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2부
 


2. 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집
 
*이 글에는 영화 '하우스(1977)'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TV의 등장과 보급으로 인한 영화 산업의 침체기는 197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일본의 영화사들은 그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로망 포르노와 야쿠자 영화로 활로를 찾았던 니카츠(Nikkatsu, 日活)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오는 유사한 니카츠 영화들에 관객들은 슬슬 진력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 가족 관객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과 특촬(特撮) 영화가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주력 사업이 되었다. 쇼치쿠(Shochiku, 松竹)는 뜻밖의 노다지를 발견했다.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감독'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 1969–1995)' 연작이 그것이었다.

  불황의 시기에 사람들은 더 안전한 투자를 선호한다. 해외에서 성공한 영화를 베끼는 것도 괜찮은 전략이었다. 1976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록키(Rocky)'는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수익을 냈다. 이 영화를 보고 도에이(東映) 영화사는 비슷한 권투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테라야마 슈지 감독 '복서(ボクサー, The Boxer, 1977)'였다. 도호(東宝)도 빠질 수 없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Jaws, 1975)' 같은 것을 만들어 보자! 그 뜻밖의 결과물은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하우스(ハウス, House, 1977)'였다.

  주인공 여고생
오샤레는 다가올 여름 방학을 설레임으로 기다린다. 해외에 나가있는 아빠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아빠는 딸을 실망시킨다. 딸에게 새엄마가 될 여자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상심한 오샤레는 엄마의 고향 가루이자와에 있는 이모에게 편지를 쓴다. 이모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여름 방학을 보내고 싶다는 것. 이모는 기꺼이 승락의 답장을 보낸다. 틈만 나면 공상하는 습관이 있는 판타(Fantasy), 학구적인 가리(Professor), 운동을 좋아하는 쿵푸(Kung Fu), 사람들에게 친절한 스위트(Sweet),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맥(Mac), 피아노를 잘 치는 멜로디(Melody). 이렇게 6명의 소녀들과 오샤레는 숲속에 자리한 이모의 집(House)에 도착한다.

  할리우드의 식인 상어는 '소녀들을 잡아먹는 집'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앞서 사토 하지메 감독의 '공포의 저택(怪談せむし男, House of Terrors, 1965)'에서 집에 내재된 전후 트라우마를 탐색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오바야시 노부히코도 '집'을 전쟁의 기억과 결부시킨다. 오샤레는 친구들에게 이모의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이모의 약혼자는 학도병으로 징집당한다. 그는 꼭 돌아겠다는 말을 남기지만, 결국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사한 약혼자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로 이모는 그 집에서 늙어갔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이러한 이모의 과거를 몽타주 쇼트로 편집해서 보여준다. 깃발을 흔들며 병사들을 환송하는 마을 주민들, 뉴스릴 화면으로 제시되는 공습과 폭격, 무엇보다 이 쇼트들에서 인상적인 것은 원폭 투하 장면이다. 이 쇼트는 매우 짧아서 주의깊게 보아야만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모의 기억 속에서 전쟁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과 함께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이제 그 집은 소녀들을 과거로의 여행으로 이끈다. 그 여행은 필시 피와 죽음으로 점철될 터였다.

  통통하게 살이 찐 맥을 보며 이모는 '참 맛있게 생겼다'며 입맛을 다신다. 이모의 모든 행동은 수상쩍기 이를 데 없다. 처음 만날 때 휠체어에 앉아있던 이모는 맥이 사라진 후로는 멀쩡히 걸어다닌다. 햇빛을 싫어하고 피부가 무척 하얀 이 이모의 정체는 흡혈귀였다. 살인 피아노에 먹혀버린 멜로디, 매트리스의 공격을 받고 죽어버린 스위트. 그렇게 친구들이 죽음의 집에서 희생되는 동안 주인공 오샤레는 점차 이모의 영혼에 빙의된다. 돌아올 수 없는 약혼자를 속절없이 기다리다 죽어버린 이모는 어린 조카의 몸을 통해 환생하려고 한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살인귀가 되어버린 집이 소녀들을 삼키는 그 모든 과정을 B급 영화적 감성으로 벼려낸다. 토막난 신체는 마구 날아다니며, 집안의 모든 사물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공격한다. 조잡하게 보이는 크로마키(chroma key)를 비롯해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특수 효과는 사실 무섭다기 보다는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우스'가 끈질기게 소환해내는 전쟁의 기억, 그 상흔은 영화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세대 간에 전이되는 정신적 유산과도 같다.

  오샤레는 분명히 이모가 이미 죽은 사람이며, 이모의 영혼이 조카인 자신의 몸을 통해 영생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조카는 이모의 간절한 소망을 받아들인다. 이모가 느꼈던 슬픔과 외로움은 이모의 일기장을 읽게 된 판타와 쿵푸, 가리에게도 전달된다. 전쟁을 겪지 않은 이 소녀들은 그 기억이 각인된 집에 의해 잡아 먹힌다. 어떤 의미에서 소녀들은 집과 하나의 몸이 되는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기모노로 성장(盛裝)을 한 오샤레는 자신을 찾아온 새엄마 료코를 맞이한다. 오샤레, 아니 조카의 몸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게된 이모의 눈이 번득인다.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이 흡혈 저택은 이미 삼켜버린 6명의 소녀들과 함께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나설 참이다. '나는 외로웠다.' 이모의 일기장에는 그 말이 적혀 있었다. 전쟁은 이모의 내면에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을 아로새겼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전쟁 세대의 정신적 외상을 공포 영화라는 장르적 틀에서 성찰한다. 그의 영화 '하우스'에는 감각적이고 키치적인 방식으로 분절된 전후의 트라우마가 감지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 두 사람(ふたり, Chizuko's Younger Sister, 199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chizukos-younger-sister-1991.html

 

***테라야마 슈지(寺山修司) 감독, 복서(ボクサー, The Boxer, 197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boxer-1977.html



****야마다 요지 감독,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

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yamada-yoji-voices.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1부



1. 악령의 집에 구현된 일본 사회의 내면


  여자는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어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여자의 남편 신이치는 정신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의 장례식, 여자는 주치의로부터 남편이 죽기 전에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남편의 얼굴을 보고 돌아서려는데, 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두 눈을 부릅뜬 시신은 무섭기만 하다. 여자는 남편의 입에 꽂아둔 국화꽃을 빼내려 하지만, 단단하게 맞물린 망자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변호사가 여자를 찾아온다. 그리고 남편이 여자에게 남겼다는 별장의 열쇠를 건넨다. 갑자기 미쳐서 정신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던 남편이 언제 그런 별장을 샀단 말인가? 여자는 그 별장에 가보기로 한다.

  별장에는 곧 방문객들이 속속 도착한다. 미망인 요시에, 요시에의 조카 카즈코, 요시에의 삼촌이며 정신 병원 원장인 무네카타 박사, 주치의 야마시타, 야마시타의 여자 친구 아키코, 변호사, 그리고 자신이 요시에 남편의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까지. 그들이 머물게 된 이 별장은 기괴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끼익거리면서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문들, 현관 중앙에 자리한 괴수의 동상, 어디선가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사람을 공격하는 까마귀, 별장의 꼽추 관리인은 유령처럼 이곳저곳에 출몰한다.

  사토 하지메(佐藤肇) 감독의 영화 '공포의 저택(House of Terrors or The Ghost of the Hunchback, 1965)'이 제작될 무렵에 일본 영화계는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TV의 등장은 영화 산업계에 닥친 천재지변과도 같았다. 이제 사람들은 영화관에 가는 대신에 거실의 안락한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것을 택했다. 헐리우드는 TV 화면이 보여줄 수 없는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와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역사극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렇다면 일본의 영화사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사무라이들이 등장하는 시대극(時代劇, じだいげき)과 소시민의 정서에 호소하는 현대극(現代劇)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빠르게 대응한 곳은 니카츠(Nikkatsu, 日活)였다. 니카츠는 태양족 영화, 국경없는 액션 영화,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면 로망 포르노와 야쿠자 영화로 활로를 찾았다. 전통적인 일본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서양 영화의 하위 장르를 모방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그 시기 토에이(東映)에서 제작한 영화 '공포의 저택'은 서구 공포 영화의 플롯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요시에와 방문객들은 곧 별장이 악령이 들린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둘씩 사람이 죽어나가는 가운데 공포는 점차 극대화된다. 서양의 강신술로 영혼을 불러내려는 시도도 실패하고, 접신(接神)을 통해 원혼을 달래려던 무녀(巫女)도 죽는다. 이 영화에서 서구와 일본은 기묘하게 충돌한다. 별장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주디(Judy)'라는 이름을 불러대며, 근처 묘지에는 외국인들이 묻혀있다. 십자가 목걸이를 손에 꼭 쥐고 다니는 꼽추 관리인은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저지른다. '공포의 저택'에는 서구 공포 영화의 문화적 요소가 하이브리드적으로 이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지배하는 근원적 공포는 일본 사회 내부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별장의 방문객들은 윤리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무네카타 박사는 조카 요시에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 박사는 요시에의 소유가 된 별장을 요양원으로 개조할 생각이다. 요시에의 억압된 욕망은 박사를 통해 드러난다. 무네카타는 요시에가 병중의 남편과 동침하기 위해 병실로 찾아온 일을 비웃는다. 야마시타는 부잣집 딸과 결혼하기 위해 무네카타가 차지한 병원장 자리를 노린다. 그는 박사가 전쟁 중 만주에서 생체 실험을 자행한 일을 언급하며 협박한다. 변호사는 신이치의 내연녀와 공모해 별장을 뺏으려 한다. 일그러진 성적 욕망과 물질주의에 경도된 그들의 모습은 전후 일본 사회의 내적 심연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무네카타가 저지른 전쟁 범죄, 그 군국주의의 망령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전쟁은 평화로웠던 저택을 악령의 집으로 만들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토미나가 남작은 침입한 군인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다. 형의 원혼에 씌인 꼽추 동생은 살인마가 되어 방문자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은폐된 범죄와 악의 공간으로서 영화 속 저택은 전후 일본 사회의 죄의식, 불안과 두려움의 저장소이기도 하다. 야마시타는 이 저택의 문짝들이 제멋대로 열리고 닫히는 것은 집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독 사토 하지메가 구현해낸 이 비뚤어진 공포의 집은 조지 로메로의 기념비적 공포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에서의 비좁은 농가를 연상케 한다. 좀비들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모인 그 집은 당시 미국 사회에 대한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좀비에 대항하는 방법을 두고 격론을 벌이는 흑인과 백인, 결국 백인 토벌대에 의해 죽는 흑인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종 차별' 문제를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공포의 저택'은 일본의 공포 영화가 전후의 트라우마를 소재로 독창적 장르 구축에 나섰음을 입증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조지 로메로(George A. Romero) 감독,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night-of-living-dead-1968.html

***Nikkatsu(日活)의 국경없는 액션(Borderless Action) 영화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拳銃は俺のパスポート, A Colt is My Passport, 196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lt-is-my-passport-1967.html

****Toei(東映)의 야쿠자 협객 영화
메이지 시대 협객전 삼대의 이야기(明治侠客伝 三代目襲名, Blood of Revenge, 196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blood-of-revenge1965.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와 인생, 그 기묘한 이중주


  "두고 봐요. 난 위대한 여배우가 될 테니까."

  작은 도시에서 공장 여공으로 일하고 있는 파샤(인나 추리코바 분)의 일상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여가 시간에는 마을 광장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지켜본다. 파샤는 누군가와 간절히 춤을 추고 싶지만 평범한 외모의 파샤에게 눈길을 주는 남자는 없다. 착하고 자기 주장을 잘 하지 못하는 파샤에게 친구들은 이런저런 부탁을 하기에 바쁘다. 이혼한 친구는 자신이 데이트하러 나갈 동안 아이를 돌봐달라고 한다. 이웃 청년은 여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파샤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한다. 파샤는 그런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파샤의 유일한 취미 활동이라면 동네 극단에서 연기를 하는 것. 파샤는 Baba Yaga(러시아 민담의 마귀 할멈)역을 맡아 사람들 앞에서 공연한다. 다른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부럽게 쳐다보던 어느 날, 파샤에게 한 남자가 춤 신청을 한다. 파샤는 첫눈에 이 남자 아르카디에게 반한다. 파샤는 아르카디에게 자신이 언젠가 유명한 여배우가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런 파샤를 아르카디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과연 파샤의 꿈은 허황된 것일까?

  글렙 판필로프(Gleb Panfilov) 감독의 영화 '시작(Начало, The Beginning, 1970)'은 독특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오프닝 크레딧이 없는 이 영화는 잔 다르크의 심문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종교 재판관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는 잔 다르크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내보인다. '잔 다르크'는 영화 '시작'에서 영화 속 영화인 셈이다. 짧은 머리를 한 여배우는 촬영이 끝나자 만족한 표정으로 촬영장을 떠난다. 화면 위로 그 여배우의 어린 시절, 소녀 때의 사진이 차례로 겹쳐진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사진 속 주인공 파샤의 현실로 들어간다. 이렇게 영화 '시작'은 시골 여공 파샤와 여배우 파샤의 모습을 교차 편집으로 엮는다.

  잔 다르크의 생애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글렙 판필로프 감독은 당국에 여러 번 기획안을 써냈다. 하지만 당국은 판필로프의 기획안을 번번이 반려시켰다. 아마도 영화 당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정교의 성인도 아니고, 혁명 영웅도 아닌 프랑스 성녀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판필로프 감독은 계획을 수정했다. 자신이 찍고 싶었던 잔 다르크 영화를 영화 속 영화로 넣고, 바로 그 잔 다르크를 연기하는 여배우의 이야기를 풀어놓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은 시대극와 로맨스, 코미디가 결합한 독창적인 영화가 되었다.

  자, 그럼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촌 아가씨 파샤는 어떻게 여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을까? 영화 '잔 다르크'의 여배우를 찾아다니던 감독은 우연히 시골 극단 공연에서 파샤를 발견한다. 마귀 할멈 바바 야가 역을 흥겹게 연기하는 파샤를 감독은 잔 다르크 역으로 점찍는다. 그야말로 길거리 캐스팅의 행운이었던 셈. 그 일 이후로 파샤의 내면과 일상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파샤는 아르카디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르카디에게 직진한다. 매번 자신에게 골치 아픈 부탁을 떠넘기던 친구와 지인들에게도 단호해진다.

  "난 두려워요."

  잔 다르크는 도망을 치려다 붙잡힌 병사 둘을 처형시키라고 명령한 후, 자신의 참모에게 그렇게 고백한다. 영화 밖의 파샤의 삶도 순탄치가 않다. 유부남 아르카디와 살림을 차린 파샤. 아르카디의 본처는 남편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고, 주변 사람들은 불륜녀라고 모욕을 준다.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찾았건만 이 남자는 가정이 있다. 포기하려니 가슴이 너무나도 아프다. 파샤의 내적 갈등은 수난과 고통을 겪는 잔 다르크의 연기로 표현된다. 주변에는 오직 남자들 뿐인 전장, 적들에게 생포된 후 마주한 냉혹한 종교 재판관들. 파샤가 연기하는 잔 다르크는 그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영화 '시작'은 시골 아가씨 파샤를 통해 영화와 인생의 기묘한 이중주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는 관객이 궁금해할 법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과연 배우들은 어떻게 자신의 역을 연기해내는 것일까? 배우의 실제 삶과 영화는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하는가? 자신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연기'라는 도구로 풀어내는 파샤의 모습은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된다. 파샤는 아르카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하지만 이 사랑은 고통과 수치심을 수반한다. 잔 다르크가 느끼는 외로움, 두려움과 불안은 파샤가 느끼는 현실의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화형의 순간에 잔 다르크는 불길 속에서 외친다. "나는 너무나도 무섭다."

  마침내 파샤의 '잔 다르크' 영화 촬영이 끝난다. 다음 영화의 배역을 부여받지 못한 파샤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배우는 영화 산업의 현장 노동자에 가깝다. 이 장면은 국가가 영화 산업을 통제하는 구 소련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파샤의 고향 사람들은 귀환한 파샤를 열렬히 환영한다. 하지만 파샤는 그 모든 것이 낯설다. 시골 여공은 이제 막 영화 한 편을 찍었을 뿐이다. 연인 아르카디는 아내와 딸에게 돌아갔다. 동네 극단에서 바바 야가를 연기하는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파샤는 시사회장를 가득 메운 관객들 앞에서 인사한다. 거리 건물의 외벽에는 파샤가 연기한 잔 다르크가 커다란 걸개그림으로 나부낀다. '시작'이라는 제목이 뜨면서 영화는 끝난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촌 아가씨 파샤가 배우로서 내딛는 작은 발걸음, 바로 그 짧은 여정을 기록한다.

  파샤를 연기한 인나 추리코바
(Inna Churikova)의 실제 삶도 '시작'과 닮아있다. 감독 글렙 판필로프는 엔지니어로 일하다 좀 늦은 나이에 영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첫 영화 '불길 속에 길은 없다(В огне брода нет, No Path Through Fire, 1968)'의 여주인공을 찾다가 모스크바 청소년 극단에서 연기하던 추리코바를 발견했다. 그 영화에서 추리코바는 러시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에 눈뜨는 간호사 타냐 역을 맡았다. 순수한 내면을 지닌 타냐를 잘 보여준 추리코바는 판필로프의 다음 작품인 '시작'도 함께 했다. 그리고 여배우와 감독은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시작'은 시골 아가씨 파샤의 새로운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배우 인나 추리코바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진 출처: ru.kinorium.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영화 '시작(The Beginning, 1970)'에서 잔 다르크로 분장한 인나 추리코바



영화 '불길 속에 길은 없다(В огне брода нет, No Path Through Fire, 1968)'의 인나 추리코바

 

**글렙 판필로프 감독의 영화 '테마(Тема, The Theme, 197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theme-1979.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나의 소설, 다른 관점의 두 영화

파계(破戒, Apostasy, 1948),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파계(破戒, The Outcast, 1962), 이치카와 콘 감독


  국민학교 선생인 세가와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그는 부라쿠(部落) 출신이다. 부라쿠민은 전근대 일본의 신분제에서 최하층을 일컫는 말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신분제가 철폐된 이후에도 부라쿠민(部落民)에 대한 차별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일본의 자연주의 소설가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1872-1943)이 1905년에 발표한 소설 '파계(破戒)'는 바로 이 부라쿠민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1948년에 소설을 영화화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4년 후, 이치카와 콘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파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올해, 이 소설은 또 다시 영화로 만들어져서 일본의 관객들과 만났다. 이것은 소설 '파계'가 지닌 문제의식이 1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일본 사회를 관통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학교에서 숙직을 서던 세가와(이치카와 라이조 분)는 밤하늘 너머 울리는 부친의 목소리를 듣는다. 무언가 안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그는 비밀리에 고향땅을 밟는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부친은 집 나간 황소를 찾아다니다 황소의 뿔에 받혀 절명하고 말았다. 숙부는 조카의 신분이 드러날까 염려하며 얼른 돌아가기를 재촉한다. 평생 부라쿠 출신임을 철저히 숨기고 살 것. 아들만은 차별과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은 그러했다.

  세가와는 부라쿠민 출신의 사회운동가 이노코 렌타로의 책을 읽으며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드러내는 단서가 될까봐 세가와는 책조차 숨겨가면서 읽는다. 마을을 찾은 이노코 렌타로를 만난 자리에서도 세가와는 마음속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부여한 거대한 계명을 깨뜨릴 수는 없다. 그렇게 조심했건만 어느새 마을과 학교에는 세가와가 부라쿠민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같은 소설을 영화화했지만 키노시타 케이스케와 이치카와 콘이 지향하는 바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1948년작 영화에서 세가와는 사무라이 가문의 퇴직 교사 카자마의 멸시를 받는다. 부라쿠민과 사무라이, 메이지 시대에 그들은 모두 평민이 되었지만 뼛속 깊이 남아있는 계급의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자마는 퇴직 연금 수령에 필요한 근무 기한 5개월을 앞두고 해고 통보를 받는다. 그는 세가와를 찾아가 교장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한다. 세가와는 교장을 찾아가 선처를 호소하지만 교장은 거절한다. 연금이 절실히 필요함에도 카자마는 탄원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 몰락하기는 했어도 사무라이 가문의 자부심을 지닌 카자마는 농사꾼 출신의 교장에게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카자마가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대중 앞에 고백한 세가와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의 딸 시호는 세가와와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 하려고 한다. 카자마의 분노와 멸시는 부라쿠민 세가와가 직면한 견고한 차별의 일부분일 뿐이다. 세가와는 동료 교사들에게 배척당하고, 더이상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없다. 결국 세가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세가와를 신분제의 악습에 갇힌 희생자로 그려낸다. 세가와는 불시의 테러로 목숨을 잃은 이노코 렌타로의 뜻을 잇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세가와와 그의 연인 시호, 이노코 렌타로의 미망인을 실은 배가 마을을 떠나간다. 그들 앞에 놓인 삶은 분명 순탄치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희망이 엿보인다. 제국주의 일본은 패망했다.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의 '파계'에서 부라쿠민 교사 세가와의 수난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마중물과도 같다.

  이치카와 콘의 '파계'는 세가와의 내적인 갈등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다 섬세하게 그려낸다. 감독의 아내인 와다 나토가 각색을 맡았는데, 이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의 필력은 영화의 인물들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세가와의 괴로움은 팔에 칼을 그어 피의 색깔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부라쿠민인 자신의 피가 푸른색이 아닌 빨간색임에도 왜 차별을 받는가 반문한다. 이 영화에서 삶이 괴로운 사람은 세가와 말고도 더 있다.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 출신의 교사 카자마는 알콜 중독자로 살아가고 있다.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로서 그는 자신은 물론 가족마저 건사하지 못한다. 후처와 그의 아이들은 가난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고 사별한 처의 딸 시호는 절에서 기거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주지는 틈만 나면 시호를 추행하려고 든다. 세가와와 시호, 카자마, 그들은 각자 자신의 고통을 끌어안고 있다.

  이치카와 콘은 세가와를 부조리한 사회에서 고통을 받는 인간으로 바라본다. 세가와는 어린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고백한다. 세가와의 괴로움은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며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얼굴이 연속적인 쇼트로 이어진다. 동료 교사 츠치야는 부라쿠민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반성한다. 세가와를 사랑하는 시호는 기꺼이 부라쿠민의 아내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들의 지지 덕분에 세가와는 이노코 렌타로가 걸었던 길을 따라 가려고 한다. 그가 살아갈 세상은 여전히 불의하며, 사람들은 그를 냉대할 것이다. '파계'는 그런 사회가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 연대(solidarity)를 통해서 변화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파계(破戒, The Outcast, 1962)'에서 이노코 렌타로를 연기한 배우 미쿠니 렌타로(三國連太郎)는 실제로 부라쿠 출신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ameblo.jp  



***이치카와 콘 감독의 영화 리뷰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nflagration-1958.html

도련님(ぼんち, Bonchi,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bonchi-1960.html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 198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makioka-sisters-1983.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에는 영화 'Rain People'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그 여자, 임신했어요(She is pregnant)."

  여자는 수화기 너머의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묻는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여자는 남편에게 그렇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다. 여자의 이름은 나탈리. 아내로서, 아이 엄마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느낀 여자는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영화 'Rain People(1969)'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범상치 않은 초기작이다. 이 영화가 나온 해에 'Easy Rider(1969)'가 나왔다. 'Rain People'은 'Easy Rider'와 기이한 영화적 댓구를 이룬다. 길 잃은 청춘들의 일탈적 로드 무비와 집을 뛰쳐나온 가정 주부의 뒤틀린 여행기가 같은 해에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어쩌면 그 시대의 미국인들은 어디론가 간절히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비오는 날 아침, 나탈리는 식탁에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떠난다. 목적지도, 누구를 만나야겠다는 계획도 없다. 나탈리는 차를 몰고 가다가 히치 하이킹을 하려는 젊은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는 자신을 'Killer'로 부르라며 해맑게 웃는다. 대학을 그만 둔 전직 미식 축구 선수와 집 나온 가정 주부는 그렇게 동행이 된다. '킬러'의 과거는 단편적인 몽타주로 제시된다. 그는 경기에서 뇌를 다쳤다. 대학 당국은 그에게 보상금을 쥐어주며 방출해 버렸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킬러에게 나탈리는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나탈리에게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은 점차 부담으로 다가온다. 나탈리는 어떻게든 킬러를 자신의 여정에서 밀쳐내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킬러에게 알맞은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양계장의 막일꾼 정도면 킬러에게도 괜찮지 않을까? 뱃속 시커먼 양계장 주인에게 킬러는 좋은 먹잇감이다. 킬러는 양계장 주인에게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좋은지 나탈리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 "저 여자가 네 엄마야?" 나탈리는 그가 킬러의 돈과 노동력을 착취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선다.

  나탈리의 여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남편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탈리는 자신이 모질고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고 토로한다. 아내의 옷도 맞지 않고, 엄마로서 살아갈 준비는 더더욱 되어 있지 않다. 여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집을 떠난 나탈리가 막연하게 꿈꾼 자유에는 성적인 일탈도 포함하고 있다. 킬러를 차에 태운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킬러는 '남자'가 아니라 머리를 다친 '아이'였다. 배 속의 아기조차 버거워서 버리려고 하는 이 여자에게 킬러는 이미 태어난 아이와도 같다. 혈혈단신, 자신을 보살펴주던 어머니마저 잃은 킬러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킬러는 나탈리를 엄마처럼 따른다. 그런데 이 낯선, 새로운 엄마는 킬러의 곁에 머물 생각이 없다.

  하지만 모질지 못한 엄마 나탈리는 킬러를 양계장에서 빼내온다. 버릴 수 없는 어른 아이 킬러를 데리고 다니는 나탈리의 불안한 여정은 고든과의 만남으로 급변한다. 과속을 하던 나탈리는 고속도로 순찰대원인 고든에게 적발된다. 순전한 호의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자신의 집으로 나탈리를 초대한다. 낡은 트레일러에서 어린 딸과 살고 있는 고든. 코폴라는 킬러의 과거처럼 고든의 과거도 몽타주 쇼트로 보여준다. 4년 전의 화재는 그에게서 임신 중인 아내와 집을 앗아갔다. 킬러와 나탈리, 그리고 고든까지 이렇듯 'Rain People'의 인물들은 모두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

  결국 킬러는 나탈리를 겁탈하려는 고든을 막으려다가 죽는다. 나탈리는 킬러의 시신을 안고 흐느낀다. 죽음으로써 킬러는 나탈리의 진짜 아들이 된다. 나탈리는 자신과 남편이 함께 킬러를 보살피고 사랑해 주겠다고 말한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나탈리의 약속을 뒤로 하고 영화는 끝난다. '빗속의 사람들', 그들의 불안하고 슬픈 여정은 시대의 우울과 맞닿아 있다. 자유를 만끽했던 히피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으며, 민권 운동의 격렬한 열기도 사그라들 무렵이었다. 이제 미국인들은 대의명분과 집단의 가치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해들어가기 시작했다. 'Easy Rider'의 폭주족들이 시작한 길 위의 방랑은 1970년대 자동차 영화의 전성기로 이어졌다.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미국인들의 지난한 여정이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영화 'Rain People'로 그 서막을 장식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1970년대 미국의 로드 무비(Road Movie)

바바라 로든의 Wanda(197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wanda1970-happy-old-year2019.html


좌절된 욕망과 모험의 질주, 1970년대 미국의 자동차 영화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1970.html
    
히피 시대의 종언, Electra Glide in Blue(197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hippie-movement-electra-glide-in.html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1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ter-hill-1.html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2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ter-hill-2.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