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요새는 글을 늦게 쓰는 습관이 들어서 글 한 편을 쓰고 나면 새벽 두세 시가 되곤 했다. 글을 쓰고나서 바로 잠이 오는 것도 아니어서 조금은 뭉그적거리다가 잠이 쏟아지면 그제서야 잘 수 있었다. 며칠 전에도 그렇게 늦은 시각에 그냥 영화 커뮤니티 사이트의 지난 글들을 뒤적거리던 참이었다. 계속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글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내가 아는 이의 이름이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전공 수업들 가운데 영화사 수업을 가장 좋아했었다. 영화사 수업을 듣는 일은 마치 집을 짓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영화'라는 집을 이루는 각각의 구조들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 벽돌을 쌓고 미장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혼자의 힘으로만 그 작업을 한다면 버거웠겠지만, 다행히 나는 좋은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사 수업은 대부분 강사 선생들이 맡아서 했는데, 그 선생들은 영화에 대한 열정과 좋은 식견을 지닌 이들이었다. 나는 나의 젊은 시절에 그런 이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미국 영화사'였다.
그 수업은 매 강의마다 과제로 봐야할 영화들이 적게는 서너 편, 많게는 예닐곱 편이었다. 강의를 맡은 영화평론가 선생은 그 영화들을 직접 비디오 테이프로 다 떠서 수강생들에게 건넸고, 우리는 그걸 일주일 동안 돌려가면서 봤다. 그렇게 본 영화들이 그리피스(D.W. Griffith)의 'The Birth of a Nation(1915)', 'Intolerance(1916)',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의 'Greed(1924)' 같은 작품들이었다. 아마 지금의 나에게 그런 영화들을 보라고 하면 못볼 것 같다. 마른 골판지를 씹는 듯한 그런 영화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그 영화들이 10시간 짜리에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다 보았을 것이다.
수업은 그날 보기로 한 영화와 수강생의 발제, 선생의 해설로 이루어지는 꽤 빡빡한 강의였다. 일주일 동안 미국 영화사 과제 영화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지만, 우리들 가운데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수업에 대한 선생의 열정과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속성 스파르타 강훈을 받듯 미국 영화사에 대한 대략의 지도가 한 학기 동안 그렇게 마음 속에 그려졌다. 선생은 매우 소탈하고 격의없는 성품의 사람으로 학생들에게도 가르치는 이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나와는 비슷한 또래여서, 나는 선생을 나 보다 먼저 영화를 공부한 선배처럼 생각했다.
우리끼리는 그를 '홍 선생'으로 불렀다. 홍 선생은 늘 커다란 가방에 수업에 쓸 자료와 비디오 테이프들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맡은 수업에 최선을 다했다. 매 수업 시간에 발표할 발제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서 주는 때도 있었다. 기말 보고서는 미국 영화들 가운데 한 편을 택해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선생은 학생들이 보고서로 쓰려는 영화들에 대해 미리 듣고, 도움이 될 만한 참고 자료들까지 건넸다. 그렇게 한 학기 수업이 끝났을 때, 나는 '영화'라는 집의 작은 한 부분을 완성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수업이 끝난 것을 모두들 아쉬워 했다.
가끔씩 우리는 미국 영화사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참 좋은 수업이었고, 선생의 수업을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학과 강의와 더 이상의 인연은 없었는지 선생의 강의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선생은 잡지에 계속 글을 써내어서, 그렇게 글로나마 만나는 것이 반가웠다. 그의 글은 명료하고 단아했다. 비문(非文)과 자의식 과잉, 현학적 문체로 범벅이 된 여느 평론과는 결이 달랐다. 독자가 알아듣기 쉽게 편한 문체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쓰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글을 좋아했었다.
'부고, 홍성남 영화평론가 별세'
글을 클릭하자, 부고 기사 페이지로 연결되었다. 작년 10월의 기사였다. 나는 꽤 오랫동안 영화와 담을 쌓고 지냈으므로 선생의 소식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있었다. 가끔씩 보게 되는 신작 영화평이나 영화 잡지 기사에서 선생의 이름이 어느 때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평론이 아닌 영화계의 다른 일을 하는가 보다, 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세상을 뜨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선생이 꽤 긴 시간 투병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기사를 읽고 황망한 마음이 들어 한참동안 거실을 서성였다. 선생의 미국 영화사 수업과 나의 젊은 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영화를 사랑했었고,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한 사람이 그렇게 먼 곳으로 떠났다. 그가 이 세상에서 영화와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바스락, 추억의 한 귀퉁이가 접히면서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부디 지금 있는 그 곳에서 편히 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