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명의 흑인 청년들을 통해 바라본 미국 Foster Care System
 

  "LA에는 3만 명의 위탁 아동(foster child)이 있으며, 그들이 사회로 나갈 무렵에는 65%의 청소년들은 갈 곳이 없다."

  다큐는 간결하고 건조한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Jen Araki의 다큐 'We Gotta Get Out Of Here(2019)'은 LA의 위탁 가정 출신 5명 청년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미국의 Foster Care System은 부모의 학대, 유기, 방치 등에 의해 제대로 양육될 수 없는 아동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 복지 서비스이다. 위탁 부모는 정해진 자격 요건을 갖추고 필수 교육 과정을 이수한 이들이 될 수 있다. 그 시스템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점이 있는지는 다큐에 처음 등장하는 TY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21살 TY
는 3달 전에 위탁 가정을 떠나서 룸메이트 마이크와 지내고 있다. TY는 7살 때부터 위탁 아동이 되었고, 38개의 위탁 가정을 거쳤다. 그는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여러 약병들을 보여준다. 뇌전증(간질)을 앓고 있는 TY는 정기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는 중이다. 만약 그가 직업을 얻는다면 정부로부터 받는 여러 혜택들은 박탈된다. 지병이 있는 TY가 직업을 갖는 일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TY의 룸메이트 마이크의 경우는 상황이 좀 더 낫다. 인생의 진로를 군대에서 찾기로 결심한 마이크는 매우 성실한 청년이다. TY는 이제까지 자신이 함께 지낸 위탁 가정의 아이들은 대부분 정신 질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건강하고 활달한 마이크가 아주 예외적인 친구라고 덧붙인다. 당연하게도 TY에게 마이크는 가장 친한 친구이지만, 마이크는 해병대 입대가 예정되어 있다. TY는 지금 지내고 있는 집에서는 더이상 지내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살 집을 알아봐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돈은 18살 TJ와 19살 티파니에게도 절실히 필요하다. 연인 사이인 둘은 열악한 위탁 가정 환경에서 무작정 뛰쳐나왔다. 하지만 당장 머물 곳이 없다. TJ의 형 BJ는 스무 살, 복싱 클럽에서 훈련 중인 그의 처지는 동생 보다 안정적이다. 괜찮은 위탁 가정에서 지내고 있는 BJ는 운동으로 불운한 인생의 물꼬를 열어 보려고 한다. 딱한 동생의 처지를 지나치지 못한 BJ는 자신의 위탁 부모에게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TJ와 티파니는 어렵게나마 정부로부터 1달 동안 모텔에서 지낼 수 있는 바우처(voucher)를 받아냈다. 저렴한 모텔의 이불은 누더기처럼 구멍이 나있고, 더러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싸움 소리도 들어야 한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티파니는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5명의 위탁 가정 출신의 청년들은 모두 흑인이다. 그들은 또한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다. 정서적으로 취약한 데다, 질병까지 갖고 있는 경우에는 상황이 더 나빠진다. TJ는 HIV에 감염된 채로 태어났다. 그는 계속해서 치료약을 복용해야만 한다. 연인 티파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둘의 미래에는 시작부터 그렇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마이크와 BJ는 힘들게나마 인생의 첫 발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딛는다. 마이크는 해병대에 입대하고, BJ는 첫 시합에서 이긴다.

  다큐가 5명 청년들의 삶을 따라가는 동안 젊은 흑인 여성의 인터뷰가 중간 중간 이어진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 여성 또한 성장기를 위탁 아동으로 보냈다. 그는 위탁 가정에서의 경험이 자신의 인생에 끼친 영향을 털어놓는다. 위탁 가정을 떠날 무렵엔 미혼모가 되었고, 죽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자는 유대인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대학에 진학했고, 이제는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고 있는 이 여성은 Foster care system의 생존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행운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다큐의 마지막 자막은 위탁 아동들의 암울한 미래를 명확하게 입증한다. 그들 가운데 3분의 1은 노숙자가 된다. 65%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데, 대학에 진학하는 이들은 3% 미만이다. 더 놀라운 점은 캘리포니아 교도소의 수감자 70%가 위탁 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굉장히 사회성이 짙은 주제임에도 감독 Jen Araki는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길거리 연주자의 기타 선율로 시작한 이 다큐는 중간 중간 LA의 풍광을 시적으로 배치한다.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의 외관은 위탁 청소년들이 겪는 생존의 어려움과 대비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스스로의 삶을 좋은 쪽으로 바꾸려는 의지는 그들 자신을 구한다. 티파니는 대학에 진학했고, 딸을 출산했다. TY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가 뇌전증을 약물로 잘 통제하고 학업을 끝마친다면 성공적으로 사회에 안착할 것이다. 비록 TJ가 경범죄로 수감되었지만 그에게도 기회는 있다. 다큐의 제목 'We Gotta Get Out Of Here'는 위탁 가정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는 청년들의 말처럼 들린다. 한편으로 그 제목은 현재의 미국 Foster care system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표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큐는 미국의 구멍난 사회 복지 정책을 5명의 흑인 청년들의 눈을 통해 정밀하게 응시한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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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질투는 나의 힘(2002)'에서 배우 문성근이 연기한 잡지사 편집장 한윤식은 자신이 작가가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작가라는 게 근본적으로 원한이 있어야 해. 영혼의 상처. 후벼파서 팔아먹을 상처가 있어야 되는데, 난 너무 평탄하게 자랐어.' 성장 과정에서의 고통과 상처는 창작자에게 저주이자 축복인지도 모른다. 감독 James Gray는 영화 '아마겟돈 타임(Armageddon Time, 2022)'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드러내 보인다. 1980년, 뉴욕의 퀸즈 거리에 살고 있는 11살 폴(Banks Repeta 분)은 공립학교 6학년의 첫학기를 맞이한다. 완고한 담임 선생에 대한 반항심을 공유한 폴과 흑인 동급생 조니는 곧 친구가 된다.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폴과 NASA의 직원이 되고픈 조니. 폴은 학교 화장실에서 조니가 가져온 대마초를 나누어 피다 담임에게 걸린다. 그 일을 계기로 폴의 부모는 폴을 사립학교로 전학시킨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겉돌던 폴은 조니와 함께 가출할 생각을 한다. 과연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두 친구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폴과 NASA의 직원이 되고픈 조니. 둘은 서로의 꿈을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계층적 장벽이 존재한다. 폴의 외할아버지 애런(앤소니 홉킨스 분)은 어린 손주 폴에게 정서적 지지와 함께 물질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폴은 조니에게 외할아버지와 런던의 명소 Big Ben을 구경했던 이야기를 한다. 부유한 외할아버지가 있는 폴과는 달리, 조니는 빈민가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살고 있다. 흑인이라는 피부색과 가난, 양육자의 부재는 조니의 상황을 악화시킨다. 결국 집에서도 머물 수 없게 된 조니는 폴의 집 뒷마당에 은신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관객은 1980년대 유대인 이민자 출신의 가정 풍경 속으로 초대받는다. 가족들의 식사 대화에서는 끈끈한 가족애가 느껴지지만, 그 속에서 타인종에 대한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감정 또한 가감없이 드러난다. 폴의 아버지 어빙은 중국 음식을 'ching chang chong food'라는 모욕적인 단어로 표현한다. TV에 나오는 레이건을 보며 반감을 표시하는 폴의 부모는 자유주의자(liberalist)임을 자처한다. 그럼에도 이 부모는 폴이 흑인 아이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타락의 징조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 학교는 계층적 상승을 위한 걸림돌로 인식된다. 다행히 폴에게는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다. 폴의 아버지가 배관공(plumber)임에도 불구하고, 외할아버지 애런의 경제적 지원으로 폴은 사립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다.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 NPR에 출연한 제임스 그레이는 그 사립 학교 전학을 '인생의 티켓'이었다고 회고한다. 45분 가량의 이 인터뷰는 사실 영화보다도 더 재미있다. 그는 자신의 가족사를 솔직히 드러내며 영화와 실제 현실의 상관 관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폴은 사립 학교에 등교한 첫날, 학교의 유력한 후원자인 프레드 트럼프(Frederick Trump, 트럼프 전대통령의 부친)와 마주친다. 그곳의 세상은 폴이 알던 이전의 세계와는 딴판이다. 프레드 트럼프의 딸 메리앤(Maryanne Trump)은 학생들 앞에서 연방 검사가 된 자신의 성공 비결을 설파한다. 메리앤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며 이뤄낸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며, 미국이라는 사회가 가진 무한한 기회를 강조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 열심히 노력해야만 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폴은 그렇게 미국 사회의 성공 신화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곳에서 폴은 자신의 재능도 인정받는다. 교사는 폴이 그린 그림을 칭찬한다. 공립 학교에 있을 때 폴의 그림은 담임과 급우로부터 칸딘스키의 모사작이라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폴이 부잣집 아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내는 일은 쉽지 않다. 동급생들은 폴의 친구 지미를 '깜둥이(N-Word: nigger, negro)'로 지칭한다. 교복을 단정치 못하게 입었다는 이유로 폴은 여교사에게 지적당한다. '교복을 올바르게 입는 것이 학교를 존중하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곳의 규칙과 아이들의 세계는 폴을 외롭고 힘들게 만든다. 그 결과 폴은 지미와 뜻밖의 일탈을 감행한다. 둘은 학교의 컴퓨터를 훔쳐서 판 돈으로 가출하기로 한다.

  "그래, 세상은 불공평해. 나도 그 사실이 널 맘 아프게 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런 곳에서 넌 살아남아야 하는 거야(It is unfair... I know it hurts you... But you have to survive)."

  경찰서에서 폴을 빼내온 아빠는 그렇게 뼈아픈 인생의 진리를 알려준다. 영화는 그뒤로 조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NPR과의 인터뷰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그로부터 6년 뒤에 그 흑인 친구가 잘못된 마약 거래에 연루되어 죽었다고 말한다. 폴, 아니 현실의 제임스 그레이에게도 삶은 쉽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에 그의 부친은 56건의 사기 혐의로 기소당했고, 어머니는 뇌종양으로 세상을 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레이는 USC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결국 영화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후벼파내어 영화 '아마겟돈 타임'으로 만들었다.

  NPR과의 인터뷰에는 그의 외가 뿐만 아니라 친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친증조부는 금주법 시절 맨하탄에 술집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설적인 갱 알 카포네(Al Capone)의 형 랠프 카포네의 회계사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임스 그레이가 초기작에서 뉴욕 뒷골목 갱들의 세계를 그려낸 것이 나름 이해가 가기도 한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오늘날의 감독 자신을 만들어낸 가족적 배경, 그 근원에 대한 성찰인 셈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1980년의 미국 뉴욕, 유대인 가정의 삶 속에서 그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작업이다. 폴과 지미의 피부색을 뛰어넘은 우정은 피상적으로 보일 뿐이다. 당연하게도 어린 시절의 폴을 비롯해, 감독 자신조차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고 보기 어렵다. 제목 '아마겟돈 타임'은 영국 록밴드 The Clash의 'Armagideon Time'에서 따왔다. 노래 가사의 음울한 분위기는 성서의 묵시록 속 심판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자신이 보낸 소년 시절의 1980년대를 오늘날 미국 사회가 직면한 인종적 갈등과 분열의 기원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립 학교의 거만하기 짝이 없는 백인 아이들은 인종 차별적인 언어를 쏟아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고 그레이는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트럼프의 지지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레이건의 보수 우파 시대와 트럼프의 백인 우월주의를 선명하게 연결시킨다. 미시사적인 개인의 역사와 시대를 연결지어 의미를 끌어내려는 제임스 그레이의 열망은 과도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케네스 브래너의 'Belfast(2021)' 보다 훨씬 더 많은 진정성을 담고 있다. 관객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감독의 유년 속 풍경에서 길을 잃더라도, 분명 이 영화를 보는 시간은 아깝지 않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

Belfast(2021), 케네스 브래너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belfast2021.html

The Long Day Closes(1992), 테렌스 데이비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long-day-closes1992.html

가을이 올 때(秋立ちぬ, The Approach of Autumn, 1960), 나루세 미키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pproach-of-autumn-1960.html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 1972), 폴 뉴먼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effect-of-gamma-rays-on-man-in-moon.html

남쪽(El Sur, 1983), 빅토르 에리세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el-sur-1983.html

이반의 어린 시절(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196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62.html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은 제임스 그레이와의 인터뷰를 지난 11월 28일에 방송했다. 이 인터뷰는 www.npr.org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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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인류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분의 법칙. 언젠가 읽은 시나리오 작법 책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20분 안에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야 한다'. Sony Picutres의 2021년작 애니메이션 영화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The Mitchells vs. the Machines, 2021)'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기준을 살짝 넘어간다. 20분이 지나도록 이 애니메이션은 좀 심심하다. 미첼 가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로 그 중요한 20분을 흘려 보낸다. 그러다 23분이 될 때에 갑자기 사건이 터진다. AI(인공 지능) 로봇이 인간을 공격한다. 그렇다. 이 애니메이션은 제목 그대로 AI 로봇 군단에 맞서는 미첼 가족의 좌충우돌 모험담이다. 

  애니메이션의 도입부는 딸 케이티와 아빠 릭의 소원해진 사이를 부각시킨다. 영상물 제작을 좋아하는 케이티는 영화 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케이티는 가족이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아빠는 영화로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물으며 케이티를 실망시킨다. 상심한 딸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릭은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대륙 횡단 여행을 계획한다. 케이티는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여행에 동참한다. 한편 기업가 마크 보우먼은 새로운 로봇 라인을 발표한다. 그런데 발표회장에서 반란을 일으킨 로봇들은 인간들을 마구 공격하고 포획한다. 그 시간, 공룡 테마 파크에 머물고 있던 미첼 가족은 로봇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는다. 아빠 릭, 엄마 린다, 딸 케이티, 아들 애런. 초능력자도 아닌 이 평범한 미첼 가족은 로봇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내러티브의 한 축은 미첼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또 다른 한 축은 로봇 군단을 이끄는 우두머리 AI PAL과 미첼 가족과의 대결이 차지한다. 복잡하게 꼬인 가족 모험 서사의 종착지는 당연히 로봇 군단의 패배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말에 이르면 관객은 이 애니메이션의 진정한 주제는 결국 '가족주의'임을 알게 된다. 어떻게 미첼 가족은 영리하고 무지막지한 로봇들을 무찌를 수 있었을까? '엄마가 너를 지켜줄게!' 엄마 린다는 로봇들에게 붙잡힌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무한 능력의 여전사로 변모한다. 모성애는 그 어떤 것도 파괴시킬 수 있는 절대 반지급의 능력이 된다. 아빠 릭은 혼돈과 파괴의 전장에서 딸과의 소중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멀어진 부녀 사이를 복원하기 위해 애쓴다.

  결국 눈물겨운 가족애는 미첼 가족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인류를 로봇들의 마수에서 구해낸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서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가족주의'가 다가올 AI를 비롯해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필요한 가치인가? 아니, 그것은 인류가 처한 여러 어려움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로봇 군단과 맞서는 가족 모험 서사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공 지능과 인류의 미래'라는 중요한 명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AI 로봇 회사의 수장 마크 보우먼 Meta의 CEO 마크 주커버그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마크 보우먼은 청바지 차림에 야구 모자를 쓰고 새로운 로봇 라인을 프레젠테이션한다.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신제품을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은 스티브 잡스에서부터 시작된 실리콘밸리 IT 기업의 전통이 된지 오래이다.

  첨단 기술 혁명은 인류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다. 새로운 AI 로봇을 소개하는 CEO 마크는 로봇이 사람들의 삶에 가져다줄 편안함을 강조하지만, 이는 곧 재앙으로 뒤바뀐다. 그것을 만들어낸 마크를 비롯해 그 누구도 AI 로봇을 통제하지 못한다.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게 된 인공 지능과 인류가 공존하는 미래가 결코 장밋빛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개발자들은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AI 로봇에게 많은 능력을 부여하고 있지만, AI의 판단은 인간이 전부 다 알 수 없는 블랙 박스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진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로봇 군단의 우두머리 AI PAL은 인간을 포획해서 멸절에 이르게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미첼 가족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셜 네트워크와 단절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미첼 가족은 함께 모인 식탁에서도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연결'이라는 허울좋은 미명의 네트워크는 오히려 가족을 비롯해 현실의 인간 관계에서 개인을 소외시킨다. 미첼 가족은 기계적 가상 연결망이 파괴된 상황에서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분열된 가족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로 뭉친다. 더 나아가 미첼 가족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를 로봇 군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하지만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가족주의'는 AI 시대의 근원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지점은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인공 지능 로봇들을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기능할 수 있는 AI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물론 미첼 가족은 기계 전쟁에서 승리했다. 로봇 군단과 그들의 가모장(家母長, 애니메이션 속에서 목소리를 담당한 이는 배우 올리비아 콜먼이다)은 파괴되었다. 가족은 평화로운 현실로 복귀했다. 그렇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역설적으로 다른 형태의 AI PAL과 로봇 군단이 등장하는 미래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인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러닝 타임 114분을 순식간에 보내고 난 뒤에 내 머릿속에는 그렇게 무겁고도 어려운 질문이 남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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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서 어떤 상실은 결코 회복될 수 없다. Jérémy Clapin의 애니메이션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J'ai perdu mon corps, 2019)'에서 주인공 나우펠에게 일어난 일이 그러하다. 바닥에 내려앉은 파리, 천천히 흐르는 피, 부러진 안경, 쓰러진 남자, 그리고 잘려진 그의 손. 화면은 흑백으로 변하고 어린 소년 나우펠과 그 부모가 보인다. 다시 컬러로 변환된 화면에서는 의학 연구소의 냉장고에서 손이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 스스로 움직이고 생각할 줄 아는 이 똑똑한 손은 거침없이 파리 시내를 질주한다. 고층 둥지에서 자신을 밀어내려는 비둘기의 목을 비틀고, 지하철 정류장에서는 라이터를 켜서 쥐떼의 공격을 막아낸다. 잘려진 손의 여정 위로 청년이 된 나우펠의 이야기가 컬러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흑백의 화면으로 겹쳐진다.

  청년 나우펠의 현재는 고단하기 짝이 없다. 피자 배달부로 일하는 그는 매번 배달에 늦기 일쑤이다. 삼촌에게 얹혀 사는 나우펠에게 집은 길바닥 보다도 못한 곳이다. 비정한 삼촌은 나우펠의 몇 푼 안되는 일당을 빼앗고, 못돼먹은 사촌은 나우펠을 괴롭힌다. 그러던 어느 날, 나우펠은 가벼운 접촉 사고로 마르티네즈 부인의 피자를 약속 시간보다 늦게 배달하게 된다. 현관 인터폰으로 배달이 늦은 이유를 설명하던 나우펠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호감을 느낀다. 그 여성의 진짜 이름이 가브리엘이며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우펠. 가브리엘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나우펠은 가브리엘의 삼촌 지지의 목공소에 일자리를 얻는다.

  잘려진 손이 필사적으로 향하는 목적지가 나우펠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진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이후로 나우펠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접촉이 차단된 채 살아왔다. 피아노를 치는 우주인이 되고 싶었던 나우펠의 꿈은 그 비극적인 교통 사고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 나우펠에게 가브리엘에 대한 사랑은 삶의 잃어버린 감각을 일깨운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나우펠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심한 나우펠은 한순간의 실수로 손을 잃는다.

  도입부에 등장한 파리는 나우펠의 삶에 수시로 틈입한다. 어린 나우펠은 어떻게 하면 파리를 잡을 수 있냐고 아빠에게 묻는다. 파리에 대한 나우펠의 기묘한 집착은 결국 나우펠의 삶을 뒤틀리게 만든다. 붉은 눈의, 기분나쁘기 짝이 없는 이 파리는 어떤 면에서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불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은 것, 그리고 나중에 손이 잘리는 사고까지. 한편 파란만장한 도시 탐험 끝에 나우펠의 잘린 손은 잠자고 있는 주인의 곁에 다가간다. 우리는 나우펠의 손이 결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면 손은 왜 나우펠을 찾아온 것일까?

  잘려진 손은 그 자체로 삶에서 맞닥뜨리는 상실과 고통을 의미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비가역적(非可逆的, irreversible)이다. 그 어떤 것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같은 상태로 복원될 수 없다. 나우펠의 삶에서 부모를 잃은 교통 사고와 손이 잘리는 사건이 그러하다. 우주인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소년은 파리 하층 주거지역에 사는 피자 배달부가 되었다. 거기에다 손마저 잃었다. 이 불행한 청년은 어디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할까? 잘려진 손은 현실의 도시 파리와 나우펠의 과거를 동시에 탐사한다. 흘러넘치는 부모님의 사랑,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들을 카세트 리코더에 담았던 소년 나우펠, 그리고 즐겨들었던 노래들... 손이 기억해낸 나우펠의 과거를 현재의 나우펠도 카세트 리코더를 다시 틀어보며 복기한다. 그렇게 해서 잘려진 손과 어린 나우펠의 기억, 청년 나우펠의 현실은 마침내 조우한다.

  이제 나우펠은 고층 건물의 맨 꼭대기에 홀로 서있다. 관객은 나우펠의 잘린 손목을 감싼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본다. 어떤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 그래도 바라보고 견디어내야만 하는 것. 이 청년이 하게 될 선택은 손의 필사적인 여정과도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어째서 'I lost my hand'가 아니고 'I lost my body'인지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제레미 클라팽의 이 기이한 잔혹 동화는 뜻밖의 여운을 남긴다. 'Blender'라는 3D 애니메이션 제작 도구를 사용해 2D와 3D를 합성한 기법상의 혁신도 돋보인다. 덕분에 도시 곳곳을 누비는 손의 활약에서 풍부한 영화적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잘려진 손'의 엽기적 모험담에는 인생의 진실과 함께 희망이 아로새겨져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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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 백화점에서 잠깐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하다 들어간 곳이 아주 길고 좁은 복도였다. 유니폼을 입은 여점원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벽에 등을 기대어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곳은 직원들의 휴게실 같은 곳이었다. 화려한 백화점의 가려진 곳에는 그런 공간이 있었다. Philip Barantini의 영화 'Boiling Point(2021)'는 관객을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 뒷편으로 안내한다. 거기에는 고성과 비난, 연민과 격려, 분노와 짜증이 공존한다. 앤디(Stephen Graham 분)는 런던의 고급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이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관청의 위생 담당 검사관에게 화가 치미는 소식을 듣는다. 검사관은 주방의 위생 상태 불량으로 안전 등급이 별 5개에서 3개로 강등되었다고 통보한다. 분노한 앤디는 주방 요리사들을 혹독하게 질책한다. 부주방장 칼리는 재빨리 분위기를 수습해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 손님들이 몰려들고 주방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과연 레스토랑 Jones & Sons의 직원들은 이 날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감독 필립 바랜티니는 이 영화를 싱글 테이크(a single take), 즉 하나의 쇼트로 찍었다. 무려 92분 동안 카메라는 끊기지 않고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간다. 이러한 촬영 방식이 주는 긴장감은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보일링 포인트'는 마치 리얼 타임 고급 레스토랑 탐험기 같다. 영화는 앤디의 출근길에서부터 시작된다. 계속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앤디의 목소리와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이 사람은 무언가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검사관으로부터 받은 불쾌한 통보, 신참 요리사들의 실수, 거기에 레스토랑 매니저는 예약 손님을 너무 많이 받아놓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앤디를 진정시키는 것은 부주방장 칼리. 차분하고 이성적인 칼리는 앤디를 대신해 주방 직원들을 다독인다. 그런데 이 레스토랑의 문제는 주방에서만 터지지 않는다. 매니저 베스와 서빙 직원들은 진상 고객들을 상대해야 한다.

  인플루언서(influencer) 고객은 메뉴에도 없는 스테이크를 해달라고 하고, 인종차별적인 백인 고객은 서빙하는 흑인 직원에게 적대적 감정을 표출한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여성 손님들은 남자 직원에게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레스토랑 직원들의 유사 가족적인 연대감이다. 그들은 손님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료들과 나누며 감정을 누그러뜨린다. 이것은 앤디가 이끄는 주방에서도 동일하다. 요리사들의 실수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기는 했지만, 앤디는 그들과 자신이 한 팀이라는 것을 잘 안다. 수석 셰프의 자리는 군림하고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방의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설거지를 담당하는 여자 직원은 게으름을 피우는 불성실한 동료에 대해 앤디에게 하소연한다. 이 여성의 서툰 영어 억양은 현재 영국에서 비숙련 저임금 노동을 떠맡고 있는 동유럽 이주 노동자들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앤디는 직원의 불평불만이 주방을 마비시키지 않도록 세심하게 처리해야만 한다.

  앤디가 수석 셰프로서 보여주는 책임감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문제들은 그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동업자였던 셰프는 음식 평론가 애인을 레스토랑에 데려온다. 그는 앤디에게 빚독촉을 하며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다. 힘든 것은 앤디 뿐만이 아니다. 매니저 베스는 손님들의 무리한 요구를 주방에 그대로 떠넘긴다. 부주방장 칼리는 베스가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주방 직원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아버지의 레스토랑을 잘 꾸려가고 싶은 베스는 자신의 역량 부족을 탓하며 화장실에서 눈물을 쥐어짠다. 칼리는 과도하게 밀려드는 주문과 다혈질 주방장 앤디를 보조하느라 진이 다 빠진다. 디저트를 담당하는 요리사의 팔에 난 자해 흔적은 그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준다. 그 상처를 발견한 동료가 그를 따뜻하게 포옹하는 감동적인 순간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보일링 포인트'의 등장인물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 주방에서 끓어 넘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삶의 모든 문제와 감정들이다.

  영화 속에서 앤디는 흰색 텀블러에 든 음료를 수시로 들이킨다. 주방의 열기가 그를 목마르게 하는 것일까? 관객은 영화의 끝부분에 가서야 그가 텀블러에 들이붓는 것이 '보드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방은 결코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불행한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먹는 이들이 과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보일링 포인트'는 고급 식문화 산업에 조소(嘲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려내는 근원적 풍경은 사유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가? 우리가 그것을 위해 지불하는 댓가는 합당한가? 감독 필립 바랜티니는 그 이면에 자리한 자본주의가 노동 현장에서 침탈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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