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련 글은 앞으로 구글 블로그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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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의 일부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앞으로 자네가 나한테 말을 걸어 오거나 귀찮게 하면, 그때마다 내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네."

  아일랜드의 평화로운 작은 섬 이니셰린. Pádraic과 Colm은 오랜 우정을 이어온 친구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콤은 파드릭에게 무시무시한 절교 선언을 한다. 파드릭은 그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는 도대체 콤이 자신에게 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다. 콤은 파드릭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친구이며, 그 우정은 무익하다는 말을 한다. 콤은 음악가로서 앞으로 작곡에 전념하겠다고도 덧붙인다. 매일 두 사람은 동네 맥주집에서 흑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제 파드릭은 혼자서 맥주를 들이켜야만 한다. 콤의 빈자리가 주는 외로움을 파드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든 우정을 되찾을 방법이 있을 거야. 파드릭은 콤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애를 쓴다. 결국 콤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서 파드릭의 집 앞에 내던진다.

  Martin McDonagh 감독'The Banshees of Inisherin(2022)'는 의문의 도입부로 시작한다. 왜 콤은 파드릭에게 절교를 선언했을까? 무엇보다 절교를 당한 파드릭에게 그것은 가장 큰 의문일 것이다. 이는 곧 작은 섬 이니셰린의 주민들에게도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파드릭이 콤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영화는 이 갑작스런 절교의 원인을 파고드는 여정을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 파드릭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파드릭 자신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파드릭을 '좋은(nice)' 사람이라고 말한다. 파드릭이 지루하다는 콤의 말은 절교의 이유가 되기에 부족하다. 왜냐하면 콤은 그 지루한 친구 파드릭과 오랜 우정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콤에게 파드릭의 평범함과 무지가 갑자기 크게 다가온다. 아마도 콤 자신의 내적인 변화가 뜻밖의 절교 선언을 이끌어내었을 것이다.

  콤은 민속음악가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작곡도 한다. 중년의 끄트머리에 선 콤은 자신이 음악가로서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이 시간을 낭비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남은 생애 동안 예술가의 본분에 좀 더 충실하게 살고 싶다, 고 느낀 그에게 파드릭의 존재는 거추장스럽다. 그저 시시한 잡담만 하다 가버리는 친구 파드릭. 콤이 느끼는 내적인 절망과 우울은 곧 절교 선언으로 이어진다. 파드릭은 콤의 결단에 충격을 받는다. 이 착한 남자는 깨어진 우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외로움이야말로 파드릭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파드릭이 어떤 사람이냐하면, 집에 있을 때에도 당나귀 제니를 집안에 들여놓고 함께 지내는 사람이다. 물론 파드릭에게는 강인한 여동생 시오반도 있다. 시오반은 오빠에게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콤을 만나보기도 한다. 하지만 콤의 결정은 단호하다.

  파드릭이 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애쓰는 동안, 이니셰린 섬 밖 아일랜드 본토에서는 내전이 한창이다. 전쟁의 그림자는 간간히 들리는 포탄 소리와 마을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느껴질 뿐이다. 영화의 주된 내러티브는 콤과 파드릭의 부서진 우정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두 친구의 관계가 아일랜드 내전에 대한 우화라는 점은 영화 곳곳에 내재된 폭력과 죽음의 이미지로 충분히 입증된다. 콤의 잘라진 손가락은 예기치 않은 비극을 가져온다. 이 영화의 제목에 나오는 Banshee는 아일랜드의 전설 속 마귀 할멈이다. 긴 머리에, 회색 망토를 두른 키가 큰 늙은 여자로 묘사되는 Banshee는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노래를 부르며, 무엇보다 Banshee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출처 en.wikipedia.org). 영화 속에서 마을의 맥코믹 부인은 바로 그 Banshee로 묘사된다. 맥코믹 부인은 파드릭에게 두 번의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틴 맥도나가 만들어낸 이니셰린 섬의 작은 마을은 마치 셰익스피어적인 세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 내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예술가로서 콤이 느끼는 좌절감, 파드릭이 한순간도 견디지 못하는 외로움, 섬을 떠나고 싶어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시오반, 아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마을의 경찰관, 그 아버지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동네 바보형 도미닉.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니셰린의 풍광 속에는 그들의 상처가 겹겹이 포개어져 있다.

  파드릭은 자신의 당나귀 제니가 콤의 잘린 손가락을 삼키다 죽은 일에 분노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급기야 파드릭은 콤의 집에 불을 지른다. 영화의 마지막, 서로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 두 친구는 해변가에서 만난다. 이제 섬 건너편에서 들리는 포탄과 총소리는 멈추었다. 내전은 끝났지만 그것은 이후 북아일랜드의 기나긴 내분으로 이어질 터였다. 콤의 잘린 손가락, 파드릭의 죽은 당나귀. 상실은 결코 회복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이 파국의 진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결국 이니셰린 섬은 미움과 고통이 요동치는 폐쇄된 공간으로 남는다. 그 비극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오반이 마침내 해냈듯 어떻게든 섬을 떠나는 것이다. 마틴 맥도나는 두 친구의 깨어진 우정을 통해 아일랜드의 핏빛 현대사를 은유적으로 성찰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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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뽑은 2022 올해의 영화


1. Aftersun(2022)


  31살이 된 딸은 자신이 11살 때에 아버지와 떠난 터키 여행을 회상한다. 오래전 여행에서 찍은 비디오 테이프가 알려주는 뜻밖의 진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슬픔과 감동으로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낄 것이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aftersun2022.html

2. The Banshees of Inisherin(2022)

  1923년 아일랜드 내전을 배경으로 한 부조리극.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에서 오랜 우정을 이어온 두 남자. 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은 뜻밖의 파란을 불러온다. 배우들의 놀라운 열연, 아름다운 자연 풍광 속에서 관객은 인간 내면의 심연을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banshees-of-inisherin2022.html

3. Tár(2022)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성 지휘자 타르는 경력의 정점에서 갑자기 추락한다. 어떻게 타르는 무너져 내렸을까? 영화는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어두운 내면을 깊이있게 성찰한다. 이 영화에서는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의 여진도 감지된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todd-field-tar2022.html  

4. Armageddon Time(2022)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리움과 고통 속에서 돌아본다. 그가 지나온 소년 시절은 1980년대의 시대상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영화가 들려주는 소년의 이야기 속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armageddon-time-2022.html


5. The Fabelmans(2022)

  칠순을 훌쩍 넘긴 스티븐 스필버그가 털어놓는 그 자신의 진짜 이야기. 마법과도 같이 '영화'는 어린 소년의 인생에 갑자기 들어왔고, 그것이 소년의 운명을 바꾸었다. 'The Fabelmans'는 가족이 그의 영화 세계에 미친 영향, 스필버그에게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이 가지는 의미를 두루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6. Compartment No. 6(2021)

  재능 넘치는 핀란드 감독의 독창적인 영화. 이 영화는 1990년대 소련 붕괴 직전의 사회상을 러시아의 자연 풍광과 겹쳐놓는다. 판이하게 다른 두 남녀 주인공이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게되기까지의 과정은 놀랍고 감동적이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mpartment-no-62021.html


7. Boiling Point(2021)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을 배경으로 그려낸 원 테이크 영화(single take film).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주방장의 동선을 따라가는 일은 현실 속에서 정교하게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민낯과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boiling-point2021.html

8. 소설가의 영화(2022)

  홍상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쨌든 흥미있음을 증명해주는 영화.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novelists-film-2022.html


다큐멘터리

9. Cow(2021)

  Luma라는 이름의 소를 통해 육식의 미래를 성찰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luma-cow2021.html

10. The Rehearsal(2022)

  단연코 올해 최고의 다큐멘터리. 이 6부작 다큐 시리즈는 가상의 리허설을 통해 인간 심리의 복잡한 층위를 탐구한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the-rehearsalhbo-tv-series-season-1.html

11. Ascension(2021)

  다큐는 중국의 소매 상품 집산지인 저장성 이우(義烏)를 비롯해 중국 각지에 자리한 공장의 생산 공정을 담아낸다. 매우 건조한 이 다큐는 우리 내면에 자리한 물질에 대한 욕망,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ascension-2021.html

12. Attica(2021)

  1971년에 일어난 미국 아티카 감옥 폭동(Attica uprising)을 5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돌이켜 살펴 본다. 다큐는 사건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당시 촬영 필름들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아티카 사건이 지금의 미국 사회에 갖는 의미, 미국 사회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도 살펴볼 수 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leave-no-trace2018-bait2019.html



그 밖의 주목할만한 영화

1. Sundown(2021)

  부유한 중년의 남자가 마주하게 된 생의 마지막 순간. 멕시코로 떠난 그는 과연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sundown2021.html

2. Playground(2021)

  새 학교로 전학온 어린 남매가 마주한 엄혹한 현실. 따돌림과 폭력, 상처와 눈물. 운동장은 즐거운 곳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투쟁의 장이 된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playgroundun-monde-2021.html

3. Yuni(2021)

  인도네시아 영화의 새로운 바람. 감독은 여고생 Yuni가 겪는 시련을 통해 인도네시아에서의 여성 인권, 사회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yuni2021.html

4. The Cathedral(2021)

  독특한 관점의 가족 영화. 딱딱한 내레이션과 절제된 연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TV 자료 화면이 소년의 성장기를 구성한다. 소년의 이야기는 감독 Ricky D'Ambrose 자신의 과거이기도 하다. 많은 관객들에게 지루할 수 있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는 반짝거리는 창의성과 진정성이 공존한다.

5. Nitram(2021)

  호주에서 있었던 총기 난사 사건을 영화로 만들었다. 총기난사범 Nitram의 내면을 따라가는 일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그럼에도 그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nitram2021.html

6. Pebbles(2021)

  인도 영화에 있는 노래와 춤, 액션은 이 영화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가난한 소년이 마주한 차갑고 어두운 현실이 인도의 메마르고 거친 풍광과 함께 펼쳐진다. 결코 지나치기 어려운 작은 보석과도 같은 영화.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pig2021-pebbleskoozhangal-2021.html

7. Turning Red(2022)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문화적 다양성을 어떻게 포장하는지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turning-red-2022.html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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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카인주(Rakhine State)는 미얀마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주이다. 리카인주에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불교도 아라칸족(Arakanese)이, 그 다음으로는 이슬람교도 로힝야족(Rohingya), 그리고 여러 소수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라카인주의 어느 마을, Hla라는 이름의 산파(産婆)는 신참 조수 Nyo Nyo를 수련시키는 중이다. Nyo Nyo는 로힝야족으로 이슬람교도이다. Hla는 불교도로 자신의 진료소를 갖고 있다. 2016년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으로 라카인주는 준전시() 상태에 처해 있다. 학살을 피해 이미 100만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 국경 지대로 떠났다.

  라카인주에 남아있는 로힝야족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라카인주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로힝야족은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그로 인해 공교육과 의료 서비스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Hla는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로힝야족을 돕기 위해 Nyo Nyo를 조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Hla는 동족들로부터 불교도가 로힝야족을 돕는다는 비난과 위협을 받는다. 그 때문에 진료소 운영도 어려워진다. 과연 Nyo Nyo의 산파 실습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미얀마 출신 다큐멘터리 제작자 Hnin Ei Hlaing는 5년에 걸쳐서 Hla와 Nyo Nyo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불교도인 Hla이 로힝야족 Nyo Nyo에게 보여주는 배려와 연대의식은 분명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Hla의 말과 행동에서는 인종차별적 태도가 드러난다. Hla는 Nyo Nyo에게 'kala'라고 거리낌 없이 부른다. kala의 원래 뜻은 '남부 아시아 출신(South Asian descent)'이지만, 현재는 로힝야족을 멸시하는 '검은 얼굴(Black face)'이란 뜻의 말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흑인(Black people)에게 깜둥이(N-word, negro)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Nyo Nyo는 Hla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몹시 싫어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진료소일을 돕고 있는 Hla의 남편은 TV에서 정부가 만든 프로파간다 방송을 주로 시청한다. 그 방송은 로힝야족이 미얀마 국민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있으며, 그들은 마땅히 축출해야할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Nyo Nyo는 Hla의 진료소에서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산파 실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미얀마 정부가 불교도의 이슬람교도 진료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Nyo Nyo는 자신의 진료소를 열려면 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대도시 양곤에는 Nyo Nyo의 여동생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픈 Nyo Nyo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 로힝야족의 라카인주 밖으로의 이동은 금지되어 있다. 그 즈음, Nyo Nyo는 셋째 아기를 임신하고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한다. Hla는 그런 Nyo Nyo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Nyo Nyo가 산파일로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며 비난한다.

  Nyo Nyo가 처한 상황은 핍박받는 소수 민족 여성의 현실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라카인주는 로힝야족에게 삶의 터전이 아닌 폐쇄된 게토(ghetto)로 그곳에서 로힝야족들은 서서히 말라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로힝야족 남자들은 제대로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농사를 지을 땅도 빼앗겼다. 다큐는 라카인주의 로힝야족이 실업과 마약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린다. Nyo Nyo의 남편도 직업이 없다. Nyo Nyo는 국제 NGO단체에서 지원하는 마이크로 파이낸스(Micro-finance)사업을 맡으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그리고 마침내, 무리하게 빚까지 내어가며 자신의 진료소를 연다. Nyo Nyo의 집 마당에 세워진 진료소 겸 잡화점은 로힝야족 사람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된다.  

  자신의 진료소를 갖게 된 Nyo Nyo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넘친다. 하지만 Nyo Nyo가 처한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Nyo Nyo의 마을 근처에 폭탄이 떨어지고 포연(砲煙)이 안개처럼 마을을 감싼다. 다큐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여자는 함께 웃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는다. 그들의 웃음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수 있을까? 이미 라카인주를 떠난 100만명의 로힝야족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은 요원하다. Nyo Nyo를 비롯해 라카인주에 남은 로힝야족의 미래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자라난다. Nyo Nyo는 자신의 어린 막내딸이 언젠가 라카인주를 떠나 대도시 양곤에서 멋진 삶을 살아가길 꿈꾼다. 로힝야족 산파 Nyo Nyo가 꾸는 그 꿈의 시작에는 불교도 산파 Hla가 있었다. Hla가 Nyo Nyo와 맺고 있는 인본주의적 연대(solidarity)에는 로힝야족에 대한 오랜 인종차별, 증오와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다. 다큐는 분쟁 지역(conflict zone) 라카인주의 두 산파의 관계를 통해 미얀마의 인종적 갈등과 복잡한 정치 현실을 가늠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두 산파 Nyo Nyo와 H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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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시타 케이스케가 바라본 전후의 일본 사회와 태양족


*이 글에는 영화 '태양과 장미'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한여름의 바닷가, 피서 인파로 가득한 해수욕장에 한 청년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있다. 누군가 물에 빠졌다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바다로 몰려간다. 그러자 청년은 자리를 비운 누군가의 소지품을 잽싸게 훔쳐서 달아난다. 청년은 같은 또래의 불량배 친구들와 어울리며 절도 행각을 이어간다. 하는 일 없이 동네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주먹다짐을 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다. 키요시의 모친은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아들이 마음을 다잡고 돈을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주면 좋으련만, 그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는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Keisuke Kinoshita) 감독의 영화 '태양과 장미(太陽とバラ, The Rose on His Arm, 1956)'는 전후의 상흔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일본 사회를 응시한다. 이 영화의 제목에 나오는 '태양'은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 '태양족(太陽族, Taiyouzoku)'과 무관하지 않다. 그 단어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가 1955년에 발표한 소설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에서 유래되었다. 소설은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하며 무절제한 향락에 빠진 청년 세대의 모습을 그렸다. 기성 세대에게 태양족의 출현은 충격이었지만, 젊은이들은 태양족에 그들의 욕망을 투사했다. 영화사들도 태양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도 그런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 '태양과 장미'의 주인공 키요시를 '태양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하층 계급 불량배 청년의 모습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태양족'은 키요시의 모친이 가정부로 일하는 부잣집 아들 마사히로이다. 부유한 부모를 둔 마사히로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 고급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비싼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 마사히로가 키요시가 마음에 든다며 호의를 베푼다. 그는 키요시를 공장에 취직시켜주고, 자신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키요시를 끼워주기도 한다. 키요시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와 대비되는 마사히로를 동경하면서도 증오하는 양가 감정을 갖게 된다. 이 영화의 이러한 갈등 구조는 르네 클레망(René Clément)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1960)'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영화의 원작은 Patricia Highsmith의 소설 'The Talented Mr. Ripley(1955)',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소설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태양과 장미'의 플롯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과 매우 유사하다.

  키요시와 마사히로의 관계에 내재된 갈등은 단순히 계급적인 것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마사히로의 입장에서는 가정부의 아들인 키요시와 어울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키요시는 마사히로가 왜 자신에게 잘해주는지 묻는다. 마사히로는 '키요시의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라고만 답한다. 감독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생전에 명백히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는 동성애자였다. 영화 속 마사히로가 키요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묘한 욕망으로 얽혀있다. 어떤 면에서 마사히로는 감독의 영화적 자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영화는 마사히로의 키요시에 대한 동성애적 갈망을 최대한 숨긴다. 대신에 계급적 우위에 선 마사히로의 가학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마사히로는 부자 친구들 앞에서 키요시를 놀리고 모욕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마사히로가 키요시에게 자신의 옷장에서 멋진 셔츠를 꺼내어 입게 할 때에 드러난다. 키요시는 싸구려 셔츠를 벗고 마사히로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마사히로에게 키요시는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과 같은 존재이다. 키요시는 마사히로가 쓰는 돈과 향락에 종속되어 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가난한 청년과 부유한 태양족의 삶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거기에 더해 전쟁의 여파가 하층 계급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한다. 키요시의 가족은 빈곤과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키요시는 부모가 팔라우(Palau)에서 지낼 때 태어났다. 2차 대전 시기, 일본은 아시아 곳곳에서 침략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키요시의 부모도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이 점령한 팔라우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패전과 함께 키요시의 가족은 돌아와야만 했다. 결국 암시장 상인이 되어 생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키요시의 아버지는 자살했다. 키요시의 모친은 그러한 비극적 가족사를 키요시에게 상기시키며 키요시가 사회의 일원으로 안착하길 소망한다. 하지만 키요시는 어머니가 바라는 정상적인 삶에서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이 영화에서 '장미'는 키요시 가족의 희망을 상징한다. 키요시는 어린 시절에 병으로 죽을 뻔했었다. 기적적으로 아들이 목숨을 건진 후, 모친은 장미 꽃밭에 기쁨으로 쓰러졌던 일을 회상한다. 이후 키요시의 어머니에게 장미는 잊을 수 없는 꽃이 되었다. 하지만 모친은 지금 생계를 위해 두 딸과 함께 쉴 새 없이 종이 장미를 접는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이 가족은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며 살아갈 뿐이다. 속썩이는 아들이기는 해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키요시는 팔에 장미 문신을 새긴다. 어쩌면 키요시의 그 문신은 어머니의 소망대로 살아가고픈 그 나름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키요시의 어설픈 태양족 따라하기는 결국 파국을 맞는다. 키요시는 자신과 가족을 거리낌 없이 모욕하는 마사히로를 칼로 찌른다. 키노시타 케이스케에게 있어 계급 갈등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살의(殺意)를 불러일으킬 만큼의 격렬함을 내포한다. 절망으로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 부친처럼 키요시도 같은 방식으로 삶을 끝낸다. 키요시의 팔에 새긴 희망의 장미는 그렇게 으스러진다.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남아있었으며, 전후의 놀라운 경제 성장은 빈부 격차를 더 크게 만들고 있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태양족 열풍에 가려진 전후 일본 사회의 그늘을 냉철히 응시한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영화 리뷰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 195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tattered-wings-1955.html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danger-stalks-near-1957.html

봄날이여 안녕(惜春鳥, Farewell to Spring,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rewell-to-spring-1959.html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thus-another-day-1959.html


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A Legend or Was It?,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0/legend-or-was-it-19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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