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두치(咽頭齒) 10


  "음, 그러니까 이건 실패한 소설 같아요."

  중기는 문득 오늘 소설 수업 시간의 합평을 생각하고는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중기의 소설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나는 송파가 좋아요'를 쓴 송파구 주민, 미자 씨였다.

  "제 소설을 그렇게 읽으셨다니, 흥미롭네요. 어느 부분이 실패했다고 보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송파구 주민 미자 씨는 톤 업 썬크림으로 희게 번들거리는 얼굴에 비해 목은 때가 낀 거 마냥 시커멓게 보였다. 거기에다 60대에 접어든 여자의 목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중기는 그 늙은 여자의 글만 아니라 외모까지도 아주 싫었다. 더더군다나 말도 안 되는 비평을 자신감 있게 늘어놓는 그 뻔뻔함은 더 싫었다.

  "자, 봐봐요. 구만이나 경주나 그냥 가만히 있잖아요. 모름지기 소설의 주인공은 움직여야 한다구요.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언제쯤 뭘 하러 돌아다닐 거냔 말이죠."

  얇고 윤기 없는 입술을 움직이며 여자는 중기의 소설을 마구 깎아내리고 있었다. 아니, 아줌마 소설에서 집 나가버린 개연성은 어쩌구요. 댁이 쓰는 게 소설이야? 그냥 돈 있고 시간 남아도는 강남 아줌마의 우스꽝스러운 수필이지. 하지만 중기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어제저녁에 모기에게 물린 왼쪽 팔꿈치를 벅벅 긁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설, 결말 부분은 생각해 두었습니까?"

  소설가 선생이 중기의 프린트물을 책상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중기에게 그렇게 물었다. 중기는 그 질문에 약간 당황했다. 뭔가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그래, 결말을 쓰기는 해야지. 그런데 그 결말은 아직 중기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글쎄요, 그게 아직..."
  "우선은 결말을 먼저 생각하고 써보세요. 그러면 지금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보일 겁니다."

  기성 작가의 눈이 다르긴 다르구나. 중기는 이제 더는 자신의 소설을 써내지 못하는 작가 선생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중기에게는 저 선생의 소설집이 있었다. 선생이 처음으로 써낸 장편소설이었다.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던 단편소설집에 비해, 선생의 장편소설은 솔직히 별로였다. 그냥 별로가 아니라, 아주 형편없었다. 이야기는 늘어지고, 별다른 주제 의식도 없었다. 그저 분량 채우기에 급급한 소설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중기는 선생의 수업을 들으려고 그 소설책을 샀다. 그리고 선생의 친필 사인을 받았다. 그러고는 그 소설책을 책장에 꽂아놓으며 다짐했다. 나는 저런 소설은 절대로 쓰지 말아야지. 저런 소설을 썼기 때문에 선생은 작가로서 실패했고 잊혀졌다. 그리고 이제는 문화센터 강의와 이런저런 강연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6월이면 이 강의도 끝나네요. 지금까지 써온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다들 궁리들 하세요."

  소설에는 끝이 있다. 중기는 이 소설을 끝낼 수 있을지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이 소설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모호했다. 중년 남자에게 닥친 생의 위기에 매혹될 독자가 과연 있을까? 독자는 커녕 이런 소설을 공모전에 냈을 때, 이걸 끝까지 읽어줄 작가나 평론가도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동시대성이 중요한 거겠죠.  20대 젊은 여성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내면 됩니다. 그런 게 어떻게든 팔리니까요. 그걸 못해서 나도 이 모양이지만."
  "선생님, 그런데 지금도 소설을 쓰고 계십니까?"
  "그럼요. 매일 밤 책상에 앉아있습니다. 나는 밤에 글을 쓰는 게 편해서. 물론 뭔가를 써내는 날은 드뭅니다만."

  중기가 공모전에 낼 소설을 고민한다는 말에 소설가 선생은 그렇게 말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중기는 강의실 문을 나서는 선생의 굽은 등을 바라보았다. 중기는 선생이 왜 아직도 소설을 쓰는지 궁금했다. 선생이 소설을 완성한다고 해도 선생의 책을 내줄 출판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선생의 글이 빛나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선생은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었다. 설마 선생이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닐 터였다. 어쩌면 저런 것이 작가의 숙명인지도 모르겠군. 중기는 혼자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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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9

 

  꿈을 꾸었다. 중기는 어른 둘이 겨우 탈 수 있는 경차 안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창백하고 침울해 보였다. 꿈속에서라도 중기는 아버지는 돌아가신 분이니 저런 얼굴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중기를 바라보는 대신에 그저 앞쪽의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기도 아버지가 말을 거는 것이 무서웠다. 돌아가신 분이 꿈에 보이는 것은 어쨌든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중기는 그 말에 무어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은 손을 잡고서 어딘가를 가고 있었다. 중기는 자신도 차에서 내려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외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중기는 차마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아버지, 저승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중기는 그렇게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저승은 마음에 들어서 사는 곳은 아닐 테지. 전화나 자주 하렴. 분명 아버지의 입은 닫혀 있었지만, 중기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그새 복화술이라도 배운 것일까? 아버지의 얼굴이 점차 희미해지면서 부서지는 하얀 가루처럼 조수석에 내려앉았다. 마침내 아버지가 앉았던 자리에는 빛바랜 은색의 작은 열쇠만 남았다.

  중기는 그 열쇠가 어디에 맞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열쇠는 도무지 써먹을 수 없는 그런 열쇠일지도 모른다. 착하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아버지가 남겨준 것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중기는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마치고 상속받을 재산이 있는지 행정 조회 서비스를 통해 샅샅이 살펴보았다. 본적지의 선산 골짜기에 쓸모없는 70평짜리 땅이 있었다. 이듬해에 나온 그 땅의 재산세 고지서 금액은 12만 8천 원이었다. 

  "수도회에서 이 요양원을 운영하는 것이 많이 어렵습니다."

  전번에 어머니를 보러 갔을 때, 중기는 원장 수녀의 면담 요청을 받았다. 수녀원에서 요양원을 건립할 때, 보증금 예치 방식으로 신청자를 받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조한 금리 때문에 운영이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일부 보증금을 돌려줄 테니, 매월 이용료를 내는 방식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중기는 처음에 예치한 1억에서 돌려받는 5천만 원으로 매달 180만 원이나 되는 돈을 얼마나 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는 얼마나 더 사실까? 주기적으로 기흉(氣胸)으로 고생하는 동생보다 어머니가 더 오래 살 것 같았다.    

  "사람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지만..."

  아버지의 꿈을 꾼 날 저녁에 중기가 분리수거하러 나갔을 때, 영천 아줌마가 중기를 보더니 그렇게 운을 떼었다. 중기는 수선스러운 그 아줌마가 영 마뜩잖았다. 원래대로라면 페트병과 일반 플라스틱을 정확히 구분해서 수거함에 넣었을 텐데, 그냥 얼른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대충 던져넣었다. 그런 중기를 보면서 영천댁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글쎄 5년을 누워만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숨이 넘어갔다지 뭐요. 그 양반 혼자서 애들 키우기 힘드니 뭐 나라에서 무슨 혜택이라도 받았나 봐. 시흥의 17평 임대 아파트가 거저 떨어진 거야. 죽은 마누라가 남편과 애들 살렸지."
 
  중기는 방짜 유기를 들고 어두운 복도에 서 있었던 박 차장의 음울한 얼굴을 떠올렸다.

  "방짜 유기인지 뭔지 팔러왔었는데, 공무원 선생네도 찾아갔을까?"

  영천댁이 중기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중기는 눈을 마주치기 싫어서, 맥주캔을 손에 넣고 천천히 아귀힘을 주며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딱 봐도 바가지 씌우는 게 분명해서 난 안 사줬거든. 그런데 이젠 뭐 그런 장사 안 해도 된다 그럽디다. 나라에서 뭔 계약직 일자리도 마련해줬다는 거야. 나 원 참. 그 뭐냐, 속담에도 있잖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어쨌든 팔리지도 않는 방짜 유기 장사도 끝이지." 

  사람의 죽음을 유용함으로 평가하는 것은 뭔가 내키지 않지만, 분명 박 차장 아내의 죽음은 그 가족에게는 쓸모가 있었다. 일주일 후에 중기는 작은 용달차 인부들이 박 차장네의 빈한한 살림살이를 차에다 꽉꽉 욱여넣는 것을 보았다. 토요일 오후였다. 중기는 여느 토요일처럼 맥 빠지는 소설 창작 강의를 듣고 오던 길이었다. 박 차장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희어지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중기는 약간의 소름마저 돋았다. 중기는 아주 잠깐, 저 남자가 어쩌면 아내의 죽음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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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8


  '이것 좀 봐봐. 어제 보니까, 왼쪽 손목에 이게 생긴 거야. 수포처럼 오돌토돌한데, 좀 가렵기도 하고. 두 군데 생겼어. 그것도 왼쪽만.'
  '올려주신 사진을 검토해 본 결과, 화폐상 습진으로 보입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하거나, 어떤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닿아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 이게 청소일 하면서 락스를 좀 많이 써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원인을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도 피부 질환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경주는 Gemini가 언급한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가시처럼 손톱에 콱, 하고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도무지 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처음에 남편을 보며 안쓰러웠던 감정이 조금씩 증오와 분노, 경멸이 뒤섞여 단단한 공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경주는 습진이 생긴 왼쪽 손등을 벅벅 긁다가, 자신도 모르게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소파에서 졸고 있는 남편이 커다란 애벌레 같았다. 그 애벌레는 소파에서 집을 짓고서 먹고 잤다. 남편이 늘 보는 뉴스 채널의 소리도 아주 듣기 싫었다. 지루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져있었다.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협상 소식을 경주는 날마다 들어야 했다. 

  중기는 경주가 구만에게 언제쯤 화를 낼지 가늠해 보았다. 경주의 왼쪽 손등은 군데군데 터져있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일을 해도 물이 손에 닿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중기는 자신이라면 경주처럼 저렇게 몸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원체 약골인 중기는 자신이 그런 일을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며칠만 해도 그냥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중기는 어젯밤 늦게 통조림 택배를 받았다. 배송 예정 시간은 오후 5시였지만, 중기가 문 앞에서 툭, 하며 상자가 던져지는 소리를 들은 것은 자정이 되기 5분 전이었다. 새로 바뀐 택배기사는 여자였는데, 아마도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그렇게 배송 시간이 늦어지곤 했다. 신소미. 배송 기사의 이름이 찍힌 운송장을 뜯어내며, 중기는 먹고 산다는 것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저 여자 택배기사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갈 것이다.  

  33%. 휴대폰의 배터리 잔량을 보고, 중기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중기가 휴대폰을 충전하고 있을 때, 경주도 잔량이 25퍼센트인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낮에 일하는 동안에는 휴대폰을 들여다볼 시간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에 이어폰으로 듣는 오디오북이 배터리를 빨리 닳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경주가 듣는 오디오북은 늘 추리 소설이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은 범인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경주는 아파트 청소를 하는 동안에 범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계속 생각해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니, 재미라기 보다는 경주에게는 나름대로 노동의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기도 했다. 경주는 매일 화단으로 서너 개씩 담배꽁초를 내던지는 입주민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오디오북 속의 살인범은 현실의 담배꽁초 투기범으로 변모했다.

  중기는 경주가 출퇴근 시간에 오디오북으로 추리소설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중기는 경주를 '아파트 청소일을 하게 되었다'까지만 설정해 놓았을 뿐, 경주의 하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중기에게 이 소설은 방전된 상태에서 꾸역꾸역 써내는 일기 같았다. 구만은 애벌레처럼 소파에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있었고, 경주는 무기력하게 그런 남편을 바라보았다. 물론 중기는 작가로서 자신이 과연 그들의 삶에 무슨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들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계속 고민은 하고 있었다. 

  "그런 게 있잖아요. 소설을 쓰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막 살아서 움직인다니까요. 어느 순간에는 자기들이 혼자 말을 시작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해요. 그럼 또 나는 그걸 정신없이 받아서 써내고 있단 말이죠."

  그 말은 중기가 주말에 듣는 문화센터 소설 창작 강의 시간에 늙은 수강생 아줌마가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몇몇 수강생들이 짐짓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기는 자신이 쓴 소설에서 인물들이 그런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별로 기억나질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가만히 있을 때가 많아서, 중기는 그들을 끌고 이리저리 다녔다. 그런 때가 있기는 했다. 인물들이 하고 싶은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빼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썼다.

  "그렇지요. 모름지기 좋은 작가란, 그런 인물의 목소리를 잘 듣고 써내는 사람입니다."

  소설가 선생은 그 수강생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난 좋은 작가는 아닌 모양이군. 중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중년의 소설가 선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때는 촉망받는 소설가였던 선생은 이제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과거에 그가 써냈던 소설은 이제 문화센터와 백화점, 도서관들을 돌면서 강의할 수 있는 생계의 밑천일 뿐이었다. 중기가 생각하기에 선생이 소설을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선생은 수강생들이 써온 소설들에 웬만해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중기의 단편을 읽고 선생이 하는 소리는 매번 똑같았다.

  "디테일이 부족해요, 디테일이."

  물론 수강생 중에서 디테일이 부족한 사람은 중기 혼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등장인물이 살아서 움직인다고 말했던 늙은 아줌마의 소설은 결국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였을 뿐이다. 1970년대 코딱지만 한 잠실 아파트를 분양받아 송파구의 주민으로 뿌리를 내리며 살아온 여자의 짧은 일대기. 그 소설의 제목은 '나는 송파가 좋아요'였다. 중기는 그 소설, 아니 자전적 이야기에 담긴 지독한 속물근성을 내심 비웃었다. 그럼에도 송파구의 38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 수강생 아줌마와 강서구의 원룸 빌라에 거주하고 있는 자신의 계층적 간극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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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7

 
  중기가 구만의 푹 꺼진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 중기의 집 초인종이 짧게 2번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10분이었다. 도대체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중기는 지직거리는 인터폰의 흑백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주인 영감은 20년도 더 지난 것 같은 낡은 인터폰도 교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폰의 화면은 흑백이었다. 화면 속에는 둥근 얼굴에 M자 탈모가 오기 시작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5층의 쌍둥이 아빠였다.

  "주무관 선생,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아니, 차장님이 웬일로 이 시간에..."
  "저기, 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중기가 현관문을 열어주자, 쌍둥이 아빠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중기는 그를 차장님이라고 불렀는데, 그건 그가 전에 다녔던 마을금고에서의 직책이 차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차장이 아니었다. 횡령으로 잘렸기 때문이다. 금고 측에서 고발까지 하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기껏해야 몇천만 원 아닐까? 중기는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오죽 먹고 살기 힘들면 그랬겠어? 애들 엄마는 식물인간으로 누워있지, 애 둘은 어떻게든 키워야지. 2층의 수선스러운 영천 아줌마가 중기가 분리수거할 때, 옆에서 주절주절 쌍둥이 아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공금에 손을 대는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중기가 그 말을 들은 것도 벌써 석 달이나 지났다.

  "이것 좀 하나 봐주구려."

  쌍둥이 아빠 박 차장은, 아니 차장이었던 남자는 흰색의 뻣뻣한 쇼핑백에서 기다란 직사각형 나무통을 꺼냈다. 통의 겉면에는 검정색 붓글씨로 '명품 방짜유기'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나무 상자의 위 뚜껑을 열어서 그 안에 든 반짝거리는 수저 한 벌을 보여주었다.

  "이게 인간문화재 김선재 선생이 만든 유기인데, 정말 귀한 거라서. 주무관 선생이라면 이런 귀한 걸 알아봐 줄 것 같기도 하고."

  센서등이 나간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남자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쌍둥이 아빠는 요새 방짜유기 그릇을 팔러 다니는 모양이었다. 중기는 일요일 저녁의 늦은 시간, 그걸 들고 벨을 누른 남자의 청을 내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나쯤 있어도 좋은 물건이네요. 얼마나 하는지..."
  "이게 원래 50만 원 받는 건데, 내가 주무관 선생한테는 그리 받을 수는 없고..."

  쌍둥이 아빠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30만 원에 해드리리다."

  중기는 수저 한 벌에 30만 원을 달라는 남자의 말에 기가 찼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문을 닫고 남자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어깨에는 식물인간이 된 아내와 두 쌍둥이 딸이 있었다. 중기는 다음주에 있을 구청 직원의 결혼식 축의금으로 찾아놓은 현금을 떠올렸다. 

  "차장님, 나도 지금 가진 돈이 이것 뿐이라. 20만 원밖에 없는데, 괜찮겠어요?"

  중기의 말에 쌍둥이 아빠의 구겨진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닫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성급히 쇼핑백에 나무상자를 넣었다. 그러고는 중기가 건넨 20만 원을 건네받고는 휘적휘적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쌍둥이 아빠가 가고 난 뒤에, 중기는 그가 건넨 방짜유기를 비로소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숟가락의 손잡이 뒷면에는 '선재 유기'라는 각인이 봉황새의 문양과 함께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봉황새라니, 임금이 쓰는 수저를 흉내라도 냈단 말인가? 중기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건 별로 쓸모도 없는 장식품일 뿐이다. 중기는 자신이 건넨 그 20만 원이 병원에서 7년째 누워있다는 차장의 부인 병원비와 그 쌍둥이 딸의 간식값으로 흘러가는 상상을 했다. 오죽 먹고 살기 힘들면 그랬겠어? 2층 영천 아줌마의 말이 이상하게 중기의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중기는 문득 구만에게 방짜유기 영업을 시켜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구만은 물건이란 걸 팔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인사팀에서 일했던 구만이 아는 건 인력 채용과 이동에 관한 제반 업무였다. 최근 몇 년 동안 구만을 힘들게 했던 것은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과 관련된 크고 작은 소송이었다. 구만이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직원 간에 물고 늘어지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구만은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이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는 일 같다는 생각마저 할 정도였다. 그래서 구만은 회사를 나오게 되었을 때, 어떤 면에서 후련하기도 했다. 증거랍시고 제출된 시답잖은 녹취 파일과 이메일 내역을 매일 눈이 빠지게 검토하는 건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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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치(咽頭齒) 6


  "그러니까, 불친절한 글을 써야지."

  여주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중기는 진이 빠진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chat GPT의 말대로 자신의 소설은 설명이 많은, 친절한 글이었다. 친절한 글은 재미도 없고, 매력도 없다. 불친절하고 까칠해져야지. 그런 글을 써야지. 그런데 중기는 불친절한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대화를 짧게 줄일 것인지, 인물의 행동에 설명도 안 하고 그냥 그 행동들을 마구 늘어놓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우선은 구만을 그대로 주저앉힐지, 아니면 일으켜 세울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심장의 혈관에 스텐트 2개를 넣은 이 중년의 남자는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까?

  중기는 푹 꺼진 15년 된 물소 가죽 소파에 앉아있는 구만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점심을 라면으로 먹은 구만은 입을 벌리고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중기가 보기에 구만은 한심하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다. 가족을 위해 그저 열심히 일한 가장으로서의 구만은 참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퇴직 후에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그저 집에서만 지내는 이 구만이라는 인물은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누라는 아파트 청소일까지 다니고 있는데, 중기는 어떤 단무지가 꼬들꼬들하게 맛있는지를 검색하고 있었다.

  중기는 구만의 등짝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가도, 불안하게 뛰는 구만의 심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아픈 건 사실이잖아. 중기는 구만이 다시는 사회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작가로서 분명히 자신에게는 구만을 집 밖의 세상으로 밀어낼 힘이 있었다. 하지만 중기는 자신이 구만을 움직인다고 해도, 구만은 부메랑처럼 다시 푹 꺼진 소파의 자리로 돌아올 것 같았다.

  구만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중기는 구만이 앉았던 소파에 앉아 보았다. 검정색의 물소 가죽 소파는 군데군데 터진 자국이 보였다. 중기는 자신의 원룸에 있는 낡은 가죽 소파와 그 소파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색깔이었다. 중기의 소파는 갈색이었다. 구만은 화장실에서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배경음악처럼 들리는 케이블 TV의 뉴스 채널에서는 전쟁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이란과 미국의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란과 미국 모두 버티기 모드에 들어간 것이죠. 과연 이 치킨 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협상이 난항에 부딪힌 상황에서 유가는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구만이 전쟁과 별 상관없다고 생각한 라면값이 오르게 될 터였다. 석유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이다. 그 동력의 흐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모든 것의 비용이 다 오를 것이다. 구만이 매일 먹는 라면, 단무지, 전기, 가스, 관리비, 구만을 둘러싼 세계의 모든 것이. 그런데도 구만은 다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중기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구만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구만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도대체 어쩔 셈인가, 저 사람은. 중기는 구만의 좁은 어깨를 마구 흔들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하지만 심장이 좋지 않은 구만에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중기는 구만이 앉을 수 있도록 소파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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