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란 얼마나 때로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것과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영역은 그야말로 광대무변하다고 할 것이다. 포르말리이니 극단의 “광대들의 학교”도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않다.

 

  어떤 면에서 “광대들의 학교”는 말하는 부분 보다는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도입부는 매우 흥미로워서 처음부터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영사기로 재현된 모나리자 그림,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배우들의 몸짓, 독특한 음향 등은 극에 신선함을 불어 넣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커튼으로 분리된 세 개의 연극적 공간은 극의 전개에 있어서 중층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커튼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흥미있는 요소들과는 별개로, 원작 희곡을 읽어보지 않고 이 극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연극 시작에 앞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지만 이야기를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다. 주인공 내면의 분열적 자아를 연극적으로 표현한다는 시도 자체가 기존의 내러티브 구조를 차용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광대들의 학교”는 쉴 새 없이 내러티브를 파괴하고, 전복시키며, 때론 타협하면서 극을 풀어나간다.  

 

  이렇게 내러티브가 혼란스럽게 질주하는 동안 관객이 도입부의 긴장감에서 점차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수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막히면 이미지를 따라가고, 그것도 막히면 음악과 소리를 따라가게 되는데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은 당연히 극적 흥미를 반감시키게 만든다. 이것이 후반부가 시작되기 전쯤에 배우가 잠시 연극을 중단시키는 지점에 이르면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상당부분 소멸되고 만다(일부 관중은 그때에 자리를 떠버렸다).

 

  이어진 후반부는 수습할 수 없는 내러티브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미 없는 언어의 나열은 귀와 눈 모두를 지치게 만들고 관객을 극도의 혼란스러움으로 몰고 간다. 이쯤 되면 관행화된 내러티브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익숙해 있으며, 그것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실감하게 될 법도 하다. 어쩌면 그것이 연출자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자폐아의 내면처럼 세상에는 우리 자신의 익숙한 내러티브 관습에서 벗어나 위치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광대들의 학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매우 모호하고 불분명해 보인다. 나와 다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에게 익숙한 사고의 틀로는 쉽지 않음을 넌지시 일러주면서, 타인과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일면 우리 자신의 비타협적이고 편파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을 선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광대들의 학교”는 길 잃은 내러티브 속에서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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