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러닝화를 세탁하고 보니 옆부분이 밑창과 분리되어 있었다. 좀 이상했다. 이 러닝화는 겨우 3개월 신었을 뿐이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떨어지다니...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 보니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이 러닝화는 그러니까 7년 전인가 8년 전 쯤에 브랜드가 철수하기 전, 막판 정리 세일할 때 사놓은 것이다. 좋은 러닝화라서 아낀다고 한 것이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신발장에 고이 모셔둔 그 러닝화를 올해 봄이 되서야 신었다. 그동안 신고 버린 러닝화가 여러 켤레인데도, 이건 어쨌든 신는 것이 아까웠다.

  러닝화는 마치 맞춤 신발처럼 그 어떤 물집도 잡히지 않았고, 발도 아프지도 않았다. 정말 좋은 거네,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신은지 3개월 만에 그 러닝화 옆구리가 다 터지고 갈라지고 있었다. 그랬다. 이 러닝화는 땅 위에서 보내야할 시간 동안 신발장에서 삭고 있었다. 순간접착제를 손가락에 묻혀가며 겨우 붙여놓기는 했다. 그러나 접착된 부분이 얼마나 붙어있을지도 모르고, 이미 러닝화는 내구연한을 지나버린 상태였다. 올해까지는 신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가끔 등산 관련 글에서 보게 되는 일화가 있다. 비싼 등산화를 사놓고 아끼다가 오랜만에 산에 신고 갔는데, 갑자기 밑창이 벌어지는 바람에 곤욕을 치루었다는 경험담. 신발의 접착제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지나면 경화되어서 갑피와 창이 분리될 수 있다. 남이 겪은 곤란에 대한 글은 무심히 읽다가, 그것이 나의 일이 되면 갑자기 뜨거운 물에 손을 덴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나는 일개 공산품인 러닝화의 수명에 대해 대단한 신뢰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신발은 살아 숨쉬는 생물이 아니므로 썩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이 러닝화는 신발장에서 비가역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아동학 강의를 떠올렸다. 할머니 교수의 1학기 강의를 요약하면 이랬다.

  - 유전 대 환경(Nature vs. Nurture)의 논의는 이제 무의미하다. 유전이 거의 모든 것(99.9999.....%)을 결정한다.
  - Time is everything! 영유아의 발달에서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의 존재는 시간의 중요성을 입증한다. 그 시기를 놓치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동의 발달에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순간접착제가 들러붙은 손가락으로 러닝화 접착 부분을 꾹꾹 눌러주면서,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해야만 했다. 조각이 나서 떨어지고 있는 러닝화 로고가 눈에 띄어서 그것도 함께 붙여 주었다. 그렇게 러닝화 자가 수선을 끝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발장에는 그렇게 사놓은 러닝화가 두 켤레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1-10-14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15 0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Chorus)의 역할은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극의 내용을 설명하고, 때론 춤과 노래로 적극적으로 극에 참여하기도 한다. 중국의 3세대 감독 시에진(谢晋)의 '무대 위의 두 자매(Two Stage Sisters, 1964)'에서 영화에 배경으로 깔리는 합창단의 노래는 바로 그 코러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의 중요한 대목마다 상황을 요약하고 주인공의 정서를 잘 묘사해서 들려준다. 예를 들면 주인공인 두 의자매가 극적으로 대면하는 법정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재판정에 많은 참새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까마귀가 섞여 있구나' 여기에서 까마귀는 의자매를 갈라놓으려는 불의하고 사악한 이들을 뜻한다.

  영화는 1930년대, 시골 마을을 찾은 월극(越剧) 극단의 공연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앳된 외모의 젊은 여자가 관객들 사이로 필사적으로 달아난다. 여자를 뒤쫓는 이들은 밧줄을 들고 있다. 여자는 극단의 소품 상자에 몸을 숨긴다. '춘화'라는 이름의 이 여자는 매매혼으로 팔려온 시집에서 도망을 쳤다. 단장은 반대하지만, 딱한 처지의 그를 연기 사부 싱이 받아들인다. 춘화는 싱의 지도하에 그의 딸인 여홍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된다. 가난한 떠돌이 극단이지만, 춘화와 여홍은 의자매로 서로 힘이 되어주며 배우의 길을 걷는다. 사부가 세상을 뜬 후, 교활한 단장 아신은 두 자매를 상하이의 인기 극단에 팔아넘긴다. 대도시 상하이에서 춘화와 여홍은 인기 배우가 되지만, 단장 탕은 막대한 수익을 가로챌 뿐만 아니라 여홍에게 접근한다. 여홍은 안락한 생활을 꿈꾸며 점점 변해가고, 춘화는 그런 여홍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결국 무대 위의 두 자매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무대 위의 두 자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여성들 사이의 연대이다. 봉건제의 굴레 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춘화는 여홍의 부친인 싱 사부의 도움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같이 무대에 서게 된 두 여성은 곧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된다. 의자매는 당시 사회적인 약자로 천대받는 여배우들의 현실과 마주한다. 돈만 밝히는 극단 단장 아신은 지방 세도가에게 성 접대를 하라고 여홍을 겁박한다. 거부하는 여홍에게 아신은 '배우라면 그런 걸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무대 바깥의 세상이 이 여배우들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적 착취의 위협과 더불어 출연료의 강탈도 춘화와 여홍을 힘들게 만든다. 아신을 비롯해 상해 극단의 탕 단장은 의자매를 노예처럼 예속시키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쓴다. 그런 가운데 굳건했던 춘화의 여홍의 사이는 흔들리고,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된다.

  돈의 힘에 굴복해 탕의 아내가 된 여홍. 춘화에게 있어 여홍의 자리는 곧 좌파 여기자 장보로 메꿔진다. 장보는 춘화를 사회주의 사상에 눈뜨게 한다. 이미 극단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와 부패를 목도한 춘화는 사상적 교사라고 할 수 있는 장보와 새로운 유대를 쌓는다. 그것은 춘화를 그저 뛰어난 월극 배우에서 혁명에 기여하는 예술가로 거듭나게 만든다. 이 여성들의 연대적 공동체는 급기야 춘화가 탕의 극단에서 벗어나 독립 극단을 만드는 것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베이징을 기반으로 하는 경극(京剧)과는 달리 절강성에서 유래한 중국 남부 지방의 월극은 주요한 배역을 여성들이 맡는 여성 중심의 극이다. 춘화는 여배우를 착취하는 기존의 극단과 그 세계의 수구적 인물들을 단호히 거부한다. 영화 속에서 아신과 탕은 청산해야할 봉건적 잔재,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처럼 묘사된다.

  영화의 이러한 설정들은 소련 예술 작품의 창작 원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과 일맥상통한다. 장보는 춘화에게 탕과 같은 인물들의 배후에는 결국 미국이라는 악이 존재한다며 일러준다. 시에진 감독은 중국 공산당의 이념을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여기에 헐리우드 멜로 드라마의 내러티브를 융합시킨다. 부도덕한 탕과 결혼한 여홍은 탕의 학대를 받으며 피폐해져 간다. 탕에게서 버림받은 극단의 여배우는 모멸감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강인한 사회주의 예술 전사로 변모하는 춘화, 그와 대비되는 비극적 이야기의 축에 그런 여성들이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멜로 드라마의 결합, 거기에 '월극'으로 대표되는 중국 전통극의 공연 형식까지 더해진 이 독특한 영화는 시에진 감독이 이뤄낸 성취이다.

  훗날, 이 영화의 멜로 드라마적 요소는 극렬한 논쟁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부르주아적 감성을 옹호했다며 문화 혁명 시기에 영화는 매도당했고, 시에진 감독은 반동으로 몰렸다(문혁 시기 시에진 감독의 개인적 경험과 성찰은 그의 대표작 부용진(芙蓉镇, 1986)에서 잘 드러난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는 원로 여배우 또한 문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비극적 선택을 했다.


  분명히 '무대 위의 두 자매'는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며, 그것은 주인공 춘화의 예술적 변모로도 입증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춘화는 당 소속 선전 극단의 일원으로 지방 순회 공연을 다닌다. 여홍이 은거하고 있는 시골 마을을 찾은 춘화가 공연하는 극은 '백모녀(白毛女)'이다. 민간설화에서 유래한 이 이야기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설파하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신가극 백모녀의 줄거리는 이렇다. 봉건제 치하에서 고통받다 자살한 여자의 원혼이 백발의 귀신이 되고, 결국 혁명군의 도움으로 악질 지주에게 복수를 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문혁 시기에 이 영화가 겪은 소란은 어떤 면에서 '무대 위의 두 자매'가 지닌 느슨하고 유연한 예술적 양식에서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시에진 감독은 맹목적으로 혁명의 이상을 영화 속에 재현해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현실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매매혼에서 탈출한 춘화가 보여주는 봉건제의 악습,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배우가 마주하는 부조리한 현실, 억압적 가부장제에서 고통받는 여홍, 그러한 영화적 설정은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중국 전통극에 대한 애정을 가진 감독이 녹여낸 영화 속 공연 장면들은 '무대 위의 두 자매'를 반짝거리게 만든다. 관객은 1930년대에서 1950년에 이르는 중국 역사의 격동기를 월극 여배우의 인생 이야기 속에서 발견한다.      



*사진 출처: sinethetamagazine.tumblr.com



*다음 글은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요새는 글을 늦게 쓰는 습관이 들어서 글 한 편을 쓰고 나면 새벽 두세 시가 되곤 했다. 글을 쓰고나서 바로 잠이 오는 것도 아니어서 조금은 뭉그적거리다가 잠이 쏟아지면 그제서야 잘 수 있었다. 며칠 전에도 그렇게 늦은 시각에 그냥 영화 커뮤니티 사이트의 지난 글들을 뒤적거리던 참이었다. 계속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글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내가 아는 이의 이름이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전공 수업들 가운데 영화사 수업을 가장 좋아했었다. 영화사 수업을 듣는 일은 마치 집을 짓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영화'라는 집을 이루는 각각의 구조들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 벽돌을 쌓고 미장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혼자의 힘으로만 그 작업을 한다면 버거웠겠지만, 다행히 나는 좋은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사 수업은 대부분 강사 선생들이 맡아서 했는데, 그 선생들은 영화에 대한 열정과 좋은 식견을 지닌 이들이었다. 나는 나의 젊은 시절에 그런 이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미국 영화사'였다.

  그 수업은 매 강의마다 과제로 봐야할 영화들이 적게는 서너 편, 많게는 예닐곱  편이었다. 강의를 맡은 영화평론가 선생은 그 영화들을 직접 비디오 테이프로 다 떠서 수강생들에게 건넸고, 우리는 그걸 일주일 동안 돌려가면서 봤다. 그렇게 본 영화들이 그리피스(D.W. Griffith)의 'The Birth of a Nation(1915)', 'Intolerance(1916)',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의 'Greed(1924)' 같은 작품들이었다. 아마 지금의 나에게 그런 영화들을 보라고 하면 못볼 것 같다. 마른 골판지를 씹는 듯한 그런 영화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그 영화들이 10시간 짜리에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다 보았을 것이다.

  수업은 그날 보기로 한 영화와 수강생의 발제, 선생의 해설로 이루어지는 꽤 빡빡한 강의였다. 일주일 동안 미국 영화사 과제 영화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지만, 우리들 가운데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수업에 대한 선생의 열정과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속성 스파르타 강훈을 받듯 미국 영화사에 대한 대략의 지도가 한 학기 동안 그렇게 마음 속에 그려졌다. 선생은 매우 소탈하고 격의없는 성품의 사람으로 학생들에게도 가르치는 이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나와는 비슷한 또래여서, 나는 선생을 나 보다 먼저 영화를 공부한 선배처럼 생각했다.

  우리끼리는 그를 '홍 선생'으로 불렀다. 홍 선생은 늘 커다란 가방에 수업에 쓸 자료와 비디오 테이프들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맡은 수업에 최선을 다했다. 매 수업 시간에 발표할 발제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서 주는 때도 있었다. 기말 보고서는 미국 영화들 가운데 한 편을 택해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선생은 학생들이 보고서로 쓰려는 영화들에 대해 미리 듣고, 도움이 될 만한 참고 자료들까지 건넸다. 그렇게 한 학기 수업이 끝났을 때, 나는 '영화'라는 집의 작은 한 부분을 완성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수업이 끝난 것을 모두들 아쉬워 했다.

  가끔씩 우리는 미국 영화사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참 좋은 수업이었고, 선생의 수업을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학과 강의와 더 이상의 인연은 없었는지 선생의 강의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선생은 잡지에 계속 글을 써내어서, 그렇게 글로나마 만나는 것이 반가웠다. 그의 글은 명료하고 단아했다. 비문(非文)과 자의식 과잉, 현학적 문체로 범벅이 된 여느 평론과는 결이 달랐다. 독자가 알아듣기 쉽게 편한 문체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쓰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글을 좋아했었다.

  '부고, 홍성남 영화평론가 별세'

  글을 클릭하자, 부고 기사 페이지로 연결되었다. 작년 10월의 기사였다. 나는 꽤 오랫동안 영화와 담을 쌓고 지냈으므로 선생의 소식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있었다. 가끔씩 보게 되는 신작 영화평이나 영화 잡지 기사에서 선생의 이름이 어느 때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평론이 아닌 영화계의 다른 일을 하는가 보다, 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세상을 뜨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선생이 꽤 긴 시간 투병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기사를 읽고 황망한 마음이 들어 한참동안 거실을 서성였다. 선생의 미국 영화사 수업과 나의 젊은 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영화를 사랑했었고,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한 사람이 그렇게 먼 곳으로 떠났다. 그가 이 세상에서 영화와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바스락, 추억의 한 귀퉁이가 접히면서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부디 지금 있는 그 곳에서 편히 쉬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은 영화 '검은 태양'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재즈를 좋아하지도 않고, 트럼펫도 불지 못하고, 노래도 할 줄 몰라. 그러니까 진정한 흑인이 아니지. 노예라구!"

  고철이나 훔쳐서 겨우 먹고 살아가는 애송이 양아치 메이(Mei)는 재즈광이다. 식료품 구입하기도 빠듯한 처지에 재즈 음반들을 열심히 사서 듣는다. 동료와의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고 탈영한 미군 병사 길(Gill)은 메이가 살고 있는 곳에 몸을 숨긴다. 곧 철거를 앞둔 오래된 교회 꼭대기가 메이의 집이다. 흑인 재즈 연주자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메이는 흑인 병사 길을 환대한다. 그러나 다리에 총상을 입고 쫓기는 처지의 길은 오로지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는 메이가 틀어놓는 재즈를 견디질 못한다. 급기야 메이가 아끼는 개 몽크를 죽게 만들고, 격분한 메이는 길에게 검둥이 노예라고 모욕을 준다. 기관총을 든 탈영병과 도시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좀도둑,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그 두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쿠라하라 코레요시(蔵原惟繕) 감독의 1964년작 '검은 태양(Black Sun)'은 여러모로 이색적인 영화다. 우선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결정하는 요소는 재즈 음악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메이는 음반 가게에서 Max Roach의 음반을 산다. 비밥(bebop)의 선구자라고 할 수 Max Roach, 그의 강렬한 비밥 재즈가 영화를 휘감는다. 주인공 메이는 재즈에 반쯤 미쳐있다. 그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개의 이름은 재즈 연주자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에서 따왔다. 이 재즈 신도의 흑인에 대한 환상은 미군 흑인 병사 길에게 그대로 투사되지만, 도주 중인 탈영병은 메이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이 영화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인종차별주의적인 관점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길의 총을 빼앗아 제압한 메이는 자신의 단골 재즈 클럽에 데려가기 위해 길의 얼굴에 흰색 분칠로 분장을 시킨다. 거리에는 수색 중인 미군들이 깔려있다. 정작 검문을 당한 것은 검은칠로 분장을 한 메이이다. 메이는 클럽 손님들에게 길을 자신의 노예라고 소개하고, 그들은 길을 서커스단의 원숭이처럼 억지로 춤을 추게 만든다. 그들이 흠모하는 재즈 연주자들은 사진과 음반 속에서 존재할 뿐이며, 현실의 흑인은 그저 열등한 인종으로 인식된다. 영화의 이런 장면은 일견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배제된, 인종에 대한 노골적 편견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클럽의 젊은 일본인들의 길에 대한 태도는 노예제와 인종차별의 역사를 지닌 미국의 모습을 거울처럼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쿠라하라 코레요시 감독은 도시의 최하층 부랑자 메이와 흑인 병사 길을 하나로 묶는다. 영화 초반부에 강에서 건져지는 병사의 시신이 흑인인지 백인인지는 정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길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쿠라하라 감독은 영화 중간에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 시위 장면을 몽타주로 제시한다. 조국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는 흑인을 대표하는 존재인 길은 낯선 이국 땅인 일본에서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다. 흰색 분칠로 자신의 피부색을 감추어야만 하고, 총상 입은 다리는 썩어들어가고 있다. 그는 연신 '엄마(mama)'를 중얼거리며, 메이에게 자신을 바다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머물던 교회가 철거되면서 있을 곳도 없어진 메이와 죽음의 기운을 느끼는 길, 이 두 사람의 여정은 마치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1991)'를 떠올리게 만든다. 말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쌓인 적대감은 해소되고 둘은 연대감을 느낀다. 결국 바다가 보이는 곳에 도착한 메이와 길, 그곳의 풍경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가 넘실거리는 공장 부지와 접한 해안가,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공장의 옥상에 도달한다. 옥상의 대형 광고 풍선에 몸을 묶은 길은 메이에게 밧줄을 끊어서 자신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검은 태양'은 인종간의 갈등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문화 충격을 비주류적인 감성으로 담아내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마무라 쇼헤이와 스즈키 세이준이 상업적인 관점을 놓치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코레요시 쿠라하라는 자신의 독창성을 좀 더 우위에 둔다. 촬영 기법에서도 이 감독은 핸드 헬드를 여유있게 구사하며, 메이가 거주하는 비좁은 교회 공간도 효율적으로 포착한다. 그가 당시 닛카츠(日活) 영화사에서 태양족(太陽族) 영화를 찍으면서 체득한 젊은 세대에 대한 탐구는 이 영화에서도 이어진다. 소비지향적이며 서구 문물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보여주는 전후 세대의 모습과 함께 미군정 이후 일본 사회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미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는다.

  영어 자막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될 경우, 당연히 길의 대사 부분은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길의 대사가 단순하고 별로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도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다. 이건 관객의 영어 실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영어 원어민의 리뷰를 읽어보면 길의 대사를 알아먹을 수 없다고 불평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길 역을 연기한 배우 치코 롤랜드(Chico Roland, 그의 본명은 Chico Lourant이다. 아마도 일본어의 영어 발음 때문에 로랑을 롤랜드로 바꾼 듯하다)가 전문 배우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는 배우로서의 발성이 전혀 되지 않으며, 부상병 역을 연기한다고 거의 뭉개지고 웅얼거리는 말투로 일관한다. 롤랜드는 당시 여러 편의 일본 영화에서 나름 조역을 담당했는데, 그 이력이 참으로 흥미롭다. 주한 미군 출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생계를 위해 트럼펫을 배워 재즈 연주자가 되었다. 쿠라하라 코레요시 감독은 그를 재즈 클럽에서 보고는 이 영화에 캐스팅했다. 감독의 요구대로 영화 속에서 롤랜드는 트럼펫도 불고, 노래도 부른다. 어떤 면에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대사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몰입감을 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관객은 길의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메이의 입장에서 두 사람의 내적인 유대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명의 낙오자가 비극적 최후를 향해 질주하는 영화 '검은 태양'에는 그런 뒷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소련 영화 속 확장된 상상의 영토로서의 사막, 사막의 하얀 태양(Белое солнце пустыни, The White Sun of the Desert, 1970)



  이 영화의 대본은 3년 동안 소련 영화계를 떠돌아 다녔다.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연출을 제안받은 감독들마다 손사래를 쳤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미르 모틸(Vladimir Motyl) 감독에게 시나리오가 떨어졌다. 이래저래 잘 풀리지 않았던 이 감독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모틸 감독은 연출료로 받게 될 돈이 절실했다. 영화는 촬영 시작부터 불운의 연속이었다. 소품으로 대여한 물품들이 도난당하는가 하면, 내정된 주연 배우가 술 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바람에 교체해야만 했다. 뜻대로 나오지 않는 장면들 때문에 재촬영을 거듭하다 보니 예산이 초과되었고, 급기야 모틸 감독은 해고 통보를 받기도 했다. 어렵게 다시 현장으로 복귀한 그는 영화를 겨우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 국가 영화 위원회(Goskino)의 반응이 영 신통치가 않았다. 영화의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개봉하기 어렵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모틸 감독이 나중에 행운,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난다. 당시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서부 영화의 광팬이었다. 그는 이 영화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막의 하얀 태양'은 소련 관객들과 만나게 되었다.

  미국 영화에 서부극(Western)이 있다면, 소련에는 그것과 대비되는 Red Western인 Eastern이 있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소련은 촬영 장소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북부 시베리아부터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초원에 이르기까지 어떤 배경의 시나리오든 소화해낼 여력이 있었다. 다게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은 사막 지형을 품고 있어서 총잡이 활극을 찍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영화들은 새로운 것을 원하는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1960년대, 이국적인 배경의 영화들이 높은 흥행 실적을 기록하자 비슷한 영화들이 연달아 제작된다. 코미디 영화의 대가였던 레오니드 가이다이(Leonid Gaidai) 감독의 1967년작 '카프카스 납치(Kidnapping, Caucasian Style)'는 북 카프카스 지역을 배경으로 '신부 납치'라는 지역적 소재로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는 1967년 개봉작 가운데 최대 흥행 실적을 올렸다. 그 시기에 나온 소련 영화들은 내부적으로 개척해나간 상상의 영토들을 보여준다. 역시 가이다이 감독의 작품인 '이반 바실리예비치 씨, 직업을 바꾸다(Ivan Vasilievich: Back to the Future, 1973)'는 타임 슬립을 소재로 이반 뇌제가 다스리던 16세기와 현실을 오간다(제작사 Mosfilm에서는 한글 자막을 지원하는데, 자막의 수준은 상당히 실망스럽다).

  '사막의 하얀 태양'의 배경도 확장된 상상의 영토였다. 1920년대 카스피해 동부 해안, 적백 내전의 끝자락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적군(赤軍) 병사 수코프는 사막의 모래에 파묻힌 사이드를 구해준다. 지역 산적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재산을 빼앗긴 그는 절망한 상태. 살려준 수코프에게 왜 살렸냐며 원망하기도 하지만, 마음으로는 고마움을 느낀다. 사이드와 작별한 수코프는 적군 지휘관과 조우하고, 지휘관은 지역 갱단 두목 압둘라의 여러 부인들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떠맡긴다. 적군에 의해 쫓기는 압둘라는 무슬림의 법에 따라 함께 데려가지 못하는 부인들을 다 죽일 계획이었다. 그가 돌아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여자들을 수코프는 마지못해 호위한다. 그런데 탈출에 성공한 압둘라는 부하들과 함께 수코프를 추격한다. 과연 수코프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소련의 Eastern을 헐리우드 웨스턴과 비교하는 일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전반적으로 제작 품질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도 보고 있노라면, 왜 국가 영화 위원회에서 개봉을 주저했는지 알게 된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그다지 개연성 없는 줄거리와 늘어지는 내러티브, 허술하기 짝이 없는 총격전에 실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해 개봉된 소련 영화들 가운데 관객 동원 5위를 기록했고,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인기를 더해갔다. 확실히 이 영화에는 러시아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유머 감각과 정서가 있다.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단번에 인기곡으로 등극했다. 소련 영화에서 노래는 무척 중요하다. 이 나라 국민들의 노래(러시아 로망스) 사랑은 정말이지 지극해서, 뭔 영화마다 노래들이 뮤지컬처럼 흘러나온다.

  초기 단계의 시나리오에서 무슬림 압둘라와 그의 여러 아내들의 이야기는 검열 당국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 결과 적군 병사 수코프의 활약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압둘라의 아내들에게 해방을 선언하는 수코프, 그런 그에게는 적군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에서 특이한 점이 엿보이는데, 중간 중간 수코프가 고향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내레이션으로 들어간다. 수코프는 수구적 잔재가 존재하는 그 땅에 혁명이 가져올 자유를 꿈꾼다고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들에게 말한다. 헐리우드 웨스턴이 돈과 욕망, 복수와 정의에 대해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소련의 이 사막 활극은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을 부르짖는다. 결국 소련에서 제작된 모든 영화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대원칙에서 '사막의 하얀 태양'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압둘라와 그 잔당들은 소탕의 대상이며, 압둘라의 아내들에게는 자유가 선물처럼 주어진다. 물론 수코프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없다. 사이드를 비롯해 마을 주민, 무기를 소유한 전직 세관 직원 파벨이 그를 돕는다. 중립적 위치에 있었던 파벨이 수코프의 편에 서는 계기가 흥미로운데, 그는 수코프의 어린 부하 페트루카의 죽음을 보고 마음을 돌린다. 2년 전에 죽은 아들로 상심한 파벨은 페트루카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런 페트루카를 압둘라가 죽이자 파벨은 복수를 결심한다. 파벨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이런 인간적인 모습 또한 소련 관객들에게 정서적인 호소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시대와 이국적 공간 속 이야기에서도 가족이라는 근원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이 가진 영향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수코프가 압둘라의 아내들을 적군 지휘관에게 인계하고 고향땅을 향해 가는 것으로 끝맺는다. 수코프가 나중에 아내를 만났는지, 아니면 어떤 불운에 의해 집에 돌아가지 못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이 열린 결말은 한편으로는 기나긴 혁명의 여정에 놓여있던 소련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적군 병사 수코프가 꿈꾸던 혁명의 이상은 오랜 역사적 실험 끝에 좌절되었다. 소련 영화의 확장된 영화적 영토인 '사막'은 그렇게 모험과 방랑, 표류의 공간으로 남았다.     



*사진 출처: eg.ru   수코프 역의 아나톨리 쿠즈네초프(
Anatoly Kuznetsov)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