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조란학(O, Collecting Eggs Despite the Times, 2021)
핌 즈비어르(Pim Zwier), 84분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진화칭(Jin Huaqing), 85분



1. 새알 연구자의 복원된 삶: 시간의 조란학(2021)

  조란학(oology)는 조류학에서 뻗어나온 학문이다. 새의 알과 둥지, 번식의 생태적 환경이 연구 주제가 된다. 지금은 새알 채취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학문의 존재 근거는 다소 희미해졌다. Max Schönwetter(1874–1961)는 그 조란학의 개요서를 쓴 독일 학자이다. 다큐 '시간의 조란학'은 쉔베터가 쓴 편지를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쉔베터가 지나온 나치 독일 시기와 전쟁의 기억도 포함된다. 당시 독일의 상황을 보여주는 다양한 아카이브 필름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한 연구자의 지난했던 삶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

  나는 처음엔 이 다큐를 볼 생각이 별로 없었다. 시놉시스만 보았을 때에는 새알 연구자의 생애가 무어 그리 볼 게 있겠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 다큐는 놀라운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내레이션으로 나오는 쉔베터와 지인들의 편지글에는 학문 연구에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 당시 새알을 연구하는 이들은 학자라기 보다는 수집가의 영역에 머물렀다. 쉔베터는 새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새알'이라는 분야로 확장시켰다. 비교적 부유했던 그는 자주 여행을 다니면서 새알을 수집했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서 관리했다. 그의 새알 컬렉션이 쌓이는 동안 바깥 세상은 점차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했고 독일은 전쟁의 광풍에 휩싸였다.

  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새알 연구자는 전장터에 가서도 새알을 모으러 다녔다. 독일이 핀란드를 침공했을 때, 쉔베터도 그곳에 있었다. 그가 쓴 편지글에서는 핀란드의 숲속에서 진귀한 새알을 구하게 된 기쁨이 드러난다. 아니, 세상이 미쳐돌아가는 판국에도 새알을 수집하는 일 따위에 그토록 마음을 쓰는 것은 온당한가?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전쟁의 여파는 쉔베터에게도 미쳤다. 자식이 죽었고, 폭격으로 집이 불탔다. 공습으로 죽을뻔한 위기도 겪었다. 그가 모아온 새알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는 새알 연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편지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쉔베터의 새알에 대한 관심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돈과 명예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좋아서 할 뿐인 새알 연구를 하나의 의미있는 체계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조란학 개요서를 쓰기로 결심한다. 끊임없이 동료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자문을 구하면서 쉔베터는 책을 써내려갔다. 그러는 사이 나치 독일은 패망했고, 그가 사는 곳은 동독이 되었다. 새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쉔베터는 노년의 곤궁함과 마주한다. 지인에게 돈을 부탁하는 글에서 쉔베터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저는 이제는 가난하고 늙은 노인일 뿐입니다.'

  격동의 독일 현대사 속에 펼쳐지는 어느 조란학자의 삶에는 기쁨과 눈물, 비탄이 들어있다. 아마도 누군가는 65년 동안 새알 연구에 매진한 그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물을지도 모른다. 쉔베터는 필생의 역작인 조란학 개요서를 펴냈다. 그가 남긴 2만 개의 새알 컬렉션은 Halle-Wittenberg 대학 박물관에 남았다. 나에게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그의 컬렉션에는 부서진 새알도 들어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수집품을 온전히 보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서지고 조각난 새알의 파편들을 차마 버리지 못했던 그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거기에는 새알에 매혹된 한 사람의 오래고 고단한 삶이 담겨있다. '시간의 조란학'은 잊혀진 새알 연구자의 삶을 역사의 색을 입혀 옴스라니 복원해낸다.          


2. 수행자로 살아간다는 것: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야칭스(Yarchen Gar)는 티베트 자치주의 해발 4000m 계곡에 자리한 수행자 공동체 마을이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 따라 수행하는 비구니들이 한때는 1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다큐 '다크 레드 포레스트'는 그 야칭스 비구니들의 삶을 담아냈다. 내레이션이 배제된 이 다큐는 비구니들의 삶을 온전히 보여준다. 혹독한 겨울, 겨우 몸 하나 들어갈 비좁은 개인 움막을 짓고 비구니들은 치열하게 정진한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불법(佛法)과 스승의 가르침 뿐이다. 내면의 부름을 따라서 야칭스에 온 이들은 수행자로 살다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다. 그렇게 죽은 수행자의 시신은 독수리들에게 내어주도록 되어 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수행에 힘쓰는 비구니들. 스승은 수행자들의 정진을 끊임없이 격려한다. 다큐 속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지도자 스님은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움을 잃지 않는다. 수행자도 인간이라 몸이 아픈 것은 당연하다. 전통 의술로 치료하는 의사에게 자신의 몸아픈 이야기를 하는 비구니들. 그들을 괴롭히는 온갖 질병은 수행이 육신의 편안함을 거스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복통을 호소하는 젊은 비구니는 무엇을 먹었느냐는 의사의 말에 명절 분위기에 휩쓸려 고기를 먹었다고 고백한다. 계율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그 모습은 인간적이다. 때로 속세의 가족은 떨칠 수 없는 걱정거리이기도 하다. 수행자들은 점을 칠 줄 아는 비구니를 찾아가 가족과 지인의 어려움을 해결할 방도를 찾기도 한다.

  '다크 레드 포레스트'를 보는 일은 관객에게도 일종의 명상적 체험처럼 느껴진다. 붉은 모자를 쓰고 두터운 붉은색 가사를 두른 수행자들은 세속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것을 찾고 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자아는 무엇이며 깨닫는 주체는 누구인가? 비구니들은 그런 존재론적인 물음의 답을 탐구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여정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명징한 목소리로 발표하는 어린 비구니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받는다. 노년의 비구니는 스승 앞에서 수행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평화롭게 이어질 것만 같았던 야칭스의 삶은 중국 당국의 정책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2019년, 중국 정부는 야칭스의 비구니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야칭스가 티베트 독립 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 2017년부터 점진적으로 가해진 정부의 압력은 2019년에 이르러 야칭스 수행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졌다. 다큐에는 그러한 상황에서 혼란과 어려움을 겪는 비구니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들은 과연 세속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수행만이 전부였던 비구니들은 그렇게 야칭스를 떠나야만 했다. 

  다큐의 마지막, 야칭스의 겨울 고원에서 보았던 수행자의 움막집이 어느 계곡에 점점이 박혀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야칭스를 떠난 수행자들이 더 험한 오지에 자신들의 공동체를 꾸린듯 하다. 깨달음을 향한 비구니들의 열망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혹독한 겨울에 계곡의 동물들이 굶어죽을까봐 먹을 것을 챙기는 수행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수행자가 되고 싶어요."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이 되어가고 있다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그런 수행자들의 기도 덕분일 것이다.

 
*사진 출처: eidf.co.kr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2019년 중국 정부에 의해 해체되기 이전의 야칭스의 모습. 중국 당국은 그곳에 대규모 호텔과 숙박 업소를 지어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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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Antonio Bardem의 두 편의 영화:

자전거 주자의 죽음(1955)

메인 스트리트(1956)



*이 글에는 두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1. 좌절된 로맨스에 투영된 독재 정권의 현실: 자전거 주자의 죽음(Muerte de un ciclista, 1955)

  영화를 목숨 걸고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페인의 영화 감독 Juan Antonio Bardem(1922-2002)의 삶이 그러했다. 투쟁적 성향의 그는 독재자 프랑코가 지배하던 엄혹한 시절과 불화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혹독한 검열로 잘려나가서 누더기가 되는 꼴을 봐야했다.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감독은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스페인에서 영화 만드는 일이 어렵게 되자 해외 합작 영화로 창작의 활로를 열었다. 검열의 마수를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불균일한 작품성의 영화들로 채워진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 초기작에 해당하는 '자전거 주자의 죽음(Death of a Cyclist, 1955)''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 1956)'는 유독 반짝거린다.

  '자전거 주자의 죽음'은 자동차 사고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는 연인과 짧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사고를 낸다. 자전거 탄 사람을 친 것이다. 동승한 남자가 확인해 보니, 차에 치인 사람은 살아있는 상태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그냥 가자고 재촉한다. 그렇게 그들은 뺑소니를 친다. 여자가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인 마리아는 예전 연인 후안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만약 사건이 알려지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음날 신문 기사에는 자전거 탄 남자의 사망 소식이 실린다. 누군가 그 사고를 목격하지는 않았을까? 마리아와 후안의 마음 속에는 불안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영화는 예기치 않은 사고가 촉발한 긴장과 갈등을 그물처럼 촘촘히 짜내려간다. 마리아는 상류층 파티의 단골 손님인 라파로부터 협박을 받는다. 라파는 미술 비평가라는 허울좋은 직함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부르주아에게 빌붙어 기생하는 식객이나 다름없다. 그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지독한 계층적 증오심을 드러낸다. "너희들 따까리 노릇하는 거 신물이 난다구. 이참에 나도 한몫 차지해야지." 마리아가 협잡꾼 라파에게 시달리는 동안 후안도 곤경에 처한다. 대학 교수인 그는 사건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여학생을 시험에서 부당하게 탈락시켜버린다. 학생들은 후안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인다.

  바르뎀은 계층 문제와 스페인의 정치적 현실을 로맨스에 투사한다. 마리아가 사고로 죽게 만든 사람은 매우 가난한 남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안의 죄책감은 커져만 간다. 그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젊은 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때는 사회 개혁의 열정으로 불탔던 남자는 타락한 중년의 부르주아가 되어 있었다. 후안은 자신의 삶을 정화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는 마리아에게 함께 자수하자고 말한다. 과연 마리아는 후안의 제안에 동의할까?

  후안과 마리아의 비극적 최후는 좌절된 로맨스인 동시에 스페인의 현실에 대한 은유적 비판이다. 순수한 사랑과 도덕적 삶을 복원하려는 후안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프랑코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지배 계급의 진정한 내적 각성과 변화는 불가능하다. 독재 권력과 결탁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에만 급급할 뿐이다. 공산주의자로서 바르뎀은 마리아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내비친다. 한밤중에 과속으로 운전하던 여자는 자전거를 피하려다 강물에 추락한다. 부르주아의 윤리적 과오는 그렇게 처벌받는다.     


2. 세련된 정치적 수사학: 메인 스트리트(Calle Mayor, 1956)

  로맨스를 현실 정치와 엮는 바르뎀의 솜씨는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 1956)'에서도 빛난다. 스페인의 어느 소도시, 35살 모태 솔로 노처녀 이사벨은 운명적 사랑을 기다린다. 그런 이사벨에게 어느 날, 잘생긴 연하의 신문 기자 후안이 사랑을 고백한다. 그는 이사벨에게 결혼도 약속한다. 하지만 사랑의 기쁨은 얼마가지 못한다. 후안의 착한 친구 페데리코는 이사벨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마을의 건달들이 후안을 이용해 이사벨을 놀림거리로 만들기로 했다는 것. 이사벨은 절망에 빠진다.

  '자전거 주자의 죽음'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빋은 바르뎀은 자신에 대한 정부의 검열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그다지 정치색이 느껴지지 않는다. 바르뎀은 지방 소도시의 억압적 분위기를 통해 프랑코 독재를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영화 속 가상의 소도시는 개인의 온전한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 아니다. 계층적 차별과 분리가 견고하게 작동하는 그곳에서 주민들은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후안에게 버림받은 이사벨이 마주하게될 오욕의 미래는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 죽음과도 같다. 그러므로 페데리코는 이사벨에게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사벨은 마드리드행 기차에 오르지 않는다. 페데리코는 이사벨에게 간절히 당부한다. "어떻게든 꼭 살아야 해요!" 역에서 돌아오는 길, 비를 맞으며 이사벨은 도시의 메인 스트리트를 걷는다. 마을 건달들은 그런 이사벨을 비웃는다. 바르뎀은 창문 앞에 서있는 이사벨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를 끝낸다. 이사벨은 분명히 울고 있지 않다. 하지만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물은 마치 이사벨의 눈물처럼 보인다. 그러한 이사벨의 모습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국민들이 감내해야하는 수치심과 고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은 견디고 살아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독재 정권은 영화의 정치적 수사학을 강화시킨다.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의 이 두 영화에는 독재자 프랑코가 스페인 영화사에 드리운 음울한 유산이 들어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picuki.com


'Main Street(1956)'의 주연을 맡은 이는 미국 여배우 베시 블레어(Betsy Blair)이다. 블레어는 매카시즘 광풍 속에 헐리우드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 한동안 활동을 쉬었다. 이 영화는 블레어가 다시 연기를 재개할 무렵에 찍었다. 블레어의 원숙하고 절제된 연기는 이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사진 출처: encadenados.org

 


****스페인 영화의 과거와 현재

빅토르 에리세의 El Sur(198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el-sur-1983.html

훌리오 메뎀의 Vacas(Cows, 199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vacascows-1991.html

아말리아 울만의 El Planeta(202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amalia-ulman-el-planeta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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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서있다. 정부 관료인 남편은 미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함께 떠날 예정인 부부에게는 반가운 아기 소식도 있다. 그런데 그 여자 유미코의 행복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남편은 불운한 자동차 사고로 숨을 거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자는 아기도 잃는다. 남편을 죽게 만든 사고의 가해자는 평범한 회사원 미시마. 자동차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였다. 남자는 무죄를 선고받는다. 비록 법적인 책임은 면했지만, 남자는 속죄의 의미로 매달 일정한 금액을 미망인에게 송금한다. 어떻게 보면 철천지원수 사이의 남녀. 그들은 예기치 못한 사랑의 감정에 빠진다.

  영화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은 나루세 미키오의 유작이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 해에 그가 만든 2편의 영화는 특이하게도 스릴러 영화였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경력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가장 잘 하는 멜로 영화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감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영화는 그의 대표작 '부운(浮雲, Floating Clouds, 1955)'이었다.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고 원했지만 여자는 결국 영락한 신세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뜬구름같은 사랑의 부질없음과 아픔을 그려낸 '부운'의 흔적은 '흐트러진 구름'에서도 감지된다.

  '부운'의 남녀 주인공 토미오카와 유키코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장소는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밀림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국의 숲을 몽롱한 꿈속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곳에서 유부남인 남자는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여자는 불확실한 사랑의 미래에 자신을 던진다. '흐트러진 구름'에서도 그와 비슷한 장소가 나온다. 사별 후,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경제적 어려움과 남자들의 추근거림에 시달린 유미코는 고향으로 내려온다. 사고 때문에 좌천을 당한 미시마가 머물게 된 곳도 그 근처이다. 둘은 우연한 만남을 거듭하며 서로에게 끌린다. 그들이 비로소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게 된 곳은 유미코가 허브를 채취하는 숲속이다. '부운'의 인도네시아 밀림이 망각과 사랑의 장소였던 것처럼, 유미코와 미시마가 있게 된 숲속도 그들을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분리시킨다.

  나루세 미키오는 그 사랑의 행로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서서히 펼쳐서 보여준다. 유미코는 미시마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시마와 함께 하기 위해 떠나는 길, 그들은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게 된다. 구급차가 사고를 당한 남자를 싣고 나오고, 여자는 절규한다. 유미코와 미시마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강과 같은 상흔의 기억은 그렇게 재현된다. 고통스러운 과거는 결코 망각될 수 없으며, 그들이 함께하는 한 언제고 그것을 떠올리게 될 터였다. 이 비극적 로맨스는 일견 개인적 차원의 파국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인 함의를 지닌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부운'의 유키코와 토미오카의 사랑에는 꿈처럼 사라져버린 일본 제국주의의 전성기가 겹쳐있다. '흐트러진 구름'은 그 연장선상에서 전후 일본 사회에 내재된 상실과 트라우마에 대한 비관주의적 통찰을 보여준다. 일본의 침략 전쟁은 동아시아 식민지 국가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내면에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일본 국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군국주의에 협력한 동조자였다. 동시에 그들 자신은 전쟁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그들이 감내해야하는 죄책감과 상실감은 여전히 집단 무의식의 차원에 자리한다. 전후의 고도 경제 발전이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는 단지 그 상흔을 가려버렸을 뿐이다. 

  '흐트러진 구름'의 유미코와 미시마의 불가능한 사랑의 행로는 전후 일본 사회의 내재화된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고통스런 과거를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기 보다는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멀리 떨어지는 것을 택한다. 그것은 일본이 보여준 전후 역사적 책임에 대한 회피적 행태와도 맞닿아 있다. 나루세 미키오는 유작에서 자신이 동시대 일본 사회에 대한 통찰을 놓치지 않았음을 증명해낸다. 그는 여성의 삶에 대한 세밀한 관찰자로서 여성들을 둘러싼 시대의 저류를 영화 속에 흐르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렇게 감독이 살아온 시대와 만난다. 거기에는 전쟁과 여성, 가족의 삶에 대한 사실주의적 초상이 담겨 있다. '흐트러진 구름'은 나루세 미키오가 걸어온 그 영화적 여정에 어울리는 마침표인 셈이다.


*사진 출처: photogenie.be



**나루세 미키오 영화 리뷰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Conduct Report on Professor Ishinaka, 195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conduct-report-on-professor-ishinaka.html

긴자 화장(Ginza Cosmetics, 195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ginza-cosmetics-1951.html

엄마(Mother, 195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mother-1952.html

오누이(Older Brother, Younger Sister,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older-brother-younger-sister-1953.html

아내(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late-chrysanthemums-1954.html

산의 소리(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1954.html

흐르다(Flowing,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아내의 마음(A Wife's Heart,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wifes-heart-1956.html

야성의 여인(Untamed Woman,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untamed-1957.html

안즈코(Anzukko,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권적운(Summer Clouds, Iwashigumo,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summer-clouds-1958.html

내 마음의 휘파람(Whistling in Kotan,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1959.html

가을이 올 때(Autumn Has Already Started,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pproach-of-autumn-1960.html

딸, 아내, 어머니(Daughters, Wives and a Mother,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daughters-wives-and-mother-1960.html

여자의 자리(A Woman's Place, 196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place-1962.html

여자의 역사(A Woman's Life,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life-1963.html

뺑소니(Hit and Run, 196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hit-and-run-1966.html 

여자 안의 타인(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stranger-within-woman-1966-juste-avan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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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안의 타인(女の中にいる他人, 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나루세 미키오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Just Before Nightfall, 1971), 클로드 샤브롤


원작 소설: Edward Atiyah, The Thin Line(1951) 



  1966년은 나루세 미키오에게 '스릴러의 해'였다. '여자 안의 타인(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뺑소니(Hit and Run, 1966)'는 이전까지의 나루세 미키오와는 전혀 다른 영화적 궤적을 보여준다. '뺑소니'는 스릴러의 틀 안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다. 이와는 달리 '여자 안의 타인'에서는 주인공이 남성이다. 치정 살인 사건에 연루된 남자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음울한 결말까지 더해져 영화는 무겁기 짝이 없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레바논 출신의 작가 Edward Atiyah'The Thin Line(1951)'을 각색한 것으로, 이 소설을 가지고 Claude Chabrol도 영화를 만들었다.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1971)'가 그것이다. 전자책으로는 원작 소설이 나온 것이 없어서, 대신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보고 원작의 세부적 내용을 추측해 볼 수 밖에 없었다. 두 영화에는 서로 다른 감독의 스타일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간극이 존재한다.

  클로드 샤브롤은 남자 주인공 샤를이 불륜 관계에 있는 여자를 죽이게 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변태적 욕망에 휩싸인 남자는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가 죽인 여자는 친구 프랑수아의 아내이다. 클로드 샤브롤과는 달리 나루세 미키오는 살인 장면을 나중에 플래시백으로 제시한다. '여자 안의 타인'의 도입부 쇼트에는 길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자꾸만 뒤를 쳐다보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도로를 걷는 남자를 사선 구도에 두고 따라간다. 몇 걸음 걷던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어 피운다. 이 남자 이사오에게 무언가 안좋은 일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이 짧은 쇼트가 내뿜는 불길함을 우리는 잘 알려진 미술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절규(The Scream)'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러한 사선 구도를 이 영화에서 또 다시 보여준다. 죽은 여자 사유리의 친구는 장례식장에서 이사오를 발견하고 의심을 품는다. 자신이 얼핏 봤던 사유리의 애인이 이사오와 비슷했던 것. 그래서 여자는 사유리의 남편 스기모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찾아간다. 그런데 스기모토는 이사오가 20년 넘게 알고 지내온 절친인데 그럴 리가 없다며 일축한다. 스기모토가 아내의 친구를 배웅하는 장면에서도 사선 구도에 두 인물이 서있다. 여자는 모자를 쓴 어떤 남자가 옆을 지나가자 흠칫 놀란다. 남자의 외모가 이사오를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탁 트인 대로변에서도 사선 구도 속의 인물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느낌을 준다.

  이 영화에서 나루세 미키오는 인물들의 흔들리는 내면을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회화적 이미지를 차용한다. 경찰의 수사는 난항에 부딪혀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 주인공 이사오는 점차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마주하게 된다. 남자는 아내에게 불륜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천둥 번개가 치는 밤, 갑자기 집안의 전등이 나가고 아내는 촛불을 켠다. 그 순간, 이사오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촛불을 든 아내가 놀라움으로 서성일 때, 남자는 어둠 속에 잠겨있다. 이 장면은 촛불의 화가로 불리는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의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직까지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신경쇠약에 걸린 이사오는 온천장에서 잠시 머무르고, 마사코는 남편을 보러 간다. 부부가 온천 근처를 산책할 때 이사오는 계곡에 떨어져 죽은 남자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 죽음의 선명한 이미지가 이사오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곳을 지나쳐온 부부가 터널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내 이사오는 숨겨왔던 자신의 일탈적 욕망과 범죄에 대해 아내에게 털어놓는다. 역시 사선 구도로 찍힌 터널 시퀀스에서 부부를 감싸는 어둠은 그들이 마주하게된 진실의 무서운 심연처럼 보인다.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 마사코의 삶은 이제 그 심연 속으로 사라질 터였다.

  이 낯선 스릴러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에게 무언가 잘 맞지 않는 옷처럼 보인다. 살인을 저지른 이사오의 내적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 또한 썩 그리 매끄럽지 않다.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가 주춤거린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샤브롤은 인물들을 부유한 중산층으로 설정하고, 촬영 세트 또한 화려한 고급 주택을 배경으로 찍었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부르주아의 도덕적인 타락과 그것을 철저히 은폐하려는 계층적 욕망을 묘사한다. 주인공 샤를은 친구 프랑수아에게 자신의 범죄를 고백한다. 하지만 프랑수아는 자신의 아내를 죽인 샤를에게 놀라운 평정심과 관대함을 보인다. '여자 안의 타인'에서 스기모토가 이사오의 고백을 듣고 뺨을 후려치는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스기모토도 나중에는 이사오를 용서하기는 한다.

  클로드 샤브롤은 죄책감을 계급 의식과 긴밀히 결합시킨다. 샤를이 운영하는 광고 회사에서 일어난 범죄는 그것을 좀 더 명확히 드러낸다. 10년 넘게 일해온 늙은 회계 담당자는 거액의 회사 돈을 챙겨 달아난다. 그 남자가 횡령을 저지른 이유는 젊은 여자 때문이었다. 샤를은 결국 경찰에 잡힌 직원에게 왜 그런 일을 저질렀냐고 묻는다. 그러자 남자는 샤를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늙은 직원의 추악한 모습은 샤를에게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그 남자가 욕망과 범죄를 솔직하게 드러낸 것과는 달리 샤를을 둘러싼 견고한 계급적 세계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친구 프랑수아와 샤를의 아내는 샤를에게 모든 것을 잊으라며 안온한 부르주아의 세계에 머물 것을 요청한다.

  원작 소설의 제목 'The Thin Line'은 영화의 주인공 이사오에게는 넘지 말아야 될 선(線), 즉 범죄에의 유혹을 의미한다. 그 선을 넘은 남자는 결국 아내의 손에 의해 영원한 잠에 빠진다. 어떤 면에서 나루세 미키오에게 '여자 안의 타인'은 자신의 영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작업이었다. 그것을 넘어선 노감독은 특이하게 구부러진 길을 만들어 낸다. 이 영화를 짓누르는 죽음과 불안의 기운은 감독 자신의 내면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듬해 '흐트러진 구름(Scattered Clouds, 1967)'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나루세 미키오는 암으로 세상을 떴다. 63세의 나이였다.


*사진 출처: eiga-pop.com



**그림 출처: wikipedia.org

Georges de La Tour의 그림
Magdalene with the Smoking Flame


The Newborn Christ



Edvard Munch의 그림
The Scream



***나루세 미키오 영화 '뺑소니(Hit and Run, 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hit-and-run-19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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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다큐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2-hertz whale'이라는 별명이 붙은 고래가 있다. 고래는 종에 따라 특정 주파수 대역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 대부분의 고래들이 내는 소리의 주파수 대역은 40헤르츠 이하인데, 그에 비해 52헤르츠 고래는 상당히 높은 소리를 내었다. 이 고래가 어느 종에 속하는지, 이동하는 경로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1989년 이후로 52헤르츠 고래의 존재는 계속해서 감지되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 Joshua Zeman은 이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그는 '52'를 찾아나서기로 결심했다. 2021년작 다큐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는 바로 그 52헤르츠 고래를 찾는 지난한 여정을 담고 있다.

  다큐는 표면적으로는 '52'의 행방을 찾아나선 연구팀의 여정을 그리면서, 그와 함께 고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훑어 나간다. 19세기에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 사냥이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석유의 발견으로 더이상 고래를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포경 산업은 번성했다. 고래 고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950년대 들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966년에 해양 생물학자가 녹음한 고래의 소리는 음반으로 제작되어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고래를 먹을거리가 아닌 함께 공존해야할 해양 생명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환경 운동과 함께 국제적인 NGO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의 활동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래 무리가 자신들만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고래 소리를 가장 전문적으로 연구한 곳은 미 해군이었다. 냉전시대에 소련 잠수함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다양한 정밀 탐사 장비가 사용되었다. 고래가 내는 노랫소리는 가장 많이 탐지되었다. '52'의 존재도 그렇게 알려졌다. Blue Whale 종이라고만 추측되는 이 고래는 마치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계속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주파수로 소리를 내는 이 생명체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고래는 왜 혼자서, 그토록 높은 주파수의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Joshua Zeman은 52 헤르츠 고래를 찾는 여정을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처럼 풀어나간다. 대양의 무수한 고래들 가운데 특정한 한 마리를 찾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같았다. 그 고래가 이미 죽어버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52'에 매혹된 남자는 탐사를 위한 제작비를 모으러 다녔고, 마침내 해양 생물학자들로 이루어진 탐사팀이 꾸려진다. 그즈음 '52'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고래가 캘리포니아 해안가에서 탐지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52'의 존재를 추적하는 이 다큐는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자연 다큐멘터리에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투영되어있다. 최근작 다큐 'My Octopus Teacher(2020)'의 경우에는 다큐 제작자가 특별한 교감을 나누게 된 문어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직업적 경력과 가족 관계의 어려움에 처한 남자는 어느 문어와의 만남을 통해서 내면의 치유를 경험한다. 사적 다큐멘터리와 자연 다큐멘터리의 이 기묘한 조합은 지나치게 감성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도 그런 면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52'는 소통할 대상이 없이 홀로 높은 소리를 낸다는 사실만으로 가장 외롭고 특별한 고래가 되어버린다. 그 고래가 진짜 외로운지 우리 인간이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52'를 찾아 나서는 이 다큐의 관점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이다.

  결국 탐사팀은 '52'를 찾지 못하고 추적을 끝마친다. 하지만 이 다큐의 마지막에는 작은 반전이 들어있다. '52'가 내었던 소리로 응답하는 두 마리의 고래가 탐지되었다. 고래들은 무리마다 특유의 지역 방언(dialect)을 쓰는데, '52 헤르츠'는 그러한 고래 방언들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그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소 허망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여정에는 무언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진다. 다큐는 거대한 해양 생명체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들의 평화로운 삶을 지켜주어야할 책임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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