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네가 들리지 않는 바다로 간다
이곳의 하늘은 흐리고 눅눅하다
너는 가끔 달팽이를 씹고 우물거렸는데
그 달팽이 하나가 내 손 안에 있다
나는 달팽이를 파도 속에 밀어넣는다
붉은 부리의 갈매기가
너의 달팽이를 삼켜버릴 때
달팽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모래 속에서 나는 쓰라린 것들을 모은다
부서진 조개껍데기와
푸른 녹이 낀 오래된 동전
불안과 잡동사니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눅진해진 얼굴에서는 쓴맛이 난다
너는 소금의 쓴맛을 모르고 살아왔다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시간에 휘어진 등을 살짝 펴본다
각자의 속도로 바람이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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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엄마는 그릇을 옷장에 넣어둔다
엄마는 자식이 넷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하나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어제, 엄마의 오랜 친구가 전화를 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엄마가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는 참으로 기이한 말이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 것이 좋다
아주머니도 그렇게 다르게 흘러갔다
아주머니의 딸은 이제 납골당에 있다

행복은 불행의 부재(不在)인 거겠죠
그는 인터넷 게시판에 그렇게 썼다
그의 우울증은 오래되었다
나는 그가 잘 버텨내길 바란다
불행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모래 먼지가 되어 산뜻하게
평균의 사람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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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층


39층의 방화문은 열리지 않는다
39층 이하의 사람들은 옥상으로 갈 수 없다

며칠 전에는 아파트의 정기 소독이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란 염색 머리 여자가 물었다

소독하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소독이 필요한 것은 집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온몸에 문신을 한 개가 쉴 새 없이 짖는다
복도에 떨어진 커다란 바퀴벌레의 얼굴
여자는 개 목줄을 길게 늘어뜨리며 지나간다

나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비상계단을 오른다
39층의 방화문 앞에서 녹음기를 켜고 소리를 채집한다
81층의 옥상에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시간
방화문의 영구 폐쇄를 건의하는 남자의 웃음소리
차별의 몸가짐을 알량한 생애에 걸쳐 학습한 목소리

그들을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나를 가르친 선생들은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유명한 상을 받았으며 길고 지루한 책을 써냈다
그러므로 이제 39층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좋은 교육의 시를 쓴다
올라갈 수 없는 81층의 시멘트 하늘과
방화문의 부서진 손잡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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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시


평범함에 침을 뱉어주고 싶었던 때가 있었지
수직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경멸하면서
불운이 비범해질 때
너는 눈을 잃고 나는 왼쪽을 잃었지

치욕의 터널을 지나가는데
라디오에서 너의 소문이 흘러나와
평범해진 네가 부끄러워
나는 삐긋이 웃었어

어제는 바짝 날을 세운 평범함에
손가락을 베었는데
딱 한 방울의 피를 흘리고는
죽을 것만 같았어
이대로 죽어버릴까
평범한 무덤에 누워서

그렇다면 평범한 시를 쓰도록 하지
자기복제를 일삼으며
실험실의 누린내를 풍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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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대의 시인


배가 고파서 헌혈을 하러 갔더니
도서상품권과 72색 색연필을 주더군
다정한 말을 기대했는데
언제나 얼어붙은 따귀를 맞았지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하나 살까
시집(詩集)을 한 권 샀어
썩어가는 두부로 써 내려간 시
죽어버린 뇌는 그렇다 하더군

가래 낀 목소리로 잘 팔리는 시를 읽어
단맛이 줄줄 흐르는 자본주의의 시
스테비아 토마토의 맛이 나는 것 같아
전에는 토마토에다 주사기를 꽂았다는데
이제는 통째로 담궈 스테비아 물을 먹인다는군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72색 색연필의 케이스를 열어
보라색 색연필을 씹어먹지
왜 보라색인지 당신은 묻겠지
그건 당신의 삶이 보라색이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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