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서 그다지 할 말이 없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가 아주 형편없거나, 반대로 매우 좋거나 하는 경우에는 나름대로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그저 그런, 딱히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영화들은 뭔가 말문을 막히게 만든다. 브라질 출신의 감독 알레 아브레우가 2013년에 만든 이 애니메이션도 그렇다. '보이 앤 더 월드(The Boy and the World)'는 150여개의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47개의 영화상을 받아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기존의 애니메이션과는 차별화되는 색감과 작화가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주제도 묵직하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큰 감명은 받지 못했다. 솔직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어린 소년 쿠카는 자연 속에서 자유로움과 행복을 느낀다. 농사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쿠카의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난다. 쿠카는 아빠를 그리워하다 아빠를 찾으러 집을 나선다. 그러니까 '보이 앤 더 월드'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면 '아빠 찾아 삼만리'가 되겠다. 알레 아브레우는 쿠카의 여정 속에 브라질의 근현대사를 펼쳐놓는다. 가난한 농민을 수탈하는 지주,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나는 공장 노동자들,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주의자들, 민중을 억압하는 군부와 독재자... 확실이 이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느 상영회에서는 이걸 보다 아이가 무서운 나머지 울었다는 이야기도 읽었다. 아이들에게 이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어렵고 상징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4년이 걸렸다는 제작 과정은 애니메이션의 작화 과정을 모두 수작업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다.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색감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캐릭터들의 묘사는 정말 빼어나다. 그런데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꽤 무겁다. 특히 감독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무분별한 소비에 대해 강한 비판적 어조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면직물 공장의 생산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묘사되고 있다. 자동화 기계를 들여오는 자본가는 악인처럼 등장한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이 전세계로 팔려나가는 장면에는 무수한 컨테이너와 소비와 향락을 조장하는 TV 광고들이 교차 편집된다. 삼림을 불태우고 자연을 파괴하는 장면에서는 실사 자료 화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보이 앤 더 월드'는 결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작품이 아니며, 복잡한 정치적 서사를 품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매우 무미건조하게 펼쳐진다. 어른들을 위한 본격 잔혹 동화 같다.

  나는 그쯤에서 작은 의문을 품는다. 저렇게 독창적이고 눈길을 끄는 작화 속에 왜 그토록 딱딱한 이야기들을 끼워넣었을까? 우리가 사는 현실에 많은 구조적 불평등과 잘못된 정치 체제, 자본의 횡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보이 앤 더 월드'는 그걸 요약해서 그림으로 보여준다. 뭔가 다 아는 이야기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기분이 든다. 아이들 교육용으로 만들었다면 전적으로 실패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에서 원하는 것은 꿈과 희망이지, 고통스럽고 너절한 현실이 아니다. 적절히 순화되고 가공된 현실, 그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보이 앤 더 월드'는 그 기대를 깨버린다. 무겁고 과도한 정치적 메시지가 그림을 압도해 버린다.    

  아빠를 찾아 길을 떠났던 쿠카는 노인이 된 모습으로 자신이 사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의 집 밖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자연 속에 머물고 있다. '보이 앤 더 후드'는 어린 쿠카가 바라본 절망과 부조리가 가득찬 현실에 그렇게나마 희망의 씨앗을 던지며 끝낸다. 이 맥아리 없는 애니메이션 대신에 '이웃집의 토토로(1988)'를 한번 더 보며 아련한 추억과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사진 출처: commonsense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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