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소설, 다른 관점의 두 영화

파계(破戒, Apostasy, 1948),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파계(破戒, The Outcast, 1962), 이치카와 콘 감독


  국민학교 선생인 세가와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그는 부라쿠(部落) 출신이다. 부라쿠민은 전근대 일본의 신분제에서 최하층을 일컫는 말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신분제가 철폐된 이후에도 부라쿠민(部落民)에 대한 차별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일본의 자연주의 소설가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1872-1943)이 1905년에 발표한 소설 '파계(破戒)'는 바로 이 부라쿠민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1948년에 소설을 영화화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4년 후, 이치카와 콘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파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올해, 이 소설은 또 다시 영화로 만들어져서 일본의 관객들과 만났다. 이것은 소설 '파계'가 지닌 문제의식이 1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일본 사회를 관통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학교에서 숙직을 서던 세가와(이치카와 라이조 분)는 밤하늘 너머 울리는 부친의 목소리를 듣는다. 무언가 안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그는 비밀리에 고향땅을 밟는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부친은 집 나간 황소를 찾아다니다 황소의 뿔에 받혀 절명하고 말았다. 숙부는 조카의 신분이 드러날까 염려하며 얼른 돌아가기를 재촉한다. 평생 부라쿠 출신임을 철저히 숨기고 살 것. 아들만은 차별과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은 그러했다.

  세가와는 부라쿠민 출신의 사회운동가 이노코 렌타로의 책을 읽으며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드러내는 단서가 될까봐 세가와는 책조차 숨겨가면서 읽는다. 마을을 찾은 이노코 렌타로를 만난 자리에서도 세가와는 마음속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부여한 거대한 계명을 깨뜨릴 수는 없다. 그렇게 조심했건만 어느새 마을과 학교에는 세가와가 부라쿠민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같은 소설을 영화화했지만 키노시타 케이스케와 이치카와 콘이 지향하는 바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1948년작 영화에서 세가와는 사무라이 가문의 퇴직 교사 카자마의 멸시를 받는다. 부라쿠민과 사무라이, 메이지 시대에 그들은 모두 평민이 되었지만 뼛속 깊이 남아있는 계급의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자마는 퇴직 연금 수령에 필요한 근무 기한 5개월을 앞두고 해고 통보를 받는다. 그는 세가와를 찾아가 교장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한다. 세가와는 교장을 찾아가 선처를 호소하지만 교장은 거절한다. 연금이 절실히 필요함에도 카자마는 탄원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 몰락하기는 했어도 사무라이 가문의 자부심을 지닌 카자마는 농사꾼 출신의 교장에게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카자마가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대중 앞에 고백한 세가와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의 딸 시호는 세가와와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 하려고 한다. 카자마의 분노와 멸시는 부라쿠민 세가와가 직면한 견고한 차별의 일부분일 뿐이다. 세가와는 동료 교사들에게 배척당하고, 더이상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없다. 결국 세가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세가와를 신분제의 악습에 갇힌 희생자로 그려낸다. 세가와는 불시의 테러로 목숨을 잃은 이노코 렌타로의 뜻을 잇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세가와와 그의 연인 시호, 이노코 렌타로의 미망인을 실은 배가 마을을 떠나간다. 그들 앞에 놓인 삶은 분명 순탄치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희망이 엿보인다. 제국주의 일본은 패망했다.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의 '파계'에서 부라쿠민 교사 세가와의 수난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마중물과도 같다.

  이치카와 콘의 '파계'는 세가와의 내적인 갈등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다 섬세하게 그려낸다. 감독의 아내인 와다 나토가 각색을 맡았는데, 이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의 필력은 영화의 인물들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세가와의 괴로움은 팔에 칼을 그어 피의 색깔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부라쿠민인 자신의 피가 푸른색이 아닌 빨간색임에도 왜 차별을 받는가 반문한다. 이 영화에서 삶이 괴로운 사람은 세가와 말고도 더 있다.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 출신의 교사 카자마는 알콜 중독자로 살아가고 있다.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로서 그는 자신은 물론 가족마저 건사하지 못한다. 후처와 그의 아이들은 가난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고 사별한 처의 딸 시호는 절에서 기거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주지는 틈만 나면 시호를 추행하려고 든다. 세가와와 시호, 카자마, 그들은 각자 자신의 고통을 끌어안고 있다.

  이치카와 콘은 세가와를 부조리한 사회에서 고통을 받는 인간으로 바라본다. 세가와는 어린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고백한다. 세가와의 괴로움은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며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얼굴이 연속적인 쇼트로 이어진다. 동료 교사 츠치야는 부라쿠민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반성한다. 세가와를 사랑하는 시호는 기꺼이 부라쿠민의 아내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들의 지지 덕분에 세가와는 이노코 렌타로가 걸었던 길을 따라 가려고 한다. 그가 살아갈 세상은 여전히 불의하며, 사람들은 그를 냉대할 것이다. '파계'는 그런 사회가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 연대(solidarity)를 통해서 변화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파계(破戒, The Outcast, 1962)'에서 이노코 렌타로를 연기한 배우 미쿠니 렌타로(三國連太郎)는 실제로 부라쿠 출신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ameblo.jp  



***이치카와 콘 감독의 영화 리뷰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nflagration-1958.html

도련님(ぼんち, Bonchi,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bonchi-1960.html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 198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makioka-sisters-1983.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