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원작자인 스티븐 킹의 소설에는 종종 글쓰기의 괴로움과 작가라는 직업의 압박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작품 《미저리》는 어떤 면에서 그러한 괴로움이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샤이닝”의 주인공 잭의 직업도 작가이다. 호텔의 겨울 관리인을 자청한 것도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잭이 관리인으로 있게 된 이 호텔은 알 수 없는 괴기가 서린 곳으로 잭과 그 가족은 거기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고통을 받게 된다. 당연히 잭의 글쓰기 계획은 무산되고, 잭이 미친 듯이 써내는 것이란 ‘일만 하고 놀지 않는 잭은 바보가 된다’라는 문장뿐이다.

 

  “샤이닝”이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주체할 수 없이 스크린 위를 범람하는 붉은 피와 도저히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족에 대한 끔찍한 살의는 분명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포의 심연을 들여다보노라면 거기엔 글쓰기와 가족이 주는 견딜 수 없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려고 고군분투하는 작가에게 가족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그 점은 작가의 마음에 고통과 증오를 불러온다.

 

  결국 잭의 글쓰기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기 위해서는 가족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용납될 수 없는 무의식적 욕망은 그런 이유로 꿈의 형태를 빌어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지각되지 않는 무의식의 소원성취 방식으로서의 꿈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왜곡되는 모든 꿈에서 소원은 무의식에서 비롯되며, 낮에는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 

 

  영화 “샤이닝”은 작가의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이 실현하고 싶어 하는 꿈을 충실히 구현해낸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글쓰기와 가족, 그 두 가지가 빚어낸 끔찍하지만, 안전한 악몽이 된 것이다. 

 

1)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인숙 역, 꿈의 해석, 열린 책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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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1-13 16:06   좋아요 0 | URL
전 이 영화 아직 못 봤는데요. 본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하더라구여. 님의 리뷰를 보니 더 보고 싶어지는데요.^^

푸른별 2005-11-13 18:49   좋아요 0 | URL
십년 전에 보고, 이번에 일 때문에 다시 보게 되었지요. 리뷰라는 것이 그렇지만 참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생각과 느낌이 읽는 이와 얼마나 소통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지요. 내가 써놓고 보니 지나치게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샤이닝에 관해서는 다른 유명한 리뷰들이 많은데 내 글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어서 이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DVD 발매가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삭제본인지 모르겠어요. 한번 보세요. 기이하고 참 독특한 작품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모스크바 일기”는 도시에 대한 벤야민의 관점과 생각을 알 수 있는 단초들을 제공하기는 해도 무엇보다 그것이 일기임을 고려할 때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더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아샤 라시스라는 여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누구인가? 벤야민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이후 벤야민의 학문적 여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아니던가?


  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벤야민은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고, 아샤는 아이의 엄마였으며 동거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벤야민과 아샤, 아샤의 동거인 라이히, 이 세 사람이 만난다. 이쯤 되면 무슨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이 연상될 듯도 한데, 이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사상적 입장을 공격하며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시쳇말로 ‘쿨’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아니면 그 시대 사람들의 교양이란 덕목이 그토록 내밀한 감정들을 표현하기 보다는 응시하고 성찰하게 만든 것일까? 솔직히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들의 관계는 그리 잘 이해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일기에는 아샤를 비롯해 모스크바에서 만난 다양한 문화 예술인에 대한 단상,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한 관찰, 그곳에서의 예술적 체험도 기록되어있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은 부록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기는 벤야민이 아샤 라시스라는 여인을 통해서 본 모스크바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두 사람이 그곳에서 함께 한 순간에 대한 정밀한 기록인 것이다.


  누군가를 통해서만 어떤 장소, 도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벤야민에게 아샤와 모스크바라는 도시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으리라. 번역에 있어서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더러 발견되지만, 이십세기의 뛰어난 문예 이론가였던 벤야민의 인간적 면모를 궁금해하는 이들에게는 즐거운 책읽기의 경험을 제공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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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는 희곡 자체도 결코 쉽게 읽히는 텍스트가 아니다. 읽는 내내 독자를 의문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다가 갑작스런 결말에 이르는데, 이 결말 또한 모호하게 처리됨으로써 과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텍스트 자체에 내재된 그러한 요인들은 연극으로 상연되었을 때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과연 극의 중요한 상징인 “말(들)”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있다. 희곡을 읽으면서 연상된 “말(들)-6명의 배우가 말머리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의 이미지는 사실 기괴하고 당혹스러운 것이다. 거기에는 선정적인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너제트라는 말에 대한 알란의 집착이 그 증거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김광보가 연출한 에쿠우스의 “말(들)”은 선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 기대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그 역을 맡은 배우들은 온몸을 검은 망사로 감싸고 꽉 끼는 가죽 팬티를 입고 나오기 때문이다.

 

  과연 김광보의 관점은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는 이전부터 동성애적 코드를 깔은 얄팍한 연극적 속임수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말에 매혹당한 알란, 다이사트의 불행한 결혼 생활, 알란과 질의 성관계 실패가 암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동성애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김광보의 연출은 상당 부분 동성애 코드를 충실히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관객은 알란의 여자친구인 질 보다 “말”역의 배우들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희곡 텍스트에서 공연 텍스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에쿠우스를 Frame화하는 요소들로 “말”과 함께 “각형의 무대장치”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피터 셰퍼가 특별히 언급한 것으로 극의 성격 전체를 규정짓는 상징적인 틀이 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도 사각의 링이 아닐까 싶다. 그곳은 결투가 일어나는 곳이고 육체들 간의 부딪힘은 때로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상처마저 남긴다. 대부분 다이사트 박사의 상담실로 연출되는 그 공간에서 알란은 박사와 격렬한 심리적인 대면을 통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런가하면 이 무대는 알란이 말들과 함께 질주하는 장면에서는 드넓은 초원을 연상케 한다. 특히 제한된 공간성을 회전 장치를 통해 뛰어넘게 만드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김광보의 연출은 그런 면에서는 매우 원작에 충실한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사용된 합창은 과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까? 피터 셰퍼의 연출에 관한 노트를 읽어보면 그것은 분명히 인식 가능한 노래나 합창의 형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김광보의 에쿠우스에는 곡과 가사가 있는 노래가 나온다. 강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격렬한 움직임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극 전체의 하이라이트로 부각되며, 이것을 빼면 이 연극에서 달리 기억에 남을만한 부분은 없을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피터 셰퍼는 합창이 “새로운 신, 에쿠우스의 출현을 예고하는”것이 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김광보가 보여준 합창은 뮤지컬의 그것처럼 관객의 시청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한다. 매우 오락적인 측면에 치중한 것처럼 보이는 이 부분은 본질적인 메시지 전달에는 실패했다는 인상을 준다. 열정과 자유가 표현되어야할 이 장면에서 말들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양식화되었으며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얽매이지 않은 원시성이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한 느낌인 것이다.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는 세상에 나온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주요한 공연 텍스트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 인기는 텍스트에 내재된 혼란스러움과 기괴스러움이 가져온 알 수 없는 열광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객은 공연 내내 매혹당하지만 그 느낌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에 실패하며 공연장을 떠난다. 김광보가 연출한 에쿠우스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그러한 느낌을 지닌 채 자리를 뜨게 만든다.

 

  동성애와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는 보기 좋게 포장되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알맹이가 없다. 알란의 정신병적 열정도, 다이사트 박사의 무기력한 중년의 심리도, 현대 사회의 억압적 지배 이데올로기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원작에 충실하다는 것이 독자적인 연출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닐진대, 연출자에게 보다 과감하고 내실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참고문헌 *

Barry B. Witham, Anger in Equus, Modern Drama 22 No.1 March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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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 사다리 움직임 연구소의 “벚나무 동산은” 외형상으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어 보인다. 12개의 의자만으로 무대를 구성한 점이라던가, 희극적 요소의 과감한 도입, 배우들의 독특한 움직임과 대사 처리 등은 확실히 관객의 눈길을 끄는 점이다. 그래서였을까? 두 시간 남짓 되는 공연 시간 동안 관객들의 집중력과 호응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 연극의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과연 관객들의 만족감을 가져오게 만든 것은 이 연극만이 가진 독특한 장점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연극에 진정한 힘을 부여한 것은 안톤 체홉이라는 위대한 극작가의 원작 “벚꽃 동산”이 있기 때문이다. “벚나무 동산”은 그 원작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는 연극인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 맞게 각색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지나치게 희극적인 요소를 도입한 부분은 눈에 거슬렸다. 솔직히 그것은 흥행성을 염두에 둔 상업적 발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사투리의 희극적 변용, 마술의 시연 등과 같은 요소가 원작과 얼마나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극의 전개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는지 매우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어떤 면에서는 원작의 본질을 흐렸다고 생각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체홉이 “벚꽃 동산”에서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체홉은 작품 속의 떠나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안타까움과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모두 제각각 상처와 사연을 지닌 인물들은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주변부를 배회하며 떠나기를 반복한다. 연극 “벚나무 동산”에서 결국 동산을 차지한 천용구 마저도 일견 신분제를 조롱하고 부를 축적해서 한풀이하는 승리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도 ‘떠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를 비롯해 다른 인물들을 떠나게 만드는 것은 개인 보다 더 큰 거부할 수 없는 시대와 역사적 흐름이라는 외부적 요인이다.

 

  그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사람들이 체홉의 연극에서는 주인공들이 된다. 어떤 면에서 원작의 시대적 배경인 러시아 제정 말기와 일제 강점기는 격동의 시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그 부분은 “벚나무 동산”의 시대 설정에 타당성을 부여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귀족-농노와 양반-노비로 대변되는 신분제의 틀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러한 각색의 장점은 무난하게 원작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벚나무 동산”이 떠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나마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러한 점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작이 주는 절제된 슬픔과 삶에 대한 통찰에까지 이르기에는 다소 힘이 부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시도가 항상 좋은 것을 담보하지 못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기존의 것에 대한 철저하고 냉정한 분석과 함께 창의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벚나무 동산”의 시도는 새롭기는 하지만 의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작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힘겹게 서있는 이 작품을 보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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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란 얼마나 때로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것과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영역은 그야말로 광대무변하다고 할 것이다. 포르말리이니 극단의 “광대들의 학교”도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않다.

 

  어떤 면에서 “광대들의 학교”는 말하는 부분 보다는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도입부는 매우 흥미로워서 처음부터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영사기로 재현된 모나리자 그림,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배우들의 몸짓, 독특한 음향 등은 극에 신선함을 불어 넣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커튼으로 분리된 세 개의 연극적 공간은 극의 전개에 있어서 중층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커튼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흥미있는 요소들과는 별개로, 원작 희곡을 읽어보지 않고 이 극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연극 시작에 앞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지만 이야기를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다. 주인공 내면의 분열적 자아를 연극적으로 표현한다는 시도 자체가 기존의 내러티브 구조를 차용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광대들의 학교”는 쉴 새 없이 내러티브를 파괴하고, 전복시키며, 때론 타협하면서 극을 풀어나간다.  

 

  이렇게 내러티브가 혼란스럽게 질주하는 동안 관객이 도입부의 긴장감에서 점차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수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막히면 이미지를 따라가고, 그것도 막히면 음악과 소리를 따라가게 되는데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은 당연히 극적 흥미를 반감시키게 만든다. 이것이 후반부가 시작되기 전쯤에 배우가 잠시 연극을 중단시키는 지점에 이르면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상당부분 소멸되고 만다(일부 관중은 그때에 자리를 떠버렸다).

 

  이어진 후반부는 수습할 수 없는 내러티브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미 없는 언어의 나열은 귀와 눈 모두를 지치게 만들고 관객을 극도의 혼란스러움으로 몰고 간다. 이쯤 되면 관행화된 내러티브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익숙해 있으며, 그것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실감하게 될 법도 하다. 어쩌면 그것이 연출자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자폐아의 내면처럼 세상에는 우리 자신의 익숙한 내러티브 관습에서 벗어나 위치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광대들의 학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매우 모호하고 불분명해 보인다. 나와 다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에게 익숙한 사고의 틀로는 쉽지 않음을 넌지시 일러주면서, 타인과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일면 우리 자신의 비타협적이고 편파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을 선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광대들의 학교”는 길 잃은 내러티브 속에서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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