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두치(咽頭齒) 8


  '이것 좀 봐봐. 어제 보니까, 왼쪽 손목에 이게 생긴 거야. 수포처럼 오돌토돌한데, 좀 가렵기도 하고. 두 군데 생겼어. 그것도 왼쪽만.'
  '올려주신 사진을 검토해 본 결과, 화폐상 습진으로 보입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하거나, 어떤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닿아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 이게 청소일 하면서 락스를 좀 많이 써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원인을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도 피부 질환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경주는 Gemini가 언급한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가시처럼 손톱에 콱, 하고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도무지 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처음에 남편을 보며 안쓰러웠던 감정이 조금씩 증오와 분노, 경멸이 뒤섞여 단단한 공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경주는 습진이 생긴 왼쪽 손등을 벅벅 긁다가, 자신도 모르게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소파에서 졸고 있는 남편이 커다란 애벌레 같았다. 그 애벌레는 소파에서 집을 짓고서 먹고 잤다. 남편이 늘 보는 뉴스 채널의 소리도 아주 듣기 싫었다. 지루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져있었다.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협상 소식을 경주는 날마다 들어야 했다. 

  중기는 경주가 구만에게 언제쯤 화를 낼지 가늠해 보았다. 경주의 왼쪽 손등은 군데군데 터져있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일을 해도 물이 손에 닿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중기는 자신이라면 경주처럼 저렇게 몸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원체 약골인 중기는 자신이 그런 일을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며칠만 해도 그냥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중기는 어젯밤 늦게 통조림 택배를 받았다. 배송 예정 시간은 오후 5시였지만, 중기가 문 앞에서 툭, 하며 상자가 던져지는 소리를 들은 것은 자정이 되기 5분 전이었다. 새로 바뀐 택배기사는 여자였는데, 아마도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그렇게 배송 시간이 늦어지곤 했다. 신소미. 배송 기사의 이름이 찍힌 운송장을 뜯어내며, 중기는 먹고 산다는 것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저 여자 택배기사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갈 것이다.  

  33%. 휴대폰의 배터리 잔량을 보고, 중기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중기가 휴대폰을 충전하고 있을 때, 경주도 잔량이 25퍼센트인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낮에 일하는 동안에는 휴대폰을 들여다볼 시간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에 이어폰으로 듣는 오디오북이 배터리를 빨리 닳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경주가 듣는 오디오북은 늘 추리 소설이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은 범인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경주는 아파트 청소를 하는 동안에 범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계속 생각해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니, 재미라기 보다는 경주에게는 나름대로 노동의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기도 했다. 경주는 매일 화단으로 서너 개씩 담배꽁초를 내던지는 입주민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오디오북 속의 살인범은 현실의 담배꽁초 투기범으로 변모했다.

  중기는 경주가 출퇴근 시간에 오디오북으로 추리소설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중기는 경주를 '아파트 청소일을 하게 되었다'까지만 설정해 놓았을 뿐, 경주의 하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중기에게 이 소설은 방전된 상태에서 꾸역꾸역 써내는 일기 같았다. 구만은 애벌레처럼 소파에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있었고, 경주는 무기력하게 그런 남편을 바라보았다. 물론 중기는 작가로서 자신이 과연 그들의 삶에 무슨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들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계속 고민은 하고 있었다. 

  "그런 게 있잖아요. 소설을 쓰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막 살아서 움직인다니까요. 어느 순간에는 자기들이 혼자 말을 시작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해요. 그럼 또 나는 그걸 정신없이 받아서 써내고 있단 말이죠."

  그 말은 중기가 주말에 듣는 문화센터 소설 창작 강의 시간에 늙은 수강생 아줌마가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몇몇 수강생들이 짐짓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기는 자신이 쓴 소설에서 인물들이 그런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별로 기억나질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가만히 있을 때가 많아서, 중기는 그들을 끌고 이리저리 다녔다. 그런 때가 있기는 했다. 인물들이 하고 싶은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빼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썼다.

  "그렇지요. 모름지기 좋은 작가란, 그런 인물의 목소리를 잘 듣고 써내는 사람입니다."

  소설가 선생은 그 수강생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난 좋은 작가는 아닌 모양이군. 중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중년의 소설가 선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때는 촉망받는 소설가였던 선생은 이제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과거에 그가 써냈던 소설은 이제 문화센터와 백화점, 도서관들을 돌면서 강의할 수 있는 생계의 밑천일 뿐이었다. 중기가 생각하기에 선생이 소설을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선생은 수강생들이 써온 소설들에 웬만해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중기의 단편을 읽고 선생이 하는 소리는 매번 똑같았다.

  "디테일이 부족해요, 디테일이."

  물론 수강생 중에서 디테일이 부족한 사람은 중기 혼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등장인물이 살아서 움직인다고 말했던 늙은 아줌마의 소설은 결국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였을 뿐이다. 1970년대 코딱지만 한 잠실 아파트를 분양받아 송파구의 주민으로 뿌리를 내리며 살아온 여자의 짧은 일대기. 그 소설의 제목은 '나는 송파가 좋아요'였다. 중기는 그 소설, 아니 자전적 이야기에 담긴 지독한 속물근성을 내심 비웃었다. 그럼에도 송파구의 38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 수강생 아줌마와 강서구의 원룸 빌라에 거주하고 있는 자신의 계층적 간극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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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7

 
  중기가 구만의 푹 꺼진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 중기의 집 초인종이 짧게 2번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10분이었다. 도대체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중기는 지직거리는 인터폰의 흑백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주인 영감은 20년도 더 지난 것 같은 낡은 인터폰도 교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폰의 화면은 흑백이었다. 화면 속에는 둥근 얼굴에 M자 탈모가 오기 시작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5층의 쌍둥이 아빠였다.

  "주무관 선생,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아니, 차장님이 웬일로 이 시간에..."
  "저기, 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중기가 현관문을 열어주자, 쌍둥이 아빠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중기는 그를 차장님이라고 불렀는데, 그건 그가 전에 다녔던 마을금고에서의 직책이 차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차장이 아니었다. 횡령으로 잘렸기 때문이다. 금고 측에서 고발까지 하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기껏해야 몇천만 원 아닐까? 중기는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오죽 먹고 살기 힘들면 그랬겠어? 애들 엄마는 식물인간으로 누워있지, 애 둘은 어떻게든 키워야지. 2층의 수선스러운 영천 아줌마가 중기가 분리수거할 때, 옆에서 주절주절 쌍둥이 아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공금에 손을 대는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중기가 그 말을 들은 것도 벌써 석 달이나 지났다.

  "이것 좀 하나 봐주구려."

  쌍둥이 아빠 박 차장은, 아니 차장이었던 남자는 흰색의 뻣뻣한 쇼핑백에서 기다란 직사각형 나무통을 꺼냈다. 통의 겉면에는 검정색 붓글씨로 '명품 방짜유기'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나무 상자의 위 뚜껑을 열어서 그 안에 든 반짝거리는 수저 한 벌을 보여주었다.

  "이게 인간문화재 김선재 선생이 만든 유기인데, 정말 귀한 거라서. 주무관 선생이라면 이런 귀한 걸 알아봐 줄 것 같기도 하고."

  센서등이 나간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남자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쌍둥이 아빠는 요새 방짜유기 그릇을 팔러 다니는 모양이었다. 중기는 일요일 저녁의 늦은 시간, 그걸 들고 벨을 누른 남자의 청을 내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나쯤 있어도 좋은 물건이네요. 얼마나 하는지..."
  "이게 원래 50만 원 받는 건데, 내가 주무관 선생한테는 그리 받을 수는 없고..."

  쌍둥이 아빠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30만 원에 해드리리다."

  중기는 수저 한 벌에 30만 원을 달라는 남자의 말에 기가 찼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문을 닫고 남자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어깨에는 식물인간이 된 아내와 두 쌍둥이 딸이 있었다. 중기는 다음주에 있을 구청 직원의 결혼식 축의금으로 찾아놓은 현금을 떠올렸다. 

  "차장님, 나도 지금 가진 돈이 이것 뿐이라. 20만 원밖에 없는데, 괜찮겠어요?"

  중기의 말에 쌍둥이 아빠의 구겨진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닫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성급히 쇼핑백에 나무상자를 넣었다. 그러고는 중기가 건넨 20만 원을 건네받고는 휘적휘적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쌍둥이 아빠가 가고 난 뒤에, 중기는 그가 건넨 방짜유기를 비로소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숟가락의 손잡이 뒷면에는 '선재 유기'라는 각인이 봉황새의 문양과 함께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봉황새라니, 임금이 쓰는 수저를 흉내라도 냈단 말인가? 중기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건 별로 쓸모도 없는 장식품일 뿐이다. 중기는 자신이 건넨 그 20만 원이 병원에서 7년째 누워있다는 차장의 부인 병원비와 그 쌍둥이 딸의 간식값으로 흘러가는 상상을 했다. 오죽 먹고 살기 힘들면 그랬겠어? 2층 영천 아줌마의 말이 이상하게 중기의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중기는 문득 구만에게 방짜유기 영업을 시켜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구만은 물건이란 걸 팔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인사팀에서 일했던 구만이 아는 건 인력 채용과 이동에 관한 제반 업무였다. 최근 몇 년 동안 구만을 힘들게 했던 것은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과 관련된 크고 작은 소송이었다. 구만이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직원 간에 물고 늘어지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구만은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이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는 일 같다는 생각마저 할 정도였다. 그래서 구만은 회사를 나오게 되었을 때, 어떤 면에서 후련하기도 했다. 증거랍시고 제출된 시답잖은 녹취 파일과 이메일 내역을 매일 눈이 빠지게 검토하는 건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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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6


  "그러니까, 불친절한 글을 써야지."

  여주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중기는 진이 빠진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chat GPT의 말대로 자신의 소설은 설명이 많은, 친절한 글이었다. 친절한 글은 재미도 없고, 매력도 없다. 불친절하고 까칠해져야지. 그런 글을 써야지. 그런데 중기는 불친절한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대화를 짧게 줄일 것인지, 인물의 행동에 설명도 안 하고 그냥 그 행동들을 마구 늘어놓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우선은 구만을 그대로 주저앉힐지, 아니면 일으켜 세울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심장의 혈관에 스텐트 2개를 넣은 이 중년의 남자는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까?

  중기는 푹 꺼진 15년 된 물소 가죽 소파에 앉아있는 구만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점심을 라면으로 먹은 구만은 입을 벌리고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중기가 보기에 구만은 한심하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다. 가족을 위해 그저 열심히 일한 가장으로서의 구만은 참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퇴직 후에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그저 집에서만 지내는 이 구만이라는 인물은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누라는 아파트 청소일까지 다니고 있는데, 중기는 어떤 단무지가 꼬들꼬들하게 맛있는지를 검색하고 있었다.

  중기는 구만의 등짝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가도, 불안하게 뛰는 구만의 심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아픈 건 사실이잖아. 중기는 구만이 다시는 사회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작가로서 분명히 자신에게는 구만을 집 밖의 세상으로 밀어낼 힘이 있었다. 하지만 중기는 자신이 구만을 움직인다고 해도, 구만은 부메랑처럼 다시 푹 꺼진 소파의 자리로 돌아올 것 같았다.

  구만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중기는 구만이 앉았던 소파에 앉아 보았다. 검정색의 물소 가죽 소파는 군데군데 터진 자국이 보였다. 중기는 자신의 원룸에 있는 낡은 가죽 소파와 그 소파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색깔이었다. 중기의 소파는 갈색이었다. 구만은 화장실에서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배경음악처럼 들리는 케이블 TV의 뉴스 채널에서는 전쟁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이란과 미국의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란과 미국 모두 버티기 모드에 들어간 것이죠. 과연 이 치킨 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협상이 난항에 부딪힌 상황에서 유가는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구만이 전쟁과 별 상관없다고 생각한 라면값이 오르게 될 터였다. 석유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이다. 그 동력의 흐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모든 것의 비용이 다 오를 것이다. 구만이 매일 먹는 라면, 단무지, 전기, 가스, 관리비, 구만을 둘러싼 세계의 모든 것이. 그런데도 구만은 다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중기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구만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구만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도대체 어쩔 셈인가, 저 사람은. 중기는 구만의 좁은 어깨를 마구 흔들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하지만 심장이 좋지 않은 구만에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중기는 구만이 앉을 수 있도록 소파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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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5


  화장실의 수전을 교체하고 나서, 중기는 미리 렌트한 차를 몰고 여주로 향했다. 여주의 요양원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작은 요양원이다. 높은 산이 양옆으로 자리한 좁은 도로는 구불구불하게 끝도 없이 이어졌다. 육이오 전쟁 때, 여주에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와서 살았다 하더군요. 이런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서, 군대가 쉽게 오지 못한다고 믿었대요. 작은 키에 꼬장꼬장한 얼굴을 한 수녀원장이 중기에게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여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이상한 약국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약국이 아니라, 약방이었다. 약방의 유리창은 빛바랜 흰색의 코팅지가 추레하게 너덜거렸다. Rx 모양의 표시가 되어있는 것을 보면, 뭔가 약을 짓는 것 같기는 한데, 왜 약국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까? 칠십은 족히 넘은 영감은 늘 고정된 자세로 TV를 보고 있었다. 중기는 아무리 아파 죽을 것 같아도, 저 영감이 짓는 약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도 TV에 시선을 맞추고 카운터를 지키는 영감이 백미러를 천천히 지나갔다.  

  "이렇게 곰돌이를 씹어 먹으니, 얼마나 슬픈 일이냐. 곰돌이가 너무 불쌍해."

  어머니는 중기가 건넨 하리보 젤리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정말로 슬픈 것 같았다. 나이 들어서 꺼지는 눈꺼풀 때문에 더 작아진 어머니의 눈가는 늘 짓물러 있었다. 중기는 휴대용 티슈를 한 장 꺼내어 어머니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여기서 일하는 여자가 내 돈을 훔쳐갔어. 죄다 도둑년들이야."
 
  어머니는 입을 조그맣게 오므리며 속삭이듯 중기에게 말했다. 중기는 그런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저 걱정하지 마시라고, 자신이 꼭 돈을 찾아서 받아내겠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중기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는 요양원 근처를 산책하기로 했다. 원래 살이 쪘던 어머니는 제대로 걷질 못하자, 살이 더 찐 것 같았다. 휠체어에 커다란 짐을 욱여넣듯 힘겹게 어머니를 앉혔다. 요양원이 자리한 산자락에는 이제 벚꽃이 피고 있었다. 서울은 벚꽃이 다 져버린 지 오래인데, 산속의 계절은 그렇게 또 다른 모양이었다.

  "문수는 잘 지내냐?"
  "네. 잘 지내요."
  "내가 걔 밥을 차려줘야 하는데. 걔가 미나리를 좋아해. 미나리나물 해주면 얼마나 잘 먹는지 몰라. 지금 미나리가 나오는데, 문수 생각이 나서. 우리 착한 아들 문수."

  2주 전에 중기는 문수를 보고 왔다. 문수는 용인의 정신병원에 있다. 중기는 새삼스럽게 문수가 그곳에서 지낸 햇수를 세어보았다. 그러니까 한 10년 되었나? 자신이 공무원으로 임용된 이듬해 봄이니까 아직 10년을 채우지 못한 9년이었다. 문수에게 정신병이 발병하지 않았다면, 문수는 의대를 졸업하고 지금쯤이면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가끔 중기는 자신이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문수의 병이 나아서 문수가 다시 의대에 복학하는 것, 그 두 가지 가운데 무엇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 생각해 보곤 했다. 둘 다 가망이 없는 일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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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4


  "아, 내가 아까 약을 먹었나?"

  소설 속의 구만이 항혈전제를 먹었는지 약통을 확인하는 것처럼, 중기도 TV 옆에 놓인 자신의 약통을 확인했다. 중기는 역류성 후두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주 쉰 목소리가 났고, 가래와 기침도 잦았다. 근처 종합병원의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편도선이 부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약을 먹어보고, 정 힘들면 편도선 절제 수술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약은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수술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중기는 목이 아파도 그러려니 하고 지냈다. 4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서 증상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대학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았더니, 역류성 후두염이었다. 의사는 중기에게 위산 억제제를 처방했다. 생활 습관을 바꾸고, 약은 최소한 3개월 이상은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중기는 속으로 이전에 본 돌팔이 의사를 욕했다.

  중기는 약통에 그대로 있는 약을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어야 하는 것인데, 깜빡하고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약을 안 먹어서 그랬는지, 저녁 내내 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했다. 위산이 역류하면서 목이 아프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중기는 작은 흰색의 알약을 얼른 입안에 넣었다. 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구만에게는 항혈전제가 꼭 필요하듯, 중기에게는 위산 억제제가 필요했다.

  "이 선생, 다음 달부터 월세는 60만 원 보내주쇼."

  "네? 아니, 그럼 10만 원씩이나 더요?"

  "아, 나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빌라 관리며 이런저런 데 나가는 돈이 오죽 많아야 말이지. 나도 오래 생각한 거니까, 이 선생도 그리 알고."

  20세대가 사는 5층짜리 빌라 임대인은 60대 중반의 꼬장꼬장한 늙은이였다. 비쩍 마른 체구에 기다란 얼굴에는 기름기 하나 없었다. 지난달, 중기는 화장실 세면대 수전에 물이 조금씩 새니 수전을 교체해달라고 그 늙은이에게 전화했다. 늙은이는 화장실의 수도 레버를 들었다 놨다를 몇 번 해보더니, 아직 바꿀만한 때가 아니라고 했다. 중기는 물이 새면 수도 요금이 더 나가니까, 바꿔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하지만 늙은이는 손에 묻은 물기를 탁탁 털면서 화장실에서 나왔다.

  "저런 인간이라서, 돈을 모을 수 있나 보군."

  중기는 3만 정도 하는 세면대 수전을 사다가 직접 교체했다. 아마도 주인 늙은이의 수법은 그런 식으로 세입자가 스스로 고치게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수도꼭지 사다가 직접 한 거 맞죠? 우리도 부엌 수도가 물이 줄줄 새는데, 안 고쳐줘서 사다가 했거든요. 진짜 그 늙은이, 하여간 지독해."
 
  중기가 뜯어낸 수도꼭지를 내다버리는 것을 보더니, 2층의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게 주인의 수법이었다. 중기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빌라 말고도, 이문동에 3층짜리 건물을 가지고 있는 늙은 약사의 일생을 떠올려 보았다. 그 늙은이라면 약국 손님에게 나가는 비닐봉지 한 장도 아까워할 것 같았다. 하긴, 약국의 비닐봉지는 제약회사에서 영업을 위해 모두 공짜로 주는 것이니 아까울 것도 없겠구먼. 중기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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