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질투는 나의 힘(2002)'에서 배우 문성근이 연기한 잡지사 편집장 한윤식은 자신이 작가가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작가라는 게 근본적으로 원한이 있어야 해. 영혼의 상처. 후벼파서 팔아먹을 상처가 있어야 되는데, 난 너무 평탄하게 자랐어.' 성장 과정에서의 고통과 상처는 창작자에게 저주이자 축복인지도 모른다. 감독 James Gray는 영화 '아마겟돈 타임(Armageddon Time, 2022)'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드러내 보인다. 1980년, 뉴욕의 퀸즈 거리에 살고 있는 11살 폴(Banks Repeta 분)은 공립학교 6학년의 첫학기를 맞이한다. 완고한 담임 선생에 대한 반항심을 공유한 폴과 흑인 동급생 조니는 곧 친구가 된다.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폴과 NASA의 직원이 되고픈 조니. 폴은 학교 화장실에서 조니가 가져온 대마초를 나누어 피다 담임에게 걸린다. 그 일을 계기로 폴의 부모는 폴을 사립학교로 전학시킨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겉돌던 폴은 조니와 함께 가출할 생각을 한다. 과연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두 친구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폴과 NASA의 직원이 되고픈 조니. 둘은 서로의 꿈을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계층적 장벽이 존재한다. 폴의 외할아버지 애런(앤소니 홉킨스 분)은 어린 손주 폴에게 정서적 지지와 함께 물질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폴은 조니에게 외할아버지와 런던의 명소 Big Ben을 구경했던 이야기를 한다. 부유한 외할아버지가 있는 폴과는 달리, 조니는 빈민가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살고 있다. 흑인이라는 피부색과 가난, 양육자의 부재는 조니의 상황을 악화시킨다. 결국 집에서도 머물 수 없게 된 조니는 폴의 집 뒷마당에 은신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관객은 1980년대 유대인 이민자 출신의 가정 풍경 속으로 초대받는다. 가족들의 식사 대화에서는 끈끈한 가족애가 느껴지지만, 그 속에서 타인종에 대한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감정 또한 가감없이 드러난다. 폴의 아버지 어빙은 중국 음식을 'ching chang chong food'라는 모욕적인 단어로 표현한다. TV에 나오는 레이건을 보며 반감을 표시하는 폴의 부모는 자유주의자(liberalist)임을 자처한다. 그럼에도 이 부모는 폴이 흑인 아이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타락의 징조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 학교는 계층적 상승을 위한 걸림돌로 인식된다. 다행히 폴에게는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다. 폴의 아버지가 배관공(plumber)임에도 불구하고, 외할아버지 애런의 경제적 지원으로 폴은 사립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다.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 NPR에 출연한 제임스 그레이는 그 사립 학교 전학을 '인생의 티켓'이었다고 회고한다. 45분 가량의 이 인터뷰는 사실 영화보다도 더 재미있다. 그는 자신의 가족사를 솔직히 드러내며 영화와 실제 현실의 상관 관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폴은 사립 학교에 등교한 첫날, 학교의 유력한 후원자인 프레드 트럼프(Frederick Trump, 트럼프 전대통령의 부친)와 마주친다. 그곳의 세상은 폴이 알던 이전의 세계와는 딴판이다. 프레드 트럼프의 딸 메리앤(Maryanne Trump)은 학생들 앞에서 연방 검사가 된 자신의 성공 비결을 설파한다. 메리앤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며 이뤄낸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며, 미국이라는 사회가 가진 무한한 기회를 강조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 열심히 노력해야만 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폴은 그렇게 미국 사회의 성공 신화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곳에서 폴은 자신의 재능도 인정받는다. 교사는 폴이 그린 그림을 칭찬한다. 공립 학교에 있을 때 폴의 그림은 담임과 급우로부터 칸딘스키의 모사작이라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폴이 부잣집 아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내는 일은 쉽지 않다. 동급생들은 폴의 친구 지미를 '깜둥이(N-Word: nigger, negro)'로 지칭한다. 교복을 단정치 못하게 입었다는 이유로 폴은 여교사에게 지적당한다. '교복을 올바르게 입는 것이 학교를 존중하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곳의 규칙과 아이들의 세계는 폴을 외롭고 힘들게 만든다. 그 결과 폴은 지미와 뜻밖의 일탈을 감행한다. 둘은 학교의 컴퓨터를 훔쳐서 판 돈으로 가출하기로 한다.

  "그래, 세상은 불공평해. 나도 그 사실이 널 맘 아프게 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런 곳에서 넌 살아남아야 하는 거야(It is unfair... I know it hurts you... But you have to survive)."

  경찰서에서 폴을 빼내온 아빠는 그렇게 뼈아픈 인생의 진리를 알려준다. 영화는 그뒤로 조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NPR과의 인터뷰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그로부터 6년 뒤에 그 흑인 친구가 잘못된 마약 거래에 연루되어 죽었다고 말한다. 폴, 아니 현실의 제임스 그레이에게도 삶은 쉽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에 그의 부친은 56건의 사기 혐의로 기소당했고, 어머니는 뇌종양으로 세상을 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레이는 USC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결국 영화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후벼파내어 영화 '아마겟돈 타임'으로 만들었다.

  NPR과의 인터뷰에는 그의 외가 뿐만 아니라 친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친증조부는 금주법 시절 맨하탄에 술집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설적인 갱 알 카포네(Al Capone)의 형 랠프 카포네의 회계사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임스 그레이가 초기작에서 뉴욕 뒷골목 갱들의 세계를 그려낸 것이 나름 이해가 가기도 한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오늘날의 감독 자신을 만들어낸 가족적 배경, 그 근원에 대한 성찰인 셈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1980년의 미국 뉴욕, 유대인 가정의 삶 속에서 그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작업이다. 폴과 지미의 피부색을 뛰어넘은 우정은 피상적으로 보일 뿐이다. 당연하게도 어린 시절의 폴을 비롯해, 감독 자신조차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고 보기 어렵다. 제목 '아마겟돈 타임'은 영국 록밴드 The Clash의 'Armagideon Time'에서 따왔다. 노래 가사의 음울한 분위기는 성서의 묵시록 속 심판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자신이 보낸 소년 시절의 1980년대를 오늘날 미국 사회가 직면한 인종적 갈등과 분열의 기원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립 학교의 거만하기 짝이 없는 백인 아이들은 인종 차별적인 언어를 쏟아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고 그레이는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트럼프의 지지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은 레이건의 보수 우파 시대와 트럼프의 백인 우월주의를 선명하게 연결시킨다. 미시사적인 개인의 역사와 시대를 연결지어 의미를 끌어내려는 제임스 그레이의 열망은 과도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케네스 브래너의 'Belfast(2021)' 보다 훨씬 더 많은 진정성을 담고 있다. 관객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감독의 유년 속 풍경에서 길을 잃더라도, 분명 이 영화를 보는 시간은 아깝지 않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

Belfast(2021), 케네스 브래너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belfast2021.html

The Long Day Closes(1992), 테렌스 데이비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long-day-closes1992.html

가을이 올 때(秋立ちぬ, The Approach of Autumn, 1960), 나루세 미키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pproach-of-autumn-1960.html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 1972), 폴 뉴먼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effect-of-gamma-rays-on-man-in-moon.html

남쪽(El Sur, 1983), 빅토르 에리세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el-sur-1983.html

이반의 어린 시절(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196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62.html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은 제임스 그레이와의 인터뷰를 지난 11월 28일에 방송했다. 이 인터뷰는 www.npr.org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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