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Rain People'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그 여자, 임신했어요(She is pregnant)."

  여자는 수화기 너머의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묻는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여자는 남편에게 그렇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다. 여자의 이름은 나탈리. 아내로서, 아이 엄마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느낀 여자는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영화 'Rain People(1969)'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범상치 않은 초기작이다. 이 영화가 나온 해에 'Easy Rider(1969)'가 나왔다. 'Rain People'은 'Easy Rider'와 기이한 영화적 댓구를 이룬다. 길 잃은 청춘들의 일탈적 로드 무비와 집을 뛰쳐나온 가정 주부의 뒤틀린 여행기가 같은 해에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어쩌면 그 시대의 미국인들은 어디론가 간절히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비오는 날 아침, 나탈리는 식탁에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떠난다. 목적지도, 누구를 만나야겠다는 계획도 없다. 나탈리는 차를 몰고 가다가 히치 하이킹을 하려는 젊은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는 자신을 'Killer'로 부르라며 해맑게 웃는다. 대학을 그만 둔 전직 미식 축구 선수와 집 나온 가정 주부는 그렇게 동행이 된다. '킬러'의 과거는 단편적인 몽타주로 제시된다. 그는 경기에서 뇌를 다쳤다. 대학 당국은 그에게 보상금을 쥐어주며 방출해 버렸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킬러에게 나탈리는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나탈리에게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은 점차 부담으로 다가온다. 나탈리는 어떻게든 킬러를 자신의 여정에서 밀쳐내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킬러에게 알맞은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양계장의 막일꾼 정도면 킬러에게도 괜찮지 않을까? 뱃속 시커먼 양계장 주인에게 킬러는 좋은 먹잇감이다. 킬러는 양계장 주인에게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좋은지 나탈리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 "저 여자가 네 엄마야?" 나탈리는 그가 킬러의 돈과 노동력을 착취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선다.

  나탈리의 여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남편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탈리는 자신이 모질고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고 토로한다. 아내의 옷도 맞지 않고, 엄마로서 살아갈 준비는 더더욱 되어 있지 않다. 여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집을 떠난 나탈리가 막연하게 꿈꾼 자유에는 성적인 일탈도 포함하고 있다. 킬러를 차에 태운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킬러는 '남자'가 아니라 머리를 다친 '아이'였다. 배 속의 아기조차 버거워서 버리려고 하는 이 여자에게 킬러는 이미 태어난 아이와도 같다. 혈혈단신, 자신을 보살펴주던 어머니마저 잃은 킬러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킬러는 나탈리를 엄마처럼 따른다. 그런데 이 낯선, 새로운 엄마는 킬러의 곁에 머물 생각이 없다.

  하지만 모질지 못한 엄마 나탈리는 킬러를 양계장에서 빼내온다. 버릴 수 없는 어른 아이 킬러를 데리고 다니는 나탈리의 불안한 여정은 고든과의 만남으로 급변한다. 과속을 하던 나탈리는 고속도로 순찰대원인 고든에게 적발된다. 순전한 호의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자신의 집으로 나탈리를 초대한다. 낡은 트레일러에서 어린 딸과 살고 있는 고든. 코폴라는 킬러의 과거처럼 고든의 과거도 몽타주 쇼트로 보여준다. 4년 전의 화재는 그에게서 임신 중인 아내와 집을 앗아갔다. 킬러와 나탈리, 그리고 고든까지 이렇듯 'Rain People'의 인물들은 모두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

  결국 킬러는 나탈리를 겁탈하려는 고든을 막으려다가 죽는다. 나탈리는 킬러의 시신을 안고 흐느낀다. 죽음으로써 킬러는 나탈리의 진짜 아들이 된다. 나탈리는 자신과 남편이 함께 킬러를 보살피고 사랑해 주겠다고 말한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나탈리의 약속을 뒤로 하고 영화는 끝난다. '빗속의 사람들', 그들의 불안하고 슬픈 여정은 시대의 우울과 맞닿아 있다. 자유를 만끽했던 히피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으며, 민권 운동의 격렬한 열기도 사그라들 무렵이었다. 이제 미국인들은 대의명분과 집단의 가치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해들어가기 시작했다. 'Easy Rider'의 폭주족들이 시작한 길 위의 방랑은 1970년대 자동차 영화의 전성기로 이어졌다.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미국인들의 지난한 여정이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영화 'Rain People'로 그 서막을 장식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1970년대 미국의 로드 무비(Road Movie)

바바라 로든의 Wanda(197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wanda1970-happy-old-year2019.html


좌절된 욕망과 모험의 질주, 1970년대 미국의 자동차 영화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1970.html
    
히피 시대의 종언, Electra Glide in Blue(197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hippie-movement-electra-glide-in.html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1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ter-hill-1.html

폭력과 고독의 서사, 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세계 2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ter-hill-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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