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 19일, 뉴욕의 재즈 클럽 Slug's Saloon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유명한 재즈 트럼펫 연주자 리 모건(Lee Morgan). 그에게 총을 쏜 사람은 사실혼 관계의 부인 헬렌 모건(Helen Morgan)이었다. 엄청나게 많이 내린 눈 때문에 구급차는 늦게 도착했고, 모건은 결국 사망했다. 캐스퍼 콜린 감독의 다큐 '나는 모건을 죽였다(I Called Him Morgan, 2016)'는 그 두 사람의 삶과 사건에 얽힌 뒷이야기를 담아낸다.


  이 다큐의 주된 내레이션은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헬렌 모건의 음성으로 진행된다. 재즈 칼럼니스트인 래리 레니 토마스(Larry Reni Thomas)는 자신의 강의를 듣던 헬렌 모건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8년 후에 이루어진 인터뷰를 2개의 테이프에 녹음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헬렌은 세상을 뜬다. 다큐에는 그렇게 이미 고인이 된 헬렌의 증언, 리 모건의 여러 지인들, 그리고 그 비극적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리 모건의 여자 친구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 그 목소리들은 리 모건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트럼펫 선율을 배경으로 차분하게 그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을 향해 흘러간다.


  사실 다큐의 우리말 제목은 상당히 자극적인데, 아마도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이 제목은 메리 해런 감독의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1996)'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명한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에게 총격을 가한 과격한 레즈비언 작가 발레리 솔라나스, 전도 유망한 재즈 트럼페터를 총으로 쏜 부인. 그러나 이 다큐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메리 해런 영화처럼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 제목은 상당한 아쉬움을 남긴다.


  사건의 그날 밤. 재즈 클럽에는 리 모건의 여자 친구가 와있었고, 마침 클럽에 들른 헬렌은 그 장면을 보고 격분한다. 그리고 일어난 총격 사건은 어찌 보면 젊은 남편의 애인을 질투한 늙은 마누라(헬렌은 리 보다 13살 연상이었다)의 너저분한 치정 살인처럼 보인다. 다큐 제작자로서 그런 이야기는 '대박 아이템'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캐스퍼 콜린은 아주 좋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면서, 결코 욕심을 내지 않고 이야기 뒤에 숨겨진 것들을 탐구해 나간다.


  테이프에 담긴 헬렌의 육성은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가난하고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간 헬렌은 리 모건을 만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헬렌을 만날 당시의 리 모건은 잘 나가던 재즈 연주자에서 마약 중독자로 밑바닥 삶을 전전할 때였다. 그런 리를 헬렌은 다시 일으켜 세웠고, 그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마치 어린 아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것 같더군요."


  헬렌을 잘 알던 이웃은 그 시기의 헬렌의 모습을 그렇게 회고했다. 다시 화려하게 재기한 리 모건과 그의 모든 것을 보살피는 매니저 겸 부인의 역할을 자처한 헬렌. 잘 해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바람'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 두 사람은 법적 부부가 아니었으므로. 리에게는 단지 젊은 여자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대화가 통하는 여자 '친구'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다큐에 나오는 리의 여자 친구는 매우 담담하게 리와 자신의 관계를 증언한다. 어쨌든 헬렌은 그런 리의 '외도'를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향하게 만든다.


  결국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리 모건은 사망한다. 재즈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크나큰 손실이었다. 다큐는 그 비극이 일어난 2월의 눈오는 밤으로 관객을 천천히, 조용하게 이끌어 간다. 배경 음악으로 깔리는 리 모건의 연주는 그 짧은 삶만큼이나 슬프고 쓸쓸하다. 그리하여 이 다큐의 마지막에서 관객이 만나는 것은 인생과 음악과 어떤 사랑의 모습이다. 자극적이고 통렬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캐스퍼 콜린은 다큐 제작자로서의 윤리 의식과 창작자로서의 상상력, 그 둘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영화가 가진 본연의 의미, 즉 타인의 삶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는 데에 이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음악 다큐의 최고봉은 여전히 빔 벤더스의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다큐에 나온 이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 오마라 포르투온도의 나이가 90이 넘었다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음악 다큐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질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좋은 음악 다큐를 떠올릴 때, 'I Called Him Morgan'을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이다. 헬렌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성씨로 불렀다. 지극한 사랑으로 인생의 나락에서 일어난 남자는 결국 그 사랑 때문에 삶을 마감한다. 그 끔찍한 비극 뒤에 가려진 어떤 인생과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 담담한 시선으로 관조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정말로 좋은 음악 다큐의 모범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facebook.com/icalledhimm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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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뉴욕 영화로 만나는 도시
스콧 조던 해리스 지음, 채윤 옮김 / 낭만북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책장에 처박아 두었다가 얼마 전에 읽은 '필름 파리'에 이어서 같은 출판사의 '필름 뉴욕'을 읽었다. 아마 세트로 샀었던 모양이다. 품절된 책이기는 하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리뷰하는 것이 의미없지는 않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44편의 스틸컷과 리뷰가 실려 있는 책으로 '필름 파리'와 구성은 같다. 짧은 리뷰들은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르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번역'이다. 역자가 영화와 영화사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번역된 문장이 도무지 읽히질 않는다. 영역에서 흔히 문제되는 피동형 문장으로의 번역은 기본이고(우리말은 피동형 문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와 술어가 제대로 호응하지 않는다. 여러 번 읽어도 의미는 파악되지 않고,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으로 돌아와 다시 몇 번을 읽게 된다. 정말 안좋은 번역의 요건은 다 갖추었다. 이 책을 산 사람이 후회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렇다.


  이 책을 엮은 스콧 조던 해리스는 뉴욕의 영화 관광 안내서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촬영의 개요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포부는 저자만의 것이다. 인상적인 책도 아니고, 관광 안내서로도 흥미를 끌지 못하는 책이다. 거기에다 형편없는 번역이 더해져서 무어라 덧붙일 말도 없게 만든다.


  그런 글들이 있기는 하다. 비문(文)에다 글쓴 사람의 자의식 과잉,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현학적 문장의 나열들... 평론 읽다 보면 그런 한심한 글들 수두룩하게 나온다. 마치 이 책의 번역을 읽는 것과 같은 글들. 글읽기의 악몽을 제공해준다고나 할까. 대부분의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글은 잘 쓰지 못한 글이며, 그건 글을 쓴 사람 자신이 글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무슨 길을 안내할 수 있겠는가...


  리뷰에 꼭 평가하게 되어있는 별점에 하나를 클릭했다. 전혀 주지 않으면 글이 올라가지 않는 시스템이다. 별 하나도 솔직히 과하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산 사람은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들 것이며, 도대체 이걸 왜 샀나 후회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느니, 뉴욕이 배경으로 나온 영화 한 편 보는 게 낫다. 이 책에 나오지 않는 영화,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를 추천한다. 이 영화는 보스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뉴욕에서 촬영되었다. 뉴욕 시 당국의 영화 제작에 대한 세금 감면 혜택 때문이었다. 러닝 타임 2시간 30분이 어떻게 흘러가 버리는지도 모르게 만드는 영화. 이런 영화에서 스콜세지를 따라갈 사람은 없구나, 라는 것을 증명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신들린 연기는 언제 봐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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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볼 일 없는 작은 도시의 음악학교 성악 강사로 일하고 있는 왕차이링(장웬리 분)은 아주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파리 오페라단에서 프리마 돈나로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추녀까지는 아니지만 왕차이링의 외모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지저분한 피부와 작달만한 키, 살집있는 몸매는 오페라의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목소리만큼은 곱고 아름답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은 베이징으로 거주지를 옮기려고 애를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주증(居證)이 필요한데, 이미 거액의 돈을 건네준 베이징의 브로커는 늘 기다리라는 말만 한다. 그런 왕차이링의 주변에 모여든 이들의 인생도 허섭하기는 마찬가지. 시시한 재능을 가진 화가 지망생, 그곳 사람들에게 냉대받는 게이 발레리노, 왕차이링의 목소리에 반해서 쫒아다니는 공장 노동자까지. 과연 왕차이링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빛을 볼까...


  꾸창웨이 감독의 2007년작 '입춘(立春)'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주변부에 자리한 이들이다. '예술가병'에 걸린 그저그런 인생들이 현실에서 바스라지는 모습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병'과 비슷한 '영화병'이라는 것도 있다. 자신이 가진 예술과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병. 그 병에는 별다른 치유책이 없다. 성공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개는 청춘의 시간을 내던지다 망가지고 잊혀진다. 어쩌면 '입춘'의 주인공 왕차이링도 그 '예술병'에 걸린 사람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세월'과 '현실'이 그것이다. 흘러가는 시간과 엄혹한 현실이 어설픈 기대와 희망을 깨부수어 버린다.


  왕차이링이 가진 재능이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부르는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Tosca)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듣다 보면, 그 절절함이 마음을 울린다. 사랑하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비운의 여주인공이 신 앞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 신실한 믿음으로 착하게만 살아온 토스카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토스카처럼 왕차이링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비통함을 드러내듯 그 아리아를 자주 부른다. 사랑했다고 믿은 남자에게는 모욕적으로 차이고, 게이 발레리노에게서는 위장 결혼을 제안받는다. 왕차이링의 인생에 도무지 볕들 날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꾸창웨이 감독은 시련과 좌절의 연속인 왕차이링의 인생에 섣불리 희망을 선사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이 여자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꿈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고, 여자는 주변의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사기까지 당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예술에 매혹당한 것이 잘못인가? 그리고 그것에 인생을 바쳐서 살겠다는 꿈이 무모하기만 한 것인가? 왕차이링이 영화 속에서 부르는 성악곡 가사는 한결같이 아름답다. 노래의 날개 위에 연인을 태우고 가고 싶다는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 봄에는 가난한 마음의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슈베르트의 '봄의 찬가'. 그 고결하게 빛나는 가사들과는 달리 왕차이링의 현실은 그야말로 '시궁창'이다.


  어디 왕차이링 같은 낙오자가 한둘이겠는가? 화가 지망생은 너절한 사기꾼이 되고, 게이 발레리노는 감옥에 갇힌다. 그렇게 주변부를 맴도는 시시껍절한 인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짠해진다. 예술이 그들의 인생을 망친 것인지, 삶이 예술을 버리게 만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당신들 말야,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어림없지'라고 조롱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러한 꿈을 가진 이들의 마음 깊이 흐르는 열정마저 폄하할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은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는 왕차이링이 나온다. 그건 꾸창웨이 감독이 극중의 왕차이링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꿈을 그렇게나마 이루게 해주고 싶었던 감독의 따뜻한 연민은 마음을 울린다. 자신의 딸에게 나방의 짧은 삶에 대한 동화를 읽어주던 왕차이링은 사람은 그 보다는 행복하지 않냐고 말한다. 왕차이링에게 예술은 짧았고, 살아야할 인생은 길었다. 매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버리는 봄이 늘 슬펐던 왕차이링에게 딸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의 봄인지도 모른다.


  장예모, 첸 카이거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꾸창웨이 감독은 2005년작 '공작(Peacock)'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 영화에서도 아주 좋은 연출력을 보여준다. 여주인공 역을 맡은 장웬리는 그의 아내로, '입춘'으로 2007년 로마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속의 왕차이링은 '박색(色)'에 가깝지만, 그것은 영화를 위해 일부러 살을 찌우고 분장한 모습이다. 영화제 수상 사진을 보고 다른 사람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실제로는 매우 아름답다.  

 


*사진 출처: moviedoub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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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말이지, 아버지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 봤어. 결국 부모로서의 성공은 자식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지. 우리 아버지는 어떤지 모르겠네."


  아들 슈이치(우에하라 겐 분)는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앞에서 태연하게 그런 말을 늘어놓는다. 그 말을 듣는 아버지의 속이 편할 리 없다. 아들 슈이치는 며느리 키쿠코(하라 세츠코 분)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고, 시집간 딸은 남편과 불화가 심해서 툭하면 보따리 싸들고 친정에 온다. 시아버지 싱고는 아들에게 냉대받는 며느리가 안쓰럽고, 어떻게든 아들 내외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하려고 애를 쓴다. 과연 그의 바램대로 아들 내외는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산의 소리(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는 한 가족의 일상에 내재된 균열과 상처를 담아낸다. '안즈코(1958)'에서 딸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버지로 나왔던 배우 야마무라 소가 이 영화에서는 사람 좋은 시아버지로 나온다. 며느리를 아끼다 못해 자식 보다 더 예뻐한다는 불평을 딸과 아내가 쏟아낸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뿐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자신의 가족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게 살갑지 않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가장 걱정하는 동안,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에 무관심하며, 친정으로 애들 데리고 온 딸은 속 긁는 소리만 하고, 아들은 밖으로 나돈다. 이 집안 사람들의 가족으로서의 유대와 정서는 여기 저기 균열이 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그들 내면의 풍경은 황량하다.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내는 이런 가족 드라마는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하면 잘 풀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 속에는 구불구불하게 얽힌 길이 있으며, 도무지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삶이 가진 복잡성, 그것이야말로 이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진중하고 치열하게 탐구하고자 했던 주제였다. '산의 소리'에서 주인공 싱고가 맞부닥뜨리는 집안의 문제는 며느리에게 따뜻하게 대해주고, 아들의 바람기를 잡으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싱고에게 며느리 키쿠코의 유산(産) 소식은 예기치 못한 충격을 준다. 그것이 전적으로 키쿠코의 의지로 결정한 일이라는 점은 키쿠코와 이 가족의 결별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키쿠코의 그런 주체적이고 강단있는 결정은 오늘날의 관객에게도 나름의 충격을 준다. '자식이 있으면 밖으로 나돌던 남자는 언젠가 돌아온다'고 믿던 시대에 키쿠코는 어렵게 생긴 아이를 스스로 버린다. 더군다나 늘 순종적이고 웃는 얼굴을 보이던 키쿠코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남편 슈이치는 늘 아내를 '아이 같다'며 못마땅해 하고 비웃는다. 그 말의 뜻은 '순진무구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 어떤 매력도 없고 아이처럼 세상물정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 '아이 같은' 여자를 자신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어해서 며느리로 삼았다. 그 시대의 혼사는 대부분 부모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싱고의 딸이 자신의 괴로운 결혼 생활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친구의 미망인이 팔아달라고 부탁한 '노(能, 일본의 전통 연극)'의 가면을 흥미있게 들여다 보는 장면이 나온다. '노멘(能面)'이라고 부르는 가면은 표정이 없다. 연기하는 배우들은 오로지 고개의 움직임만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해 낸다. 싱고가 매혹된 '노멘'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는 며느리 키쿠코의 항상 웃는 모습이 순진무구한 아이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의 첫사랑이었던 아내의 언니와도 닮았던 것은 아닐까?


  "당신은 미인이었던 내 언니와 결혼하려고 했죠. 언니가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말이에요. 불쌍한 언니..." 


  좌절된 첫사랑과 별다른 애정없이 이어진 결혼 생활, 아내의 애정은 과도하고 무분별하게 아이들에게 투사되었고 제멋대로 자라났다. 결국 그의 노년에 그가 목도하는 가정의 균열은 당연한 것이다. 키쿠코는 그 근원을 들여다 보면서 자신의 결심을 굳혔을 것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그 어떤 것으로도 지탱해 나갈 수 없는 것이라고.


  여름에 해바라기를 보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스산하고 메마른 겨울 공원에서 만난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서로 못다한 말들을 가슴에 꾹꾹 눌러담으며, 대화의 끝무렵에 싱고는 공원의 경치가 좋다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겨울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사라진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로 만났지만, 가장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그 둘의 마지막은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웠다. '설국'으로 유명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가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작품이기도 했다. 절제된, 그러나 좌절된 정념(念)의 여정을 '산의 소리'는 담담히 그려낸다.



*사진 출처: fand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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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자 위에 놓인 귤 하나, 그 작은 것으로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생활을 꾸려가는 거야."


  결혼을 앞둔 딸에게 아버지는 너무 경제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말고 소박한 것에서 출발하라고 그렇게 충고한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린 시절 '안즈(살구)'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던 안즈코(가가와 교코 분)는 유명한 소설가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안즈코에게 아버지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현명한 인생의 상담자이기도 하다. 여러 구혼자들을 만나 보다가, 결국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같이 자란 료키치(기무라 이사오 분)와 결혼하게 된 안즈코. 그러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어렵고 마음의 갈등은 커져 간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안즈코(Little Peach, 1958)'에는 결혼의 풍경, 그것도 꽤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내면의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접힌 부채가 펼쳐지면서 보이는 그림처럼, 접혔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결혼의 실체가 안즈코에게 다가온다. 자신의 부모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결혼 생활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 료키치는 소설가로 성공하기를 꿈꾸며 글을 쓰지만, 가진 재능은 턱없이 부족하고 오직 자존심만이 하늘을 찌른다. 장인의 명성에 대한 질투는 아내에 대한 온갖 짜증과 트집잡기로 이어진다. 이 남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찌질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럼에도 안즈코는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애를 쓴다. 여성 관객들에게 '안즈코'는 고구마 백 개쯤 먹은 답답함과 울분을 선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안즈코와 장인에게 돼먹지 못한 언사와 행동으로 일관하는 남편 료키치. 그의 찌질함과 무례함은 영화 내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기세이지만, 속 깊은 이 부녀()는 묵묵히 감내할 뿐이다. 도대체 왜, 안즈코는 결혼 생활을 쉽사리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토록 곱게 키운 딸의 시련과 고생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묵묵히 딸의 결정을 기다리기만 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그 시대가 다 그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흠은 남자에게는 순간이지만, 여자에게는 평생을 가지."


  여기에서 흠이란 '이혼'을 뜻한다. 아버지는 딸의 이혼 가능성을 언급하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한다. '이혼녀'라는 사회적 낙인(烙印)이 평생을 가던 시절에 지지고 볶으며 살더라도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마치 딜레마 같다. 서서히 말라 죽으나, 남은 생애 동안 엄혹한 비바람 속에 서 있거나. 물론 지금 시대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본질, 즉 상대방을 배려하고 인내하면서 매번 새롭게 닥치는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함이 없다. 그것이 힘든 사람에게 출구로서의 '이혼'이 안즈코가 살던 시대 보다는 좀 더 쉽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3년여의 짧은 결혼 생활 이외에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 결혼 생활의 끝은 그에게 깊은 우울감을 남기기도 했다. '안즈코'에서 그가 그려내는 결혼의 풍경은 지독한 혐오의 감정까지는 아니지만, 근본적인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편과 친정을 오가는 어정쩡한 생활을 이어가면서 안즈코의 내면은 더욱 더 피폐해질 뿐이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결혼 전, 여유있고 평안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던 안즈코의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곤궁한 결혼 생활은 피아노마저 팔게 만든다. 궁기 가득한, 생기 잃은 안즈코에게 결국 결혼이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안즈코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을까? 영화의 결말은 그 대답을 유보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혼의 풍경이 칙칙한 회색의 것이기는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유머 감각이 가득하다. 이 영화는 원작이 있는데, 1956년에서 이듬해까지 '동경신문'에 연재되었던 무로우 사이세이의 동명 소설이 그것이다. 원작이 가진 탄탄한 구조와 뛰어난 문장을 영화 속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안즈코가 아버지의 군대 시절 이야기를 듣다가 결혼을 평생 복무해야 하는 지겨운 군대 생활로 비유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남편 료키치가 안즈코에게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의견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에 대한 안즈코의 답이 걸작이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 소설은 미인과 같다고. 뭘해도 예쁜 사람이 있잖아. 목소리나 걷는 모습 같은 거 말야. 소설도 그렇게 완전한 것이 되었을 때 편집자가 사려고 한다고."


  글에 대한 재치있는 비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찌질한 남편은 그럼 내 소설은 추녀인가 보군, 하며 이죽거린다. 그런 생동감 있는 대사들이 이 영화의 우울함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다.


  '안즈코'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일본인이 쓴 리뷰를 읽게 되었는데, 그는 이 영화의 영문 제목 'Little Peach'에 이의를 제기했다. 원래 '안즈'는 '살구(apricot)'에 해당하는 단어이고, 영어 자막에서도 그렇게 표기하면서(안즈코가 구혼자와 통성명을 하는 장면에서 단 한번 언급된다) 왜 제목을 '작은 복숭아'로 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그런 것이 살짝 걸리는 부분인가 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에게 '살구 같다'라는 표현 보다는, '복숭아 같다'라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영어 단어 'peach'가 가진 의미도 '예쁜 아이, 멋스러운 사람'이란 뜻이다. 그 어여쁜 안즈코가 결혼으로 인해 생고생을 하면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괴로운 영화.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결혼의 풍경은 그러했다.



*사진 출처: tiff-j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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