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서 그다지 할 말이 없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가 아주 형편없거나, 반대로 매우 좋거나 하는 경우에는 나름대로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그저 그런, 딱히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영화들은 뭔가 말문을 막히게 만든다. 브라질 출신의 감독 알레 아브레우가 2013년에 만든 이 애니메이션도 그렇다. '보이 앤 더 월드(The Boy and the World)'는 150여개의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47개의 영화상을 받아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기존의 애니메이션과는 차별화되는 색감과 작화가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주제도 묵직하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큰 감명은 받지 못했다. 솔직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어린 소년 쿠카는 자연 속에서 자유로움과 행복을 느낀다. 농사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쿠카의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난다. 쿠카는 아빠를 그리워하다 아빠를 찾으러 집을 나선다. 그러니까 '보이 앤 더 월드'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면 '아빠 찾아 삼만리'가 되겠다. 알레 아브레우는 쿠카의 여정 속에 브라질의 근현대사를 펼쳐놓는다. 가난한 농민을 수탈하는 지주,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나는 공장 노동자들,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주의자들, 민중을 억압하는 군부와 독재자... 확실이 이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느 상영회에서는 이걸 보다 아이가 무서운 나머지 울었다는 이야기도 읽었다. 아이들에게 이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어렵고 상징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4년이 걸렸다는 제작 과정은 애니메이션의 작화 과정을 모두 수작업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다.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색감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캐릭터들의 묘사는 정말 빼어나다. 그런데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꽤 무겁다. 특히 감독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무분별한 소비에 대해 강한 비판적 어조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면직물 공장의 생산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묘사되고 있다. 자동화 기계를 들여오는 자본가는 악인처럼 등장한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이 전세계로 팔려나가는 장면에는 무수한 컨테이너와 소비와 향락을 조장하는 TV 광고들이 교차 편집된다. 삼림을 불태우고 자연을 파괴하는 장면에서는 실사 자료 화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보이 앤 더 월드'는 결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작품이 아니며, 복잡한 정치적 서사를 품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매우 무미건조하게 펼쳐진다. 어른들을 위한 본격 잔혹 동화 같다.

  나는 그쯤에서 작은 의문을 품는다. 저렇게 독창적이고 눈길을 끄는 작화 속에 왜 그토록 딱딱한 이야기들을 끼워넣었을까? 우리가 사는 현실에 많은 구조적 불평등과 잘못된 정치 체제, 자본의 횡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보이 앤 더 월드'는 그걸 요약해서 그림으로 보여준다. 뭔가 다 아는 이야기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기분이 든다. 아이들 교육용으로 만들었다면 전적으로 실패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에서 원하는 것은 꿈과 희망이지, 고통스럽고 너절한 현실이 아니다. 적절히 순화되고 가공된 현실, 그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보이 앤 더 월드'는 그 기대를 깨버린다. 무겁고 과도한 정치적 메시지가 그림을 압도해 버린다.    

  아빠를 찾아 길을 떠났던 쿠카는 노인이 된 모습으로 자신이 사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의 집 밖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자연 속에 머물고 있다. '보이 앤 더 후드'는 어린 쿠카가 바라본 절망과 부조리가 가득찬 현실에 그렇게나마 희망의 씨앗을 던지며 끝낸다. 이 맥아리 없는 애니메이션 대신에 '이웃집의 토토로(1988)'를 한번 더 보며 아련한 추억과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사진 출처: commonsense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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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사람 키만한 커다란 우체통이 설치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북경의 우편배달부 샤오두는 상사로부터 새로운 구역의 배달 업무를 부여받는다. 전임 집배원은 배달해야할 편지들을 몰래 뜯어본 혐의로 체포되었다. 매우 내성적이고 다른 이들과 그 어떤 교류도 하지 않는 샤오두는 결혼한 여동생 부부와 살고 있다. 여동생은 신혼집을 구해놓고도 오빠를 떠나지 못한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뜬 후로 둘은 어린 시절부터 의지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우연히 뜯어서 보게 된 편지 한 장을 시작으로 샤오두는 몰래 남들의 편지를 뜯어서 보는 것이 일과가 된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편지의 사연을 읽고 자신의 맘대로 답장을 위조해 보내기도 한다.

  '포스트맨(郵差, 1995)'은 중국 6세대 감독 허지엔준의 2번째 장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촬영은 중국에서 했으나, 후반 작업은 해외에서 해야만 했다. 중국 정부의 검열에 걸려서 작업을 더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영화는 9년이 지난 2004년이 되어서야 해금되어서 자국에서 상영을 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었길래 그랬을까? '포스트맨'은 매우 불편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샤오두가 배달해야할 편지를 몰래 뜯어서 읽는 행위 자체도 문제가 있는데, 편지의 인물들과 내용들도 예사롭지가 않다. 매춘부의 사랑 이야기, 동성애자들의 마약 중독 문제, 이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중국 정부 당국이 진짜 열받을 만했겠구나 싶기도 하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읽기 시작한 편지들은 샤오두를 점점 더 비윤리적인 행동에 둔감하게 만든다. 죽은 아들의 소식을 모르는 노부부에게 아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편지를 써보낸다. 편지의 사연으로 여자의 직업이 매춘부라는 것을 알고는 스토킹을 하기도 한다. 관음증은 타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더 나아가 샤오두는 여동생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까지 품게 된다. 감독 허지엔준은 정말 갈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이었을까?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불쾌함과 혼란을 안겨준다. 거기에는 불친절하고 모호한 서사도 한몫을 한다.

  샤오두가 읽는 편지의 사연들은 특정되지 않은 여러 목소리들로 재생된다. 관객들은 편지의 인물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편지 훔쳐읽기에 중독된 그는 점점 더 대담해진다. 매춘부와 게이의 집을 직접 찾아가보는 패기까지 보이는데, 샤오두의 방문을 받은 그들도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마약 중독자 게이는 샤오두에게 마약의 느낌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포스트맨'은 마치 북경이란 도시의 더럽고 음침한 지하 하수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이 도시 사람들의 비밀을 보여주겠어요, 그건 말이죠... 허지엔준은 '편지'라는 소재로 관객들을 그 비밀의 미로로 안내한다. 관객들은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일그러진 면면을 확인하게 된다.

  1995년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는 이 영화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포스트맨'은 같은 해, 데살로니키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싱가포르 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나는 이 영화가 좋은,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촬영과 사운드는 저예산의 단점을 여실히 드러내며, 서사는 파편화되면서 길을 잃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중국 정부의 검열 정책에 맞서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와 맞닿아 있다. 그 점만이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덕목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상사는 샤오두에게 배달 업무를 잘 해냈다며 다른 구역을 더 맡긴다. 그곳은 새롭게 지어진 번화한 상업지구이다. 영화의 처음처럼 마지막도 샤오두가 설치하는 우체통이 보인다. 도시는 커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더 많이 모일 것이다. 어쩌면 샤오두가 설치하는 우체통은 차마 말하지 못한 은밀하고 고통스럽고, 더러운 욕망들의 집합소를 상징하는 것인지 모른다. 허지엔준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본 시대의 음울한 내면을 '포스트맨'에 담아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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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보면 허술하고 우스운 부분도 있겠지만, 의외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장면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공자우의 자객들이 심야의 공터에 장기판을 그려놓고 부홍설과 연남비를 장기 두는 것처럼 공격하는 장면이 그렇다. 우리의 주인공 부홍설은 자객들의 꽤 공들인 장기판 세팅을 그리 어렵지 않게 무력화해버리기는 한다.

  이 영화에서 또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노파 자객의 등장이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노파 자객의 활약은 생각보다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와호장룡(卧虎藏龙, 2000)'에 나오는 푸른 여우의 선구적 캐릭터처럼 보일 정도다. 무협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약하고 울기나 하는, 때로는 짐짝처럼 귀찮은 존재처럼 그려질 때가 많은데 이 영화에서는 여성 자객들도 여럿 나온다. 또한 음흉하기 짝이 없는 기생 명월심 캐릭터도 있고, 지고지순한 추옥정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빈약한 서사를 나름대로 충실하게 메꾸어 나가는 역할을 한다.

  계속 이어지는 '대결-이동-대결-이동'에 좀 지칠 무렵, 부홍설은 공자우의 근거지에 들어간다. 가면을 쓴 공자우와의 대결에서 이기고 보니, 상대가 연남비였다. 그는 가짜였다. 진짜 공자우는 명월심을 보내 부홍설에게 자신의 밑에 들어오면 부와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부홍설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강호의 일인자가 되기 위해 고향과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 방랑의 세월을 보냈던 그에게 돈과 권력, 여자는 먼지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는 마치 도인처럼 행동한다. 영화는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초연한 부홍설의 과거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다만 관객은 그가 엄청난 무공을 가졌다는 것과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라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연히 만난 가난한 창녀에게 밥을 사주고 여비를 건네는 모습은 상남자 그 자체이다.

  다시 영화의 제목으로 돌아간다. '천애명월도'는 칼의 이름이 아니다. '천애(天涯)', 이승에 살아있는 핏줄이나 부모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명월(明月)'은 그가 한 때 마음을 주었던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기생 명월심을 가리킨다. '도(刀)'는 칼 하나에 의탁해 강호를 떠도는 부홍설 자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이라는 고독한 검객의 방랑 서사를 일컫는 제목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의 내적 여정은 모두 생략해 버리고, 오직 그의 출중한 무공만을 펼쳐서 보여준다. 과감한 물량 공세가 돋보이는 대결 장면들에 비해 인물들의 캐릭터 설정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적룡의 능수능란한 무술 연기와 다양한 장치들이 등장하는 대결 장면들을 보는 것으로도 나름대로 즐겁다. 적룡이 휘두르는 검이 특이한데, 팔에 끼운채 회전이 가능하며 쇠줄까지 장착된 검이다. '천애명월도'는 강대위와 더불어 쇼브라더스 무협 영화의 주역이었던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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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매카시즘은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보다 앞서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이 시작된 나라가 있었다. 종전 후 미 군정이 들어선 일본에서였다. 영화계에도 거센 사상 인증 광풍이 몰아쳤다. 당시 도호 소속 감독이었던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영화사에서 나와야만 했다. 먹고 살 방도가 막막해진 영화 감독은 고철 수집상이 된다. 그런데 자신이 모은 고철이 한국 전쟁에 쓰이는 군수 물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고물상 일을 때려친다. 골수 좌파 지식인이었던 그에게 전쟁은 범죄 행위였다. 그는 독립 영화사를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에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신념이 깔려 있다. 바로 이마이 타다시 감독이다. 그가 1963년에 만든 영화 '무사도 잔혹이야기(Bushido: The Cruel Code of the Samurai)'에도 그런 그의 확고한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영화는 도쿠가와 막부 형성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7대에 이르는 무사 가문의 잔혹사를 담았다. 영화의 제목에서 '잔혹(殘酷)'이라는 말을 대체할 단어는 없다. 지배 계급에 대한 피지배 계급의 굴종과 피학의 역사. 영화의 원작은 난조 노리오의 소설 '피학(被虐)의 계보'이다. 작가 난조 노리오의 이력도 독특하다. 그는 경제학과 교수로 당대의 엘리트였다.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설로 시대와 인간에 대한 탐구를 했던 작가였다. 어떤 면에서 이마이 타다시가 난조 노리오의 소설을 택한 것은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원작이 가진 통렬한 사회 비판의 메시지는 영화를 통해 완벽히 구현된다.

  일본의 전국 시대, 낭인자객의 삶을 살던 이쿠라는 사무라이로 받아준 영주 집안에 충성을 맹세한다. 그것이 이쿠라 가문의 시작이었다. 영주의 잘못을 덮기 위해 할복으로 삶을 마감했던 그의 비극은 7대에 이르는 후손까지 이어진다. 죽은 영주에게 충성을 바친다며 할복하는 2대, 남색을 밝히는 영주의 시동(侍童)이 되었던 3대, 아내와 딸을 영주에게 바쳐야 했던 4대, 정신병을 앓는 영주 뒤치닥꺼리하는 메이지 시대의 5대, 가미카제로 허무하게 죽은 6대, 그리고 현대의 삶을 사는 7대로 이어진다. 7대에 이르는 이쿠라 가문의 사무라이를 연기한 나카무라 킨노스케의 열연이 돋보인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괴로움과 먹먹함 없이 보기는 어렵다. 왜 그들은 '무사도'를 맹신하며 자신과 가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광신의 모습에 가깝다. 딸을 대영주의 노리개로 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까지 겁탈하려는 영주에게 4대 이쿠라는 그 어떤 반항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할복의 명도 기꺼이 받는다. 죽기 전에 아들에게 사무라이의 본분은 충성임을 가르치고, 어린 아들은 그것을 열심히 외운다. 이쯤되면 무사도는 신념이 아니라 저주 같다.


  개화기 메이지 시대에도 그 저주는 이어진다. 가문에서 내쳐진 미친 영주를 돌보게 된 5대 이쿠라는 사법 시험을 앞두고 있다. 영주 수발을 하느라 사법 시험은 떨어지고, 심지어 자신을 대신해 돌보던 약혼녀가 겁탈을 당했는데도 영주를 보살핀다. 이 사무라이 집안에는 굴종의 유전자가 뼛속 깊이 새겨져 대물림되는 것인가? 한탄이 절로 나온다. 막부는 끝났지만 이쿠라 가문의 수난은 이어진다.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가 주군의 위치를 대신한다. 양복을 입은 현대의 이쿠라에게는 '회사'가 새로운 주군이다. 상사는 이쿠라에게 경쟁 회사에 근무하는 약혼녀를 이용해 입찰 정보를 빼오도록 압력을 넣는다. 회사에 충성을 다하려는 이쿠라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복잡한 도시의 도로를 한 무리의 회사원들이 걸어간다. 이마이 타다시는 관객에게 직설적으로 묻는 것 같다. 과연 피지배 계급의 맹목적 충성과 자발적 굴종의 역사가 끝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샐러리맨들에게 그 장면은 매우 불편하게 보일 수 있다. 우리는 회사의 노예가 아니며, 오너는 모셔야할 주군이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그런 눈에 보이는 외적 객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무사도 잔혹이야기'는 신념의 차원, 더 나아가 무의식까지도 지배하는 계급 의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요구한다.

  흑백 필름 속에 펼쳐진 이쿠라 가문의 잔혹극 속에 빛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마이 타다시는 어둡고 황량한 배경 속에 그들을 가두고 피학의 비극을 그려낸다. 이쿠라 가문의 사무라이들은 오직 주군을 위해 칼을 휘두른다. 그것은 결국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앗아간다. 그럼에도 버릴 수 없었던 신념은 '무사도'란 이름의 괴물이었다. 일본의 역사를 관통하는 계급의 문제, 그 무섭도록 견고한 착취와 학대의 역사를 '무사도 잔혹이야기'는 처절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그 잔혹사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또한 그것이 이쿠라 가문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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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idecaphobia. 왜 이 단어의 뜻을 다큐의 제목으로 썼을까? 'The Fear of 13(2015)'은 사형 선고를 받고 22년 동안 복역하다 무죄가 입증되어 풀려난 닉 야리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는 수감 기간 동안 우연히 접하게 된 책들로 인해 진정한 내적 계몽에 이르게 된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수많은 단어들을 독방에서 수십 번씩 이미지를 상상해가며 깨우쳐 간다. 'tridecaphobia' 같은 단어도 그랬다. 겨우 초등학생 수준의 문해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1000권이 넘는 온갖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자아의 눈을 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책에서 획득한 지식과 스토리텔러의 재능을 다큐 내내 입증해 보인다. 그는 명료한 발음과 적절한 단어 선택으로 다큐의 내레이션을 전적으로 지배한다. 그 뿐만 아니라 실감나는 묘사를 위해서 표정, 의성어, 손짓과 몸짓을 사용하는 재능까지 보여준다. 원맨쇼가 따로 없다.

  남자는 자신이 어떻게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오게 되었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우한 어린 시절, 마약과 비행으로 얼룩졌던 청소년 시절, 객기와 불운의 온갖 총합처럼 보이는 억울한 누명에 이르기까지 관객은 닉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다큐의 구성은 단순하다. 닉이 들려주는 과거가 재연된 화면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보다보면 그런 구성에 지루함마저 느끼는데, 그 지점에서 이 다큐의 감독 데이비드 싱턴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다큐에서 감독이 한 역할은 닉에게 판 깔아주며 발언의 기회를 전적으로 넘긴 것과, 그저 그런 재연 화면 구성한 것 밖에 없다. 'The Fear of 13'은 그런 면에서 다큐 감독의 작가적 관점에 대한 유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싱턴은 그만큼 닉 야리스를 신뢰한 것일까? 물론 닉 야리스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 강간죄로 22년 동안 복역했고, 무죄로 풀려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야리스 본인이 들려주는 인생의 고백은 모두 진실일까? 닉 야리스의 과거 사건에 대한 회상과 고백에 한치의 거짓도 들어가지 않았음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 무엇보다 데이비드 싱턴은 감독으로서 그에 대한 책임을 내던져 버렸다.

  이런 데이비드 싱턴과 대비되는 지점의 다큐 감독이 있다면 에롤 모리스일 것이다.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 1988)'에서 에롤 모리스는 살인의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는 랜달 아담스의 이야기를 파고 들어간다. 그는 사건의 기록을 검토하고, 직접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 했다. 에롤 모리스는 그 과정을 통해서 랜달 아담스에게 씌워진 살인 혐의는 잘못된 것임을 입증해 보인다. 이 놀라운 다큐는 랜달 아담스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그는 누명을 벗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랜달 아담스가 무죄일 것이라는 가정을 에롤 모리스는 치밀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실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그런데 'The Fear of 13'의 데이비드 싱턴은 닉 야리스의 발화에 처음부터 진실의 권위를 부여한다. 매우 무능하며 게으른 태도이다. 이 다큐에서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20세기 감옥의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사형수의 오딧세이아'이다. 이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그의 유창한 말솜씨는 관객의 이성적 사고와 합리성에 도전장을 던진다.

  수감 기간 중에 알게 되어서 옥중 결혼에 이르게 된 아내에 대해 닉 야리스는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낸다. 실제는 어땠을까? 그는 4번째 결혼한 여자와 살고 있다. 그는 방송에도 출연해서 나름 유명인사가 되었고 책도 여러 권 썼다. 주 검찰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3백만 달러의 보상금도 받아냈다. 이 다큐가 유명해졌다는 데에 자신의 지분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 모양이다. 감독이 출연료를 주기로 했는데 주지 않았다는 말을 꺼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에롤 모리스가 겪은 기막힌 불운(랜달 아담스는 다큐 수익금을 내놓으라며 소송을 걸었다)이 데이비드 싱턴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사형수가 무죄가 입증되어 풀려나는 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The Fear of 13'은 감동보다는 쓰고 기이한 뒷맛을 남긴다. 아주 잘 연출된 한 편의 연극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큐는 그가 들려주는 놀라운 인생사로 가득차 있지만, 거기에는 관객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진실의 영역이 있다. 나는 새삼 미드 닥터 하우스의 명언을 떠올렸다. 'Everybody lies'. 우리는 다큐가 진실을 들려준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The Fear of 13'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그러하다. 닉 야리스는 다큐에서 그런 말을 한다.

  "나는 수많은 책 속의 이야기를 읽었어요.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인생 이야기죠."

  이 다큐의 관객들은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대단한 능력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가 들려주는 사형수의 오딧세이아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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