정하는 문제는 그 사회의 '역사'와 '전통'를 따른다고 말한다. 감독은 미국의 역사와 전통이 유색인종과 가난한 이들을 후순위로 밀어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엉터리이며 범죄라며 일갈한다. 헬팬드가 보기에 1995년의 시카고 대폭염은 오늘날에도 진행되고 있는 인종차별적 재난이다.


  최악의 폭염으로 기억되는 2018년, 그해 폭염 사망자 수를 질병관리본부는 48명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2019년의 통계청 발표에서 2018년 온열질환 사망자 수는 160명으로 집계되었다. 연구자들은 그 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산하는데, 집계 과정에서 누락된 부분들이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한겨레 21, 1288호 참조). 우리 사회도 그런 통계 자료의 분석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기후 재난에 취약한 이들에 대한 지원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이어온 계층에 따른 평등하지 않은 죽음에서 이제는 '기후'라는 요인이 추가되었고, 우리 모두에게는 사회적 약자가 짊어진 그 부담을 제도와 구조의 개선을 통해 덜어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1995년의 시카고 대폭염이 남긴 교훈은 그런 것이다.



*사진 출처: cinemanova.com.au(사진 왼편이 다큐의 감독 주디스 헬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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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19 01:4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코로나 감염도 같은 맥락인것 같아요. 총 감염자 수는 평균적인 재난의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일뿐, 재난이 어떻게 불균형하게 사회에 또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지는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코로나 감염자수/사망자수를 (미국 같은경우) 거주 지역별, 인종별로 살펴보면 엄청난 구분해서 보면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https://www.cdc.gov/coronavirus/2019-ncov/covid-data/investigations-discovery/hospitalization-death-by-race-ethnicity.html)

푸른별 2020-11-19 15:09   좋아요 0 | URL
네,좋은 댓글 잘 읽었습니다. 아마도 이 유행병 사태가 지나고나면, 미국 학계에서도 covid-19 사망자들을 분석한 여러 학문적 연구결과들이 많이 나오겠지요. 죽음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지만, 그 과정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의 시대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절실히 깨닫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엊그제 늦은 새벽에 KTV에서 방영한 신상옥 감독의 '자매의 화원(1959)'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상과 맞닥뜨리게 된 자매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작품이었다. 최은희 씨가 분한 큰딸 정희는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데, 그걸 갚기 위해 요정 마담으로 일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일자리를 주선한 사람은 의사인 정희 아버지 남박사의 도움으로 병을 고치게 된 방사장(김승호 분)이다. 방사장은 남모르게 정희에 대한 연심을 품고 있다. 정희의 동생 명희가 양장점 낸다며 돈을 끌어다 쓰는 과정에서 생긴 큰 빚도 해결해 주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정희에게 청혼을 한다.


  영화를 보면서 든 의문은 그거였다. 아니, 방사장은 왜 사랑하는 여자한테 자신이 운영하는 요정 마담 일을 하게 하는 거지? 그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세상 험한 것 좀 겪어 보고, 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몸소 느껴 보라는 건가? 그런데 김승호가 분한 방사장의 캐릭터는 그렇게 생각이 복잡하고 의뭉스러운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름대로 정희에 대한 순정을 가진 인물인데, 아무튼 정희도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음에도 방사장이 가진 부의 배경에 흔들린다. 드라마 '청춘의 덫(1999)'의 동우(이종원 분)도 돈이 가진 그 힘에 목말라 하고, 그것을 가지기를 열망한다.


  "넌 내가 부모 형제도 귀찮아 하는 놈인 줄 알겠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 평생 죽으라고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 염증나."


  자신이 다니는 회사 사주의 딸이 그를 사랑하게 되자, 동우는 어려운 시절에 만나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윤희(심은하 분)에게서 매몰차게 돌아선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를 이어주었던 딸 혜림이가 사고로 죽자 윤희는 복수의 칼날을 간다. 제작사인 SBS 홈페이지의 간략한 드라마 소개는 이렇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후 복수를 꿈꾸는 한 여인의 절규에 관한 드라마'


  요새 케이블 채널에서 이 드라마가 다시 방영되고 있다. 돌리다 보면, 심은하가 맨날 울고 있는 장면이다. 아직 초반부라 심은하가 연기한 윤희가 독기를 품으려면 좀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다시 '청춘의 덫'을 보다 보면 그렇다. 이종원이 연기한 동우가 그렇게 나쁜 놈인가? 물론 딸이 사고로 죽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도 윤희가 자기를 붙잡으려고 수를 쓴다고 생각해서 모른 척 한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동우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이미 죽었고 자신과 윤희의 관계는 끝났으니, 그냥 자신이 갈 길 가게 놓아주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지독한 가난의 배경을 뼛속 깊이 혐오하고 있으며,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쓴다. 동우는 윤희의 한결같은 사랑도 거추장스럽게 느낀다. 자신과 부모 형제, 좀 잘 먹고 남들이 우러러 보게끔 살아보겠다는 욕망이 잘못된 것인가? 동우는 부에 대한 욕망으로 거침없이 질주한다. 그런 그를 윤희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여기며, 동우 같은 사람이 잘 되면 안된다면서 그 유명한 대사를 쏟아낸다. 


  "당신, 부셔버리겠어."


  '부숴버리겠어'가 맞춤법에 맞지만, 이 대사는 그냥 그대로 굳어져서 드라마가 끝난지 이십년이란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수없이 회자되었다. 동우를 산산조각 내기 위해 윤희는 자신이 모시는 상사 영국(전광렬 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영국'이란 인물은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온갖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회사의 후계자로 이제 막 정신줄 잡고 살려는 인물이다. 영국도 윤희를 자신이 정착할 마지막 여자로 여기고 청혼한다. 윤희의 복수극은 착착 진행되어간다. 영국의 여동생 영주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동우에게 윤희는 견딜 수 없는 존재다. 대체 이 막장 멜로 복수극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당시 시청자들의 심장은 쫄깃해지다 못해 바스라질 지경이었다.


  이 드라마는 당시 수요일 저녁에 맞붙은 MBC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 초반부 저조한 시청률로 밀렸으나, 회를 거듭할수록 화제가 되면서 나중에는 50%가 넘는 초대박 시청률을 기록했다. 동우 역의 이종원은 결혼을 앞두고 바쁘다는 이유로 원래 전광렬이 맡은 영국 역의 제안을 고사했다. 그러나 동우 역을 맡을 배우가 마땅하지 않자 나중에 합류했고, 그에게 이 드라마는 '젊은이의 양지(1995)'와 더불어 인생작으로 남았다. 얼마나 이 드라마의 동우 역으로 미움을 받았는지, 지방 촬영가서 식당에서 바가지로 뿌리는 소금을 뒤집어 쓰고 내쫓김을 당했다는 일화도 말한 적이 있다. 


  작가 김수현이 1978년에 '청춘의 덫'을 썼을 때, 이 드라마는 당시 사회 통념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기종영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김수현은 동명의 소설로 못다한 이야기를 썼고, 이듬해인 1979년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보란듯이 18만명에 이르는 관객동원을 이뤄낸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았던 것일까? 1999년에 드라마 리메이크 소식이 알려지자 그 구식 드라마의 성공을 점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그 때 보면서, 그 드라마의 이야기가 참 '올드'하다고 느꼈었다. 당시의 시청자들에게도 드라마의 인물들과 줄거리가 가진 설득력이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왜 이 드라마는 그렇게 인기를 끌었던 것일까? 아마도 '심은하'라는 배우의 열연이 가장 큰 부분으로 여겨진다. 심은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 드라마에 쏟아부었다. 촬영 끝나고 나면 기운이 빠져서 쓰러질 것 같았다고 할 정도로 연기에 몰입했고, 드라마에서 딸인 혜림이 죽었을 때나 동우에 대한 증오를 쏟아낼 때 신들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고 고백했다(1999년 3월 중앙일보 인터뷰 참조). 드라마 속에서 윤희가 입고 나온 의상도 화제였다. 김수현의 2000년 드라마 '불꽃'에서 이영애가 보여준 이른바 '청담동 며느리 룩'을 완성한 디자이너 지춘희가 윤희가 입은 '비서 룩'을 선보였다. 드라마 보면서도, 아니 가난한 비서가 무슨 옷은 죄다 부티 좔좔 흐르는 옷들만 입고 나오냐 싶기는 했다. 게다가 심은하가 단정하게 머리 묶을 때 쓰는 곱창 머리끈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아직도 이 드라마의 패션을 언급하는 이들도 많다.


  배우 정영숙이 맡은 영국 어머니 이여사도 화려한 패션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재벌 회장의 첩으로 온갖 돈의 위세를 부리지만, 정작 자신이 낳은 자식들에게는 그 어떤 사랑과 인정도 받지 못한다. 이여사의 젊은 날은 어쩌면 돈에 대한 욕망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동우와 판박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회장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유령같은 존재로 살아온 이여사의 삶은 그 욕망의 허상을 보여준다. 이여사가 오직 생기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순간은 가정부를 부를 때이다. '아줌마', 라고 부르면, '네, 사모님' 하면서 언제든 달려오는 가정부야말로 이여사가 이루어낸 삶의 유일한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여사의 대척점에 본부인 한여사(김용림 분)가 있다. 한여사에게는 첩이 낳은 자식들이기는 하나 자신을 존경하며 따르는 영국과 영주가 있다. 그러나 정실부인이라는 허울 뿐인 호칭을 가지고 재벌가의 안방 마님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사는 것이 한여사라고 해서 녹록할 리가 없다. 마치 밀랍인형처럼 그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는 한여사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박제된 삶. 이여사나 한여사 모두 돈이 주는 그 모든 것에 자신의 삶을 묶인 이들일 뿐이다. 이렇게 드라마 '청춘의 덫'에는 동우가 젊음을 내던져 얻고 싶었던 부의 끝에는 그런 여성들도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성인지 감수성이 바닥이다 못해 성희롱에 가까운 노상무 영국의 대사나 행동도 문제다. 여성 편력이 심한, 젊은 날을 방탕하게 보낸 인물이라고는 하나, 영국이 비서 윤희에게 하는 말들은 그때도 그러했고 지금의 시청자들이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이다. 그 모든 것을 이십 년 전에는 당연했다고 용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드라마에서 가능했던 이유도 역시 '돈'의 위력 때문이다. 누가 회사의 차기 후계자에게 잘못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그런 돈의 힘을 바탕으로 영국은 정제되지 않은 언사를 윤희에게 쏟아내고, 윤희도 참아낸다.


  "하늘이 허락한다면, 상무님 신발이라도 되어드리겠어요."


  영국의 청혼을 받아들이며, 결국 윤희는 그렇게 말한다. 이 '신발' 대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처음에는 복수의 도구로 접근했던 남자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느낀 여자의 지극한 자기 반성을 보여주는 말치고는 과하다. 어쨌든 윤희는 자신의 청춘을 옥죄었던 '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 재벌가의 마님이라는 새로운 삶으로 진입한다. 어쩌면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청춘의 '덫'에서 벗어난 인물인지도 모른다.


  진실로 영주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결국 동우의 야망은 부서지고 만다. 당시의 시청자들에게는 속이 시원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동우의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자유를 맘껏 누리다가 결국은 그 열기에 의해 밀랍 날개가 녹으면서 추락한 신화 속의 이카루스처럼 동우의 꿈은 좌절된다. 거의 손 안에 들어왔다고 믿었던 부와 사랑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쓸쓸한 야망의 뒤안길에 동우는 홀로 서있다.


  동우는 정말 나쁜 놈인가? 그 드라마가 방영되었던 1999년에도 그랬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봐도 동우는 나쁜 남자 맞다. 그러나 세월의 힘일까? 나는 동우가 밉기 보다는 그저 가엾다. 동우의 야망은 좌절되었으므로 자신의 청춘을 내던져 얻고자 했던 것의 허망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나도 그 허망함에 대해 말할 그 무엇도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그것에 대해 관조할 수 있는 약간의 지혜를 나이를 먹으면서 터득했을 뿐이다. 그렇게 드라마 '청춘의 덫'은 헤어나올 수 없는 야망에 자신을 던져버린 한 남자의 젊은 날의 초상을 그려낸다.

 


*사진 출처: 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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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맷 슈레이더 감독의 다큐 'Score: A Flim Music Documentary(2016)'을 보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 요새 보는 영화들이 다큐에 치우쳐져 있다. 어, 그런데 잠깐만, 예전부터 나는 극영화 보다는 다큐를 무척 좋아했던 사람이잖아,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다큐 'Score'는 말 그대로 영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무성 영화 시절에도 주로 오르간 연주로 대표되는 음악들이 영화에 들어가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영화의 역사에서 어떻게 영화 음악이 변천해왔는가를 들여다 본다. 뭐 나름대로 분석한다고 신경심리학자 불러다 놓고 음악이 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인터뷰도 한다(솔직히 그 부분은 쓸데없는 사족같다). 현재 잘 나가는 영화 음악 작곡가들이 서로 주고 받는 이런저런 자화자찬(?)들도 재미있다. 한스 짐머, 토마스 뉴먼, 트렌트 레즈너 같은 유명 영화 음악 작곡가들의 면면을 보는 재미,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다큐에서 가장 빛나는 영화 음악들 덕분에 귀가 호강하는 다큐가 되겠다. 요약하면, 생각보다 극한 직업인 '영화 음악가'들의 세계 탐구에 더해 가슴 뛰게 만드는 좋은 영화 음악이 주인공인 다큐인 셈이다.


  기존의 영화 음악가들은 골방에서 영감을 받아 모조리 혼자 다 작업하는 것 같았던 인식이었는데, 이제는 영화가 거대 산업이 되다 보니 영화 음악도 여러 사람이 팀을 만들어서 하는 하나의 공장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영화에 음악이라는 혼을 입히기 위해 음악가들이 쏟는 열정도 참 대단했다. 오만가지 악기들로 가득찬 작업실이 5개나 되는 이도 있었고, 다양한 소리를 내기 위해 아프리카 토속 악기까지 수집해서 작업에 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다큐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무성 영화 시절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왔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 화면이었다. 영화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그 50초 가량의, 사람들이 기차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담았을 뿐인 그 작품. 왜 그 짧은 화면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것일까...


  그 장면을 처음 본 것은 영화 공부를 시작한 첫해에 들었던 과목 '영화의 이해'에서 였다. 영화의 기본이 되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배웠던 그 시간. 주로 명작 영화들의 장면장면들이 수업 교재로 쓰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와일드 번치(1969)', 그리고 한국 영화 '만다라(1981)'도 있었다. '만다라'는 도입부 롱 쇼트가 몇 분으로 느껴지는지를 적어야 했는데, 수강생들 모두 다 틀렸던 기억이 난다. 


  아, 그랬었지. 나는 'Score' 다큐를 보는 도중에 그 시절이 생각났다. 첫해에 들었던 과목 가운데에는 '다큐멘터리 영화사'도 있었다. 그 과목도 내가 참 좋아했던 수업이었다. 그때 첫시간에 보았던 다큐가 '북극의 나누크(1922)'였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기념비적인 작품. 감독 로버트 플래허티는 다큐의 시조처럼 여겨졌지만, 그 작품이 온전한 다큐 정신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몇몇 장면들은 재연된 것이며, 사실성에 문제가 있는 부분도 있었다. 나누크의 부인으로 나온 여성이 실제로는 플래허티의 이누이트 동거녀였고, 당시의 이누이트 인들이 작살이 아닌 총으로도 사냥했음에도 그런 장면은 배제했다는 점은 철저하게 플래허티가 계획한 화면들로만 구성된 기획 다큐의 측면이 강하다. 로버트 플래허티는 아주 노련하고 영민한 영화 제작자였다.


  그럼에도 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이 무성영화 다큐는 관객들이 주인공 나누크와 그 가족의 일상으로 마법처럼 빠져들게 만든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도 지금 내가 다시 본다면, 그냥 시큰둥하게 보고 말았을 작품.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영화에 넋이 나간 상태였으므로, 영화에 대해 배우는 모든 것이 놀랍고 기쁘고 그랬었다. 오로지 열정만으로 지겹고 참기 힘든 영화도 보았다. 인종차별을 당연시하는 온갖 수사로 가득한 3시간 짜리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에서 KKK단원들이 구국의 열사처럼 등장하는 것도 그래서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그토록 영화를 좋아했을까? 특히 다큐를 더 좋아했던 이유는 뭘까? 영화를 보면서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보여주는 매혹적인 세계들 때문에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모두는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시 맞닥뜨리는 우리 자신의 일상이 얼마나 평범하고, 때론 지루하고 보잘 것 없게 느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글쎄, 사람마다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이유들이 다 다르겠지. 내게는 영화가 나와는 다른 사람들, 세계들을 보여주는 창이었고, 그러한 응시를 통해 내가 조금씩 성장한다고 느꼈었다.


  대학 시절에 전공 수업을 열심히 듣기는 했어도, 나중에는 철학과 문학, 종교 관련 수업으로 학문적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녔었다. 철학과 애들은 내가 부전공하는 줄 알 정도였다. 그때 들은 서양 근현대 철학 수업은 진짜 어려웠다. 중세 철학사에 비하면 덜하기는 했지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아직도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 가다머의 해석학을 설명해주던 강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지평과 너의 지평이 만나는 것. 그래서 그렇게 만난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것. 그것이 그의 철학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창고에 있는 박스 어딘가에 그때 수업시간에 받은 프린트 자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보관했다. 어쩌면 영화는 내가 가진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소중한 친구로 여겨졌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특히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실제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 사건들을 보면서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그것을 처음으로 보던 시절, 영화에 대한 내 첫마음을 일깨워주는 다큐인지도 모른다. 볼만한 다큐를 찾으려고 재생 목록을 뒤적거리다가, 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그 다큐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서 이렇게 적어본다.



*사진 출처: filmmonth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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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이납은 카테라를 '언니'라고 부른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엄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테라는 그렇게 부르면 헷갈리니까 하나로 정하라고 한다. 그러자 자이납은 '진짜 엄마 아냐'하면서, 카테라의 늙은 어머니에게 '엄마'하고 안긴다.


  "어젯밤에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 폭탄이 우리집에 떨어져서 우리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랬어요."


  도대체 23살의 카테라와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사흐라 마니 감독의 '침묵하는 여성들을 위하여(A Thousand Girls Like Me, 2018)'는 EIDF 2019 개막작으로 상영된 작품이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이 여성 감독은 카테라에게 일어난 참혹한 비극에 대해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울림은 너무나도 크고 깊다.


  카테라는 자신을 강간한 아버지를 고발한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Sexual Abuse)를 당한 카테라는 3번 임신했고, 아버지는 아기들을 사막에 버렸다. 4번째 출산한 아이가 자이납이다. 카테라는 다시 임신하게 되자, 아버지를 고발했다. 율법학자들을 찾아가 물었지만, 그들은 참고 살라거나 기도하라는 말만을 했다. 15번째 찾아간 율법학자가 카테라에게 해답을 주었다. 


  "미디어 앞에 나가서 말하시오."


  카테라는 부르카(burqa)를 입고 TV에 나가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증언한다. 아버지는 기소되었지만, 정식 재판은 1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 아버지 친가 사람들의 위협과 협박이 이어지고, 카테라는 경찰과 변호사들을 만나느라 돈을 다 써버린다. 뱃속의 아기는 법적 증거이기 때문에 낙태를 할 수 없다는 판사의 명령에 따라 카테라는 아기를 출산한다. 태어난 아기의 DNA를 검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카테라의 아버지라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강제로 그랬다는 것을 우리가 입증해야 합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왜 저항하지 않았냐, 왜 신고하지 않았냐, 왜 주변에 알리지 않았냐를 문제삼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입증하지 않는다면, 유전자 검사는 별 소용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변호사의 판단은 냉정하다. 카테라의 아버지는 매번 폭력을 일삼았고, 남동생들이 막으려고 하자 남동생들도 때려서 내쫓았다. 그 집에서 일어난 그 엄청난 일들을 증언하는 이웃들의 증언과 그들의 지장이 빼곡히 찍힌 고소장도 소용이 없다. 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느냐고? 밤낮으로 폭언과 폭력이 행해지는 그 집에서 어렸을 적부터 살아본 카테라가 아니라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카테라는 자신에게 일어난 그 끔찍한 비극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이 입증해낸 그 유명한 실험. 반복된 전기 충격을 제어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개들은 나중에 전기 충격을 제어하는 버튼이 제대로 작동이 되어도 그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그냥 자신에게 오는 전기 충격을 다 받아낼 뿐이다. 왜 가정폭력의 희생자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 환경에서 벗어날 그 어떤 시도나 행동도 하지 않을까? 무기력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카테라는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친가쪽 사람들은 카테라가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죽음의 위협을 일삼는다. 이른바 명예 살인(Honor Killing). 드디어 이루어진 재판에서 카테라 아버지의 유죄가 인정되지만, 형량은 선고되지 않고 계속 미뤄진다. 2015년에 있었던 재판의 형량 선고는 다큐가 완성된 2018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판 후 카테라는 친가의 위협과 주변 사람들의 소문과 시선을 피해 하루살이처럼 이사를 다니며 떠도는 삶을 이어간다.


  "너와 나는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정해진 운명인가 보다."


  카테라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카테라는 자신에게 지워진 그 운명에 맞선다. '운명'에 해당하는 라틴어 'fatum'은 입으로 말해진 것(utterance), 선언된 것(declaration)의 의미가 있다. 이미 공표된 것이므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죽음(death)의 뜻도 있다. '치명적인'이란 뜻의 영어 'fatal'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미 정해진 것에 대해 카테라는 거부의 뜻을 표명한다. '말'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카테라의 그 결심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카테라의 그 목숨을 건 '발화(發話)'는 자신과 두 아이들의 인생을 구한다. 여성 인권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카테라는 자이납과 모하메드를 데리고 프랑스로 떠난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에는 행복한 카테라와 아이들의 사진이 올라간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카테라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무수한 여성들이 얼마나 더 침묵의 시간들을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 다큐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보는 내내 가위눌리는 느낌'이라고 썼다. 그렇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욕지기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카테라와 그 두 아이들의 시간은 계속 이어진다. 그들이 짊어진 운명의 짐은 겨우 조금 덜어졌을 뿐이다.


  용기. 1955년 12월 1일, 한 흑인 여성이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 때문에 체포된 여성의 이름은 로자 파크스(Rosa Parks). 결코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그 작은 행동이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용기를 가지고 한 작은 행동, 목숨을 걸고 하는 말 한마디, 그것이 새롭게 쓰여지는 역사의 시작이다. 카테라의 용기 있는 '말'이 부당한 운명에 침묵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을 언젠가 우리가 직접 보게 되길 소망한다.



*사진 출처: EIDF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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