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1886-1965)는 일본의 침략전쟁이 정점으로 향해가던 1943년에 이 소설의 상권을 발표했다. 소설에는 1936년부터 1941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오사카 거상 마키오카가의 네 자매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소설의 내용이 전시(戰時)와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후의 집필분에 대한 발표와 출간을 금지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종전 이후인 1948년에 소설을 완성했으나 이제는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검열이 문제였다. 전쟁을 미화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삭제할 것을 권고받았다. 마침내 1949년에 소설의 전권이 완간되었다(출처: ja.wikipedia.org).

  군국주의 정부 치하에서는 전시와 동떨어진 호사스러운 이야기로, 종전 이후 GHQ 통치 시절에는 전쟁 미화를 이유로 출판이 어려웠던 소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細雪)'에는 그런 배경이 숨겨져 있다. '부드럽게 흩날리는 눈'이란 뜻의 제목 '細雪'에서는 원작자의 유미주의적 감성이 느껴진다. 마치 1차 대전 직전의 서구 유럽 세계를 '아름다운 시절(Belle Époque)'로 부르는 것처럼 작가는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세계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의 그런 관점은 마키오카 가문 네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 1983)'은 네 자매가 벚꽃놀이를 위해 모이는 회합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세 자매는 첫째 언니 츠루코가 오길 기다리면서 대화를 나눈다. 막내 타에코는 부모가 남겨준 재산에서 자기 몫의 혼인지참금을 달라고 둘째 언니를 조른다. 둘째 사치코는 큰언니 츠루코의 허락이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마침내 나타난 츠루코는 셋째 유키코가 결혼을 해야 타에코가 그 돈을 받을 수 있다며 그 요청을 거절한다. 이 집안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는 셋째 유키코의 혼사이다. 매우 내성적인 성품의 유키코는 거듭되는 혼담에 지쳐있다. 츠루코는 마키오카 가문의 명망에 걸맞는 혼처 자리를 알아보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그 와중에 자유분방한 막내 타에코는 남자 문제로 언니들의 골머리를 썩인다.

  비록 가세가 기울기는 했지만, 마키오카 자매들은 오사카 명문 거상 집안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가문의 실질적 수장은 장녀 츠루코로 츠루코는 동생들의 안위를 보살핀다. 그럼에도 대외적으로는 츠루코의 남편 타츠오가 '마키오카' 호적에 입적해서 가문을 대표하고 있다. 마키오카로 성씨를 바꾼 것은 둘째 사치코의 남편 테이노스케도 마찬가지. 이 집안의 남자들은 데릴사위로 마키오카 가문에 종속되어 있다. 네 자매 가운데  '마키오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를 가장 갑갑하게 느끼는 사람은 막내 타에코이다. 타에코는 불장난 같은 연애 사건으로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이 있다. 타에코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인형을 만들어 백화점에 납품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하층민 집안 출신의 사진사 이타쿠라와 결혼하려고 한다.

  마키오카 자매들에게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츠루코가 서른이 된 유키코의 혼담을 계속 결렬시키는 이유는 혼처 자리가 마키오카 가문의 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중년 남자의 재취(再娶) 혼담만 이어진다. 그럼에도 돈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속물적 판단을 거둘 수는 없다. 유키코는 자신의 결혼을 둘러싼 그런 압력에 완강히 저항한다. 계속 퇴짜를 놓으면서 진정으로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영화 '마키오카 자매들'에서 시대적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의 광기가 점차 고조되는 때였다. 영화 속 마키오카 자매들의 삶은 매우 안락하며 그 어떤 어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유키코가 선을 보는 호사스러운 음식점. 어디선가 들리는 비감한 노랫소리는 전선으로 떠나는 군인의 송별회가 열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전쟁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묘사된다. 유키코는 기차 안에서 자신을 훔쳐보던 앳된 얼굴의 군인이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수그리는 것을 본다. 술에 취한 타에코가 술집을 떠날 때, 거리를 뒹구는 신문에는 일본 관동군의 중국 침략 소식이 실려 있다.

  전쟁의 현실과 유리된 중산층의 삶. 마키오카 자매들이 살고 있는 오사카는 진공의 세계와도 같다. 그곳의 시간은 느리고 평온하게 흘러간다. 마침내 유키코는 마음에 드는 결혼 상대자와 만난다. 귀족 가문의 차남인 이 남자는 마키오카가에서 찾는 구혼자의 조건에 부합한다. 유키코가 결혼으로 상류층으로의 계층 이동에 성공하는 것과는 달리, 타에코의 위치는 급전직하한다. 애인 이타쿠라의 갑작스런 병사로 방황하던 타에코는 술집 바텐더와 살림을 차린다. 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은 가문의 물질적 지원을 거절하고 재봉사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로 한다.  

  영화 '마키오카 자매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40년대 제국주의 일본, 그리고 영화가 제작된 1983년이라는 시점 사이에는 무려 40년에 가까운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과연 영화가 개봉된 당시의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전쟁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는 벚꽃이 날리는 봄에서부터 세설이 내리는 초겨울까지, 마키오카 가문의 1년을 아름다운 화폭의 그림처럼 담아낸다. 그 풍광 속에는 비탄이나 눈물, 궁핍함은 물론이고 고통도 없다. 나라 안팎은 전쟁의 광풍이 몰아닥치고 있는데, 마키오카 자매들의 삶은 거기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존재한다. 츠루코는 유키코의 결혼을 앞두고 가보로 물려받은 값비싼 기모노를 온집안에 펼쳐놓는다. 촬영을 위해 특별히 대여한 수십억 원에 이르는 화려한 기모노를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에서 '전쟁'이라는 두 글자는 아스라이 사라져 버린다.

  이치카와 콘은 영화에서 전쟁의 공포와 패전의 수치심을 말끔히 제거하고, 오직 마키오카 가문 아씨들의 미시적 삶에 집중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있지만 냉철한 시대 인식이 결여된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감독 야마다 요지는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비판한다.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에는 원로 감독의 날카로운 역사적 성찰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치카와 콘의 안일한 복고주의 감성을 보여주는 '마키오카 자매들'은 실패작인가? 세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더이상 전쟁을 암울하게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면에서 '마키오카 자매들'은 그러한 인식의 변화를 나타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영화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원작, 도요타 시로 감독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猫と庄造と二人のをんな, 195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56.html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리뷰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
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yamada-yoji-voic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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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도련님(ぼんち, Bonchi, 1960)'은 번영하는 일본의 모습을 몽타주 쇼트로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거대한 공장들과 그곳의 굴뚝들, 도시의 빌딩숲,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 바야흐로 일본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고도 경제 성장 체제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쇼트는 크레인으로 촬영된 부감 쇼트이다. 늙은 남자는 후미진 골목의 낡은 목조 건물로 들어선다. 그는 조문을 하러 왔다. 거실에는 그 집의 주인 키쿠지와 두 아들이 있다. 머리가 허연 주인은 자신이 상인 집안의 후계자였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그렇게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철없는 도련님 키쿠지의 젊은 시절로 들어간다.

  영화의 제목 'ぼんち'는 오사카 거상(巨商)의 아들을 부르는 애칭이다. 전통적인 상업 도시였던 오사카에는 큰 부를 쌓은 상인 가문이 많았다. 영화의 주인공 키쿠지(이치카와 라이조 분)는 버선으로 일가를 이룬 상인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이다. 그런데 이 집안의 분위기는 어째 좀 이상하다. 키쿠지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이다. 키쿠지의 부친은 그저 가게에서 묵묵히 일만 할 뿐이다. 그는 집안의 대소사에 별다른 발언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키쿠지의 아내를 맘에 들지 않는다며 내쫒는다. 철없는 도련님 키쿠지는 그러거나 말거나 게이샤들을 끼고 사랑 놀음에 열중한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절대 결혼할 수 없다. 이 집안의 권력은 외할머니에게 있다. 외할머니가 거상 집안의 주인이며 키쿠지의 아버지는 데릴사위로 아무런 힘도 없다.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영화화한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으로 스타의 길에 들어선다. 감독 이치카와 콘에게도 그 영화는 특별했다. '불꽃'을 통해 이치카와 콘은 자신의 영화적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배우와 감독은 다시 만나서 영화를 찍었다. 영화사 다이에이는 오사카 출신의 소설가 야마자키 토요코(山崎豊子)가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제 서른을 앞둔 젊은 배우는 희끗한 머리의 중년 남자를 능청스럽게 연기해낸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치카와 라이조의 재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영화는 가모장(家母長)의 권위에 휘둘려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 키쿠지의 삶을 연대기로 보여준다. 방탕하고 분별력이 없는 도련님 키쿠지의 인생은 군국주의 일본의 흥망성쇠와도 겹친다. 감독 이치카와 콘은 개인의 인생과 시대가 겹치는 접점을 삽화적으로 제시할 뿐,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확대되는 동안 키쿠지의 사업은 점차 기운다. 영악한 게이샤 애인들은 이 어리석은 도련님을 철저히 이용해먹는다. 연합군의 공습 속에 마지막 남은 창고를 지켜내기는 하지만, 키쿠지는 사업 자금을 애인들에게 다 나누어 준다. 외할머니는 가문의 몰락을 예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결국 거상 집안의 부는 키쿠지의 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돈과 사람으로 흥청거렸던 거상의 가옥은 이제 비좁고 추레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이치카와 콘은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철부지 도련님 키쿠지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그려낸다. 그는 냉담한 혈족과 시대의 풍파 속에서 길을 잃었다. 키쿠지는 좋았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아들에게 결코 집을 팔지 않겠다고 말하는 키쿠지는 장사를 다시 시작할 거라는 희망도 갖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하녀는 젊은 키쿠지가 당당하게 집을 나서는 모습을 회상한다.

  영화 '도련님'은 표면적으로는 허랑방탕한 젊은 상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곰곰히 뜯어보면 거기에는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에 대한 기묘한 향수가 느껴진다. 가문의 부를 상속받은 키쿠지는 주색잡기에 아낌없이 돈을 쓴다. 도련님에게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다. 분명히 키쿠지의 몰락은 그 자신의 무분별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이다. 그럼에도 상인 가문의 오랜 전통을 끝장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전쟁'에 있다. 외부의 적대적 세력은 좋았던 시절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거기에서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은 결여되어 있다.

  영화는 오사카의 오랜 전통과 번영이 끝나버렸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은밀하게 드러낸다. '도련님'에서 보여준 이치카와 콘의 이러한 역사 인식은 그의 영화 '마키오카 자매들(細雪, The Makioka Sisters, 1983)'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이 영화는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1886-1965)의 소설을 영화화했다. 주인공들은 오사카 상인 집안의 자매들이다. 복고주의적 감성의 끝판왕인 이 영화에서 전쟁은 고통이 아닌 그리움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사진 출처: kookaimorita.livedoor.blog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영화들

미스미 켄지 감독,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
무숙자(無宿者, On the Road Forever, 1964)와 검(劍, Ken, 1964)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on-road-forever-1964-ken-1964.html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
나카노 스파이 학교(Nakano Spy School, 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nakano-spy-school-1966.html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
닌자(忍びの者, Shinobi no Mono,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shinobi-no-mono-1962-8.html

続・忍びの者(Shinobi no Mono 2: Vengeance, 1963)
新・忍びの者(Shinobi no Mono 3: Resurrection,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2-shinobi-no-mono-2-vengeance-196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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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암울한 초상


  "나 좀 죽게 네가 도와줘."

  뇌졸중으로 거동이 힘들어진 아버지는 딸에게 그렇게 부탁한다. 갑작스럽게 그 말을 들은 딸은 놀라움과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François Ozon 감독의 '다 잘된 거야(Everything Went Fine, 2021)'는 매우 민감한 윤리적 주제를 다룬다.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를 원하는 아버지 앙드레의 요청을 과연 딸 에마뉘엘은 수락할까?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Emmanuèle Bernheim는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남겼다. 작가의 부친은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Assisted suicide)'이라는 과정을 통해 삶을 마감했다. 영화 '다 잘된 거야'는 딸 에마뉘엘이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조력 자살(Assisted suicide)'은 안락사와는 좀 다른 개념의 죽음이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직접 치사량의 약물을 삼켜야 한다. 지난 9월 13일에 스위스에서 타계한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도 그렇게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3명의 사람이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을 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그러한 방식의 죽음이 갖고 있는 윤리적 논란과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프랑수와 오종은 깔끔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가족이 속한 계층적 배경이 '중산층'이라는 데에 있다.

  에마뉘엘의 아버지 앙드레는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이며, 어머니는 조각가이다. 에마뉘엘도 작가로서 나름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병고는 이 가족의 삶에 불편을 끼치기는 하지만 뒤흔들 만한 재앙은 아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모친은 비서를 두고 힘겹게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지는 안락사로 삶을 끝내고 싶어한다. 딸은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의지를 확인하고 현실적인 절차를 밟기 시작한다. 스위스의 관련 단체를 알아보고, 만약을 대비해 변호사에게 법률적인 조언도 듣는다. 정해진 이별의 날짜를 앞두고 아버지는 가족과 지인을 불러 호화로운 만찬을 즐긴다. 손주가 연주하는 음악회에도 참석한다. 마침내 아버지와 두 딸이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곳은 앰뷸런스 안이다. 노인은 홀로 낯선 곳에서 죽기 위해 떠난다.

  프랑수와 오종의 이 영화는 조력 자살에 대한 영상 팸플릿(pamphlet) 같다는 인상마저 준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관객은 성장(盛裝)을 한 모습으로 침대에 오롯이 누워있는 앙드레를 본다. 그 최후를 참관한 이는 에마뉘엘에게 전화를 건다. '모든 게 잘되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선택할 수 없는 이 죽음에는 당연히 큰 돈이 든다. 또한 법적인 문제를 비롯해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당신이라면 이런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건가요? 또한 당신의 가족이 그런 마지막을 원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영화는 마치 관객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어떤 면에서 그 질문에 내포된 근원적 성찰은 단순히 윤리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세상에는 부유한 앙드레가 선택한 '조력 자살'의 방식과는 다른 자발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가난과 외로움, 병고에 시달린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더이상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다 잘된 거야'는 계층과 죽음의 문제를 '가족애'라는 주제로 안전하게 환원시킨다.

  가스파 노에(Gaspar Noé)의 영화 '소용돌이(Vortex, 2021)'는 그 지점에서 더 사실주의적으로 파고든다. 영화는 노부부의 마지막 날들을 건조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가스파 노에는 질병과 불안이 가족 내부에서 어떻게 파괴적으로 기능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집안과 바깥을 끊임없이 배회하며 일상의 세계와 유리된다. 심장병이 있는 남편은 그런 아내를 보살피는 데에 무력하다. 그들 부부의 유일한 아들은 마약중독자이다. 그 아들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는데, 애 엄마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부모의 안위를 걱정하던 아들은 자신의 삶을 감당하기도 버겁다며 부모 앞에서 흐느껴 운다. 아들이 요양원을 알아보는 사이에 부부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친다.

  "도대체 왜 죽어요? 산다는 건 좋은 거잖아요." 'Everything Went Fine'에서 앰뷸런스 운전 기사는 앙드레에게 그렇게 묻는다. 앙드레는 허허로운 표정으로 그 남자를 응시한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죽으러 가는 노인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Vortex'에서 거리의 약쟁이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늙는 것과 약쟁이가 되는 것, 둘 중에 넌 뭘 선택할래?" 두 가지 모두 쉽게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는 뜻일 게다. 그 영화들을 보고서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들여다 본다.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그렇게 영화는 타인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관조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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続・忍びの者(Shinobi no Mono 2: Vengeance, 1963)

新・忍びの者(Shinobi no Mono 3: Resurrection, 1963)



닌자 영화에 투영된 계급과 사회의 문제


  '忍びの者(Shinobi no Mono)' 소설의 주인공인 이시카와 고에몬(石川 五右衛門, Ishikawa Goemon)은 실존 인물이었다. 그는 부패한 관료와 부자들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의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에게는 로빈 후드 같은 반영웅(antihero)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그의 생애를 극적으로 만든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암살 시도였다.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에몬은 어린 아들과 함께 팽형(烹刑, 솥의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형벌)을 받아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닌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이 후대 창작자들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복원되었다.   

  공산주의자였던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이시카와 고에몬이 보여준 그 저항의 삶에 주목했다. 민중의 편에 선 의적은 최고 통치자에 맞서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작가는 이시카와 고에몬을 최하층 민초들의 저항의지를 대표하는 닌자로 그려냈다. 원작자의 의도는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감독 야마모토 사츠오(山本薩夫)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이 연출한 영화 '忍びの者(Shinobi no Mono)' 1편과 2편의 고에몬은 지배 계급의 하수인이 아니라, 자신만의 신념을 가진 주체적 인물로 그려진다.

  1편에서 고에몬은 산다유의 협박과 회유를 받고 오다 노부나가 암살에 나선다. 하지만 고에몬의 암살 시도는 실패하고, 이 일로 오다 노부나가는 닌자 집단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다. 산다유와 닌자 공동체의 최후를 목도한 고에몬은 필부의 삶으로 돌아간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평범한 농부로 살고 싶었던 고에몬의 꿈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지 못한다. 고에몬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아내와 아이를 잃는다. 그는 복수를 위해 다시 닌자가 된다.

  2편에서 고에몬이 속한 닌자 공동체는 승려를 중심으로 종교적 신념으로 뭉쳐있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 장각의 황건적은 태평도(太平道)로 민중을 끌어모았다. 영화 속 닌자 공동체의 모습은 전국 시대의 혼란기에 일본 불교 또한 체제 저항 세력과 결탁했음을 추측케 한다. 주목해야할 점은 닌자 집단에 합류한 이들이 굶주리고 가난한 하층 계급 천민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세상을 뒤바꾸기 위해 닌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닌자의 삶을 택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절멸에 이르는 탄압이었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고에몬의 암살 시도는 실패했고, 그에게는 잔혹한 형벌이 주어진다. 그 지점에서 영화는 전복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2편의 마지막에 고에몬은 펄펄 끓는 가마솥 앞으로 끌려간다. 3편이 시작되면 고에몬은 죽음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심복 핫토리 한조가 고에몬을 구한다. 그는 고에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적하는 도구로 쓰려고 한다. 과연 고에몬은 핫토리 한조의 뜻대로 움직일까? 고에몬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서게 되지만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 원한 때문이다. 닌자 고에몬이 돈이나 허황된 대의명분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이런 고에몬이 4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반대편에 선다. 고에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사나다의 닌자로 활약하면서 몰락해가는 도요토미 일족을 살리는 일에 앞장선다. 이 웃지 못할 반전은 영화사 다이에이의 초대박 흥행작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엿가락 늘이기 식의 연작을 강행하면서 캐릭터의 일관성과 원작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는 실종되었다. 다이에이는 원작을 포기하고 4편부터는 독자적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 '忍びの者(Shinobi no Mono)' 4편과 5편에서는 '키리가쿠레 사이조'라는 새로운 닌자가 등장한다. 6편에서는 사이조가 죽고 그 아들 사이스케가 나온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닌자의 모험담이 이어졌다. 나는 6편까지 보고는 이 닌자물의 완주를 포기해 버렸다.

  '忍びの者(Shinobi no Mono)' 시리즈물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주연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의 매너리즘에 빠진 연기이다. 다이에이는 그 뛰어난 배우를 데려다가 밑빠진 시대극에 재능을 소모시켜 버렸다. 이치카와 라이조의 필모그래피가 1960년대에 지나치게 빡빡하게 채워져 있는 것은 영화사의 그런 욕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서른 일곱 살에 요절한 이 배우는 암으로 병사했다. 나는 그 이유가 한편으로는 혹사에 가까운 연기 여건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닌자가 나오는 시대극 팬이라면 '忍びの者(Shinobi no Mono)' 시리즈물은 한번은 거쳐가야할 관문이다. 이 연작 영화의 원작자는 닌자가 그저 검은 옷을 입고 신출귀몰하는 암살자가 아님을 알려준다. 그들은 시대의 격변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한 민초들이었다.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1960년대 고도 경제 성장 시대 일본 노동자들의 모습을 자신의 소설 속 닌자에 투영했다. 오늘날 서구 영화 속 닌자는 그런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고 과장된 이미지적 차용으로만 묘사된다. 언젠가 나올 새로운 닌자 영화에 지금 시대의 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담기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 영화 '폭력의 거리(暴力の街, 195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50.html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 영화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nflagration-1958.html

 


***닌자(忍びの者, Shinobi no Mono,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shinobi-no-mono-196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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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자(忍びの者, Ninja)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나와있지 않다. 대략 12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닌자의 역사는 중세 시기 일본의 정치적 격변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일종의 정치 스파이라고 할 수 있는 닌자의 주요 업무는 '정보 수집'이었다.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던 다이묘들은 경쟁자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닌자를 고용했다. 말하자면 닌자는 하청을 받고 일하는 사업자였다. 그들의 신분은 미천했다. 닌자는 사회의 최하층에 속하는 천민 집단의 사람들로 무리를 지어 산골 지역에 은거했다.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살다가, 일감이 주어지면 비밀리에 활동해서 수익을 올렸다. 수집한 정보로 적들을 교란시키고, 때론 납치와 암살 같은 범죄도 저질렀다. '무사도(武士道)'를 따르는 사무라이들이 대놓고 할 수 없는 '더러운 일'을 닌자들은 떠맡았다. 

  '忍びの者(Shinobi no Mono, 1962)'의 도입부에는 산다유가 이끄는 닌자 무리가 등장한다. 깊은 산 속에서 밭을 일구며 사는 그들은 경계 경보가 울리자 일사불란하게 모인다. 그들 가운데 주인공 이시카와 고에몬도 있다. 우두머리 산다유는 오다 노부나가 타도를 내세우며 닌자들을 압박한다. 그런데 이 늙고 병약해 보이는 우두머리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는 밤에 비밀 통로로 빠져나와 다른 곳의 은거지로 향한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장한 산다유는 또 다른 닌자 무리를 이끌고 있다. 그는 왜 이런 이중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편 고에몬은 산다유의 젊은 아내와 사랑에 빠진다. 둘의 모습을 엿보는 산다유의 음흉한 미소에 고에몬의 험한 앞날이 예고되어 있다.

  무라야마 토모요시(村山知義)는 1960년부터 1962년까지 '忍びの者(Shinobi no Mono)'라는 소설을 잡지에 연재했다. 센코쿠 시대(戦国時代)의 닌자(Ninja)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사 다이에이(大映)는 발빠르게 영화화에 착수했다. 주연은 다이에이의 간판스타 이치카와 라이조, 감독은 야마모토 사츠오(山本薩夫)가 내정되었다. 그것은 이후에 이어질 8부작 닌자 시리즈 영화의 첫걸음이었다. 영화는 계속해서 초대박 흥행 기록을 이어갔다. 주인공 닌자 이시카와 고에몬은 3편을 끝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새로운 닌자 사이조를 내세워 시리즈를 이어갔다. 6편에서는 사이조가 죽고 그 아들 사이스케가 등장한다. 감독은 바뀌었지만, 이치카와 라이조는 배역만 달리할 뿐 계속 출연했다. 이 영화는 이치카와 라이조의 인기와 명성에 기대고 있었다.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영화화한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으로 스타의 길에 들어선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 일곱, 이후 이치카와 라이조는 영화사 다이에이의 간판스타가 되었다. 1962년에는 결혼도 했는데, 상대가 다이에이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의 양녀였다. 이제 이치카와 라이조에게 영화는 가족 사업이 되었다. 흥행 보증 수표였던 그는 쉴 새 없이 영화를 찍었다. 시대극(時代劇, じだいげき)은 이치카와 라이조가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였다. 1962년에 시작한 닌자 시리즈물은 1966년까지 이어졌다. 1969년에 이치카와 라이조가 서른 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뜨자 시리즈는 8편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그즈음, 영화사의 명운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1970년에 '忍びの者 9편'이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1971년에 다이에이는 파산 신청을 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忍びの者(Shinobi no Mono)'는 다이에이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시리즈물이기도 하다. 1, 2, 3편의 원작자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닌자를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그려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발호할 때에도, 그리고 패전 이후에도 늘 박해의 대상이었다. 연극과 미술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활동하던 그는 역사 소설로 눈길을 돌린다. 시대물은 검열의 압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가 소설을 연재한 곳은 공산당 잡지 '적기(赤旗)'였다.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는 권력자들의 역사 속에서 닌자는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지배 세력은 닌자를 소모품으로 취급한다.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그 계급적 불평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고함을 드러낸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다이묘 권력자와 닌자로 치환된다. 소설이 쓰여진 1960년대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고도 경제 성장에 접어들기 시작한 때였다.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닌자의 삶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비운을 투사한다. 뼛속 깊이 공산주의자였던 원작자가 왜 역사 속의 닌자를 새롭게 부각시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영화 '忍びの者 1편'의 고에몬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고에몬은 갑작스런 폭발 사고로 아버지를 잃는다. 닌자는 여러가지 비술을 사용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폭약을 비록해 독극물, 여러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그들의 직업적 가치를 높였다. 고에몬의 아버지는 바로 그 폭발물 제조의 비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평범한 농부의 삶을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추지만 결국 비명횡사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산다유의 아내가 사고로 죽자 고에몬은 도망길에 오른다.

  닌자라고 해서 다 같은 닌자가 아니다. 그들 사이에도 엄연히 계급이 있다. 산다유는 닌자 무리를 이끌면서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추구한다. 그가 비밀리에 두 개의 닌자 무리를 꾸려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닌자들 사이에 경쟁을 부추겨 성과를 내게 만들면 닌자들의 몸값은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닌자를 고용하는 다이묘들에게 더 많은 돈을 받아낼 수 있다. 고에몬이 믿고 의지한 산다유는 그런 추악한 인물이었다. 영화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잔혹한 압제자로 묘사된다. 혼세한 시대적 상황에서 닌자 고에몬은 수탈과 착취의 제일 하부 구조에 자리한다. 과연 고에몬은 자신을 옥죄는 시대의 그물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그 뒤의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진다.



*사진 출처: vintageninj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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