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티 해리(Dirty Harry, 1971)'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아니 무슨 형사가 악당보다 더 잔혹하고 무법자처럼 구는가, 참 낯선 형사 캐릭터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 형사를 연기한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같은 해에 제작된 '프렌치 커넥션(The French Connection, 1971)'에서 진 해크먼이 연기한 마약반 형사도 역시 남다른 형사 캐릭터였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범죄자를 단호하게 응징하는 열혈 형사, 때론 선 넘는 폭력도 휘두르는 그런 형사의 모습은 새롭기까지 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The Gauntlet(1977)'에서 그는 또 다시 형사로 나온다. 별 볼 일 없는 형사로 술에 절어 사는 벤 쇼클리는 어느 날 경찰 국장의 부름을 받는다. 라스베가스로 가서 '거스 몰리'라는 증인을 피닉시 시까지 호송해 오라는 임무가 쇼클리에게 주어진다. 남자인 줄 알았던 증인의 직업은 창녀, 매춘 혐의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 몰리는 한사코 가기를 거부하면서, 가는 도중에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경찰서를 떠나는 순간부터 이 두 사람에게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이어진다. 호송차가 폭발하는가 하면, 잠깐 들른 몰리의 집은 경찰의 총격으로 벌집이 되다 못해 무너져 내린다. 도대체 몰리는 무슨 사건에 연루되었길래 이렇게 다들 죽이려고 난리인가, 쇼클리는 수상한 냄새를 맡는다.


  이 영화, 오래된 영화이기는 하지만 날것 그대로의 액션과 그야말로 '찐' 마초 캐릭터 형사의 종횡무진 활약이 돋보이는 숨겨진 명작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런 영화에서 관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의 영화에서라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범벅을 만들어 놓았을 화면을 '진짜' 액션으로 꽉꽉 채워넣는다. 몰리의 집이 총격으로 무너지는 장면에서는 당시로서는 25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쏟아부었고, 세트로 만든 집에 7000군데나 드릴을 뚫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몰리와 쇼클리가 애리조나 사막에서 헬리콥터 저격수에서 쫓기는 장면에서는 '리얼' 헬리콥터가 전선줄에 엉켜서 폭발한다(특수 제작된 헬기로 엔진이 없긴 하지만). 그리고 이 영화의 대미(尾)를 장식하는 버스 총격전에는 총알 8000발에 버금가는 폭파 장치가 사용되었다. 영화 제작비 550만 달러 가운데 무려 백만 달러가 영화 속 갖가지 액션 장면 연출에 쓰였다. 정말 제값하는 폭파, 총격 장면들은 관객들의 기대를 충실히 따라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벤 쇼클리 형사는 '잔말 말고 나만 믿고 따라와'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폭주족한테 오토바이 뺏어서 사막 질주하고, 버스 탈취해서 죽기살기로 총격전을 막아내고, 결국엔 증인 호송에 성공한다. 'The Gauntlet'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의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흥행 감독으로서의 충분한 재능이 있음을 제작자와 관객들에게 강력하게 입증한다. 이 영화를 보는 이라면 누구나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총잡이로 시작한 신인이 어느새 헐리우드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영화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간다. 그러나 배우와 감독으로서 쌓은 눈부신 명성에 가려진 그의 사생활과 인간성은 그렇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 몰리 역을 맡은 산드라 록(Sondra Locke)은 1975년부터 무려 14년 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동거 관계를 유지했다. 말이 동거였지, 거의 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영화 작업을 함께 하는 동료이기도 했다. 산드라는 재능있는 배우로서 연출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골수 마초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산드라가 연출로 발판을 넓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영화 경력에 방해가 된다면서 아이 갖는 것도 거부했다(산드라는 두 번 임신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이를 원치 않았다).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한 관계는 급기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산드라를 집에서 내쫓는 결말에 이르렀다. 산드라는 동거인으로서 위자료 소송을 냈고, 결국 합의금을 받기는 했으나 그 이후 산드라의 영화 경력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더럽게 끝난 소송전, 그리고 산드라와 동거 기간 중에 다른 여자와 바람피우면서 비밀리에 아이도 얻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 뻔뻔함을 어디에 빗댈 수 있을까? 산드라는 나중에 자서전을 냈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사악하기 그지 없으며, 자신을 착취한 거짓말쟁이'라고 맹비난을 퍼붓었다. 물론 이스트우드는 변호사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그뿐 아니라 자서전이 나오지 못하게 방해했다. 이 나쁜 남자의 뒤끝은 그토록 지저분하고 역겨웠다.


  'The Gauntlet'에서 산드라가 연기한 몰리는 창녀이지만 나름대로 명석하고, 순수한 면모도 가지고 있다. 호송차 안에서 자신을 모욕하는 경찰을 말로써 농락하는 깡다구도 있는 여성이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의 쇼클리와 몰리는 실제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초 형사 쇼클리를 사랑하게 된 몰리가 결국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일임하고 청혼까지 한다. 산드라 로크도 지독한 사랑 때문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얽매인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그렇게 허구와 현실을 오간다. 나쁜 남자와 함께 사막을 건너는 목숨 건 여정을 했던 몰리는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는다. 그러나 현실의 산드라 로크는 그 긴 여정 끝에 망가지고 잊혀졌다. 생의 마지막은 암투병으로 지난하고 고통스러웠다.


  영화의 제목은 고대로부터 이어온 형벌에서 따온 것이다. 벌을 받는 사람이 양쪽으로 도열한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곤봉이나 채찍, 창과 같은 무기로 얻어맞는 형벌을 'Gauntlet'이라고 한다. 영화 마지막에 쇼클리는 탈취한 버스로 피닉스 시내에 진입한다. 그때 도로 양쪽에 깔린 경찰들의 총격이 그 Gauntlet 형벌처럼 이루어진다. 그 죽음의 도로를 뚫고 나쁜 남자 쇼클리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다. 어쩌면 그 장면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경력이 앞으로도 불사조처럼 살아남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날아올랐지만, 그때 그의 옆에 있었던 여자는 추락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쁜 남자와 사막을 건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여배우의 비극을 떠올린다.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제리 필딩의 재즈 음악이 아주 좋다. 도입부, 중간 중간의 액션 장면, 결말 부분의 재즈 선율을 놓치는 관객은 드물 것이다. 

**사진 출처: movierambling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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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영화들은 보고 있노라면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다소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무언가 보는 이의 내면을 건드리기 때문인데,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 어떤 의미로든 허탈함과 비애감을 느끼게 된다. 꾸창웨이 감독의 2005년작 공작(孔雀, Peacock)은 문화 대혁명이 끝나가던 무렵, 1970년대 어느 소도시에 살던 일가족의 삶을 펼쳐놓는다. 아직 문혁의 정치적 여진이 남아있는 어수선하고 침체된 시대적 분위기는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러나 꾸창웨이 감독은 최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인물들의 이야기와 정서에 집중한다.


  평범한 소시민 부부에게 세 명의 자녀가 있다. 영화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서사가 진행되는데, 맨 처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딸 웨이홍이다. 동네에 잠시 주둔한 낙하산 부대를 보며 새로운 인생을 꿈꾸던 웨이홍은 지원서를 내지만 탈락한다. 웨이홍은 크게 상심하지만,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삶의 출구는 도무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동네 제약회사에서 약병이나 닦으며 사는 것은 견디기 힘든 모멸감만을 안길 뿐이다. 결국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탈출구를 찾는다. 


  두번째 이야기는 바보형 맏이 웨이구오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이런 방식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1950)'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되며 커다란 그림을 향해 나아간다. 다소 떨어지는 지능과 비만한 체구 때문에 남들에게 놀림받고 얻어맞는 그의 삶도 결코 녹록지 않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들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쳐서 그만두게 된다. 웨이구오는 엄마가 맺어준 다리 저는 아가씨와 결혼해서 포장마차로 그럭저럭 먹고 살아간다.


  마지막 이야기는 막내의 몫이다. 웨이창은 바보형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 신세로 괴롭게 지내다 쥐약을 타서 형을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된다. 늘 형만 감싸고 도는 부모에 대한 불만으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가출해버린 후 가족과는 연락을 끊은 웨이창. 오랜 시간이 흘러서 손가락 하나를 잃고, 애 딸린 여자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돌아온 집에는 이혼한 누나가 부모와 지내고 있다.


  이 영화는 원래 4시간 분량이었던 것을 극장판으로 편집하면서 2시간 25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이야기가 중간 중간에 약간씩 비어있다는 느낌을 준다. 딸 웨이홍이 낙하산 부대에 지원했다 떨어진 후에, 직접 만든 엉성한 낙하산을 자전거에 매달고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웨이홍이 낙하산을 재봉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볼 수 없다. 인물들이 들려주어야할 긴 이야기들이 그렇게 잘려나가다 보니, 영화는 마치 레코드 판에서 갑자기 튀는 부분처럼 툭툭 끊긴다. 어떤 면에서는 세 남매가 마주한 막다른 삶의 골목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영화 '공작'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열렬히 소망하고 갖고 싶어했던 것들, 사랑도 일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매번 만나는 닫힌 삶의 문 앞에서 대충 타협하며 돌아서기를 반복한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세 남매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동물원 나들이를 한다. 그들은 공작새 우리를 지나가면서 공작의 화려한 날개를 보길 기대하며 갖은 애를 쓴다. 그러나 공작새는 그들에게 날개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화면에서 모두 사라진 후에 비로소 공작은 찬란한 빛깔의 날개를 천천히 펼쳐 보여준다. 


  상처입고 접혀진 어떤 날개들은 결코 펼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의 많은 일들이 그러하다. 가진 야망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거듭 좌절하는 웨이홍, 어딜 가나 바보 취급에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버겁기만 한 첫째 웨이구오, 바보형에 대한 수치심으로 삶 자체가 어그러져서 되는대로 사는 막내 웨이창, 그들 삼 남매가 가졌던 꿈의 날개들은 그렇게 세월 속에서 부러져 접힌 상태이다. 그들이 결코 볼 수 없었던 공작새의 날개처럼 삶의 아름다운 빛깔을 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정말로 많은 이들 또한 자신이 지나온 삶에서 그렇게 펼쳐지지 않은 날개들을 발견한다.  


  장예모,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꾸창웨이 감독은 자신의 첫 작품인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연출자로서 인물들의 감정을 충실히 끌어내는 역량이 돋보였을 뿐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도 좋았다. 영화에서 둘째 웨이홍 역을 맡은 장징추의 연기는 신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있고 노련하다. 무려 1000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뽑힌 이 여배우는 '공작'으로 대스타로 발돋움한다. 더하여, 작곡가 도우 펭이 담당한 영화의 음악은 비감하면서도 아름다워서 영화와 함께 긴 여운을 남긴다.  



*사진 출처: moviedoub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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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에 EBS 클래스 e에서 고인류학자 이상희 교수의 '사람의 기원' 강의를 들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은 아니고, 4강부터 들었는데 생각보다 재밌고 유익한 강의였다.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고인류학적인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계기였다고나 할까, 이상희 교수는 그 분야의 새로운 연구결과를 찬찬히 일러준다. 그런데 강의를 도와주는 보조 도구는 호미닌 화석들이 전부였다. 뭔가 자료 화면으로 한번에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나 그런 것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보게 된 다큐가 NHK에서 제작한 'Out of the Cradle; The Origins of Humanity(2018)'이다. 


  러닝 타임이 2시간 가량인데,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화면과 아주 섬세하게 재연된 초기 인류의 사냥과 생활 모습들이 흥미있게 펼쳐진다. 이런 다큐들은 보다보면 그렇다. 정말 돈이 꽤나 드는 다큐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의 기술력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텐데 제작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 싶다. 아무튼 이 다큐는 지금 시점에서 고인류학의 최신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멋지게 포장된 상자에서 선물꺼내듯이 풀어놓는다.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사람 속(Homo)의 유일한 종으로 살아남았지만, 호미닌(Hominin, 이족 보행 영장류)에는 20여 종이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440만년 전에 살았던 '라미두스(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는 화석으로 밝혀진 최초의 이족 보행 영장류로 여겨지는데, 라미두스에서 발 모양이 진화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로 이어진다. 그 이후에 등장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는 도구를 제작하고 육식을 하기 시작한다. 거기에서 나온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는 본격적인 사냥꾼의 면모를 보이며, 그들은 육식을 통해 커진 뇌와 작은 소화기관을 택함으로써 인류 진화의 신기원을 마련한다.


  다큐에서는 호모 사피엔스와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에 대해서도 아주 비중있게 다룬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보다 더 큰 뇌용량과 상대적으로 큰 체구를 가졌음에도 결국 소멸에 이른 네안데르탈인의 삶의 모습이 생생한 화면으로 펼쳐진다. 그들의 사냥 장면을 보면 네안데르탈인들이 정교한 도구 대신 육탄전으로 사냥감에 맞선 소모적인 방식이 멸종에 이른 원인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극심한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사라졌지만, 그들의 유전자는 오늘날의 인류 안에 남아있다.


  그런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현생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도구'였다. 정교하고 다양한 도구를 제작함으로써 인류는 지구 여러 곳으로 퍼져서 살 수 있었고, '인간다움'의 여러 요소를 획득해 나가게 된다. 다큐에서는 그런 도구들과 관련해서 실제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극지방에서 발견된 뼈바늘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뼈바늘은 추위를 막기 위한 털옷 제작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였다. 초기 인류가 극한의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적응하고 생존해나간 비결은 결국 '창의성'이었다.


  라미두스가 두 발로 아프리카 초원을 처음 밟기 시작한 이후로 호미닌들에게 아프리카 대륙은 안온한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극심한 기후변화로 사막화되어가는 그곳을 떠나 낯선 대륙으로 향해야 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해변가에서 그 요람과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그들이 두려움과 설렘, 희망과 불안을 안고서 바다를 바라보는 다큐에서의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이 다큐는 인류 조상들의 삶을 복원해내면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때론 이런 과학 다큐를 통해서도 깊이있게 성찰해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docuwik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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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로드맵 101
스티븐 테일러 골즈베리 지음, 남경태 옮김 / 들녘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읽을만한 책이 없나 책장을 뒤적거리다 아주 오래전에 산 이 책을 발견했다. 사서 한번 보고는 그냥 처박아 두었던 것 같다. 매우 짧은 101개의 글쓰기 조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경박스러움에 무척이나 실망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대체 이걸 왜 샀을까... 지금은 품절이 된 책이지만, 누군가는 도서관에서 기대하고 대출할 수도 있겠지.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시작하는 일은 아마도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사들이는 것이다. 내가 산 글쓰기 책들도 여러 권이다. 그 가운데 그나마 기억에 남는 책은 일본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쓴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정도이다. 나머지는 읽고 나서 돈만 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요새 불고 있는 주식 열풍에서 주식을 처음 시작하거나 좀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그럴 것이다. 가장 잘 팔리고 있는 책들이 주식과 재테크 관련 책들이라고 들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를 시작하려고 할 때 제일 손쉬운 방법이 '책 사는 일'이기는 하다. 


  글쓰기 책들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글이 저절로 써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진실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건질만한 조언이 있다면 '무조건 쓴다'이다. 그냥 써보는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괜찮은 글쓰기 책을 읽었다 해도 정말로 자신이 직접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쓰기 책 대부분은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뭐랄까, 이렇게 글쓰기 책을 읽었으니 더 잘 쓸 수 있겠지, 하는 약간의 자기 위안을 느낄 수는 있겠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글쓰기 책들을 열심히 읽고도 글을 쓰지 못했다. 정말로 써야겠다는 절박함이 없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물론 '무조건 쓴다'고 해서 좋은 글이 당장 나오는 것도 아니다. '글쓰기'는 어쩌면 오랜 시간과 경험과 노력의 축적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생각을 했는지, 삶의 이력과 그 경험의 깊이는 어떤 것인지 누군가가 쓴 글에는 그런 많은 것들이 압축되어 있다. 독자는 자신이 읽는 어떤 '글'에서 그 모든 것들을 가늠해 본다. 그 글이 나오기까지 작가가 보낸 세월과 그것을 알아봐 주는 독자가 만나는 것. 어쩌면 그것이 글을 쓰는 이들이 소망하는 나름의 지향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엇이든 시작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좋다. 무슨 대단한 작품을 써내겠다는 마음은 살짝 내려놓자. 매일, 꾸준히, 작은 것이라도 써보는 습관을 들여 본다. 일기를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내가 작년 가을부터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그렇다. '글쓰기'는 매일 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잘 돌아가지 않는 기계와 같다는 점이었다. 하루를 건너뛰고 나서 다음날 글을 쓸 때는 어떻게 글머리를 열어야 할지 뭔가 영 어색한 느낌이 든다. 


  작년 가을쯤에 EBS 'Class e'에서 작가 장강명의 글쓰기 강의를 들었다. 정말 유용하고 좋은 강의였다. 그가 알려준 글쓰기의 조언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조언이었다.


  '그냥 가만히,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모니터(또는 종이)를 응시하세요.'


  일단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으면 오직 글쓰기만 생각하라는 것이 그가 찾아낸 답이었다. 나는 그렇게 글쓰기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 그리고 진심을 담은 글이라면 언젠가는 그것을 알아봐주는 독자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믿음을 갖고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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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다큐 찍는 사람들마다 만나면 그 소리야. 찍을 게 없대. 하긴 이 좁은 나라에서 뭐 얼마나 찍을 게 있겠어. 그러니까 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싶은 사건 현장에 가보면 다큐 찍는 팀들이 여럿 모여있는 거야. 일본만 해도 찍을 사람이나 이야기가 많다던데. 내가 장담하건대, 다큐의 새로운 개척지는 중국이 될 거야. 두고 봐봐. 한 10년만 지나도 다큐들이 쏟아져 나올 걸. 큰 땅덩어리에,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냐구..."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다큐 수업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중국의 다큐 감독 왕빙의 작품을 보면서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왕빙의 2013년작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Til Madness Do Us Part)'를 보았다. '미세스 팡(2017)'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 그의 작품이다. 이 다큐는 윈난 지역의 어느 정신 병동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말 그대로 3시간 50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미친 사람들만 나온다. 광인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그들의 하루 일상은 어떻게 채워지는지, 가족들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그런 모든 것들을 가감없이 다 보여준다. 꽤나 긴 러닝타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큐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에게는 각각이 가진 사연과 특색이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물론 광인과 직접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자체가 버거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다큐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해 보인다. '정신 병동에 갇힌 미친 사람들은 저렇게 지내는구나', 하는 것과 '근데 저거 어떻게 찍었지?' 하는 의문이다. 나도 그랬다. 무엇보다 어떻게 촬영 허가를 받고 찍을 수 있었나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답을 2014년 Jihlava IDFF(체코 이흘라바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있었던 왕빙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왕빙은 윈난 지역에서 작업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지역 정신 병원 의사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자신이 가진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촬영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정신 병동에 대한 촬영 허가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다큐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게는 어떻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까? 엔딩 크레딧에는 촬영에 동의해준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글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 부분이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환자의 가족들에게 동의를 얻은 것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그곳 환자들의 동의는 과연 촬영 전반에 걸친 그 모든 것에 대한 진정한 동의라고 볼 수 있는가? 병동의 환자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이성적인 사고나 판단이 가능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카메라를 들이대었을 때 별다른 거부 의사가 없으면 동의한 것인가? 아무리 미친 사람들이라고 해도 인권이란 게 있다. 대부분은 그곳에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더러는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이들이라고 해도 저렇게 찍어도 되는 건가? 도대체 나는 왕빙이 엔딩 크레딧에서 언급한 환자들의 '동의'가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이 이루어진 모든 과정에서 과연 그가 다큐 제작자로의 윤리를 얼마나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왕빙의 2017년작 '미세스 팡'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 의식을 느꼈다. 임종 직전의 치매 노인을 찍으면서 가족들의 촬영 동의는 구했지만, 정작 치매 노인 당사자에게서 동의를 구했다는 증거는 다큐 전체를 통털어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왕빙이 자신이 찍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에 대해 아주 집요한 의지와 끈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열정과는 별개로 왕빙은 자신의 촬영 대상이 되는 이들에 대한 윤리적 관점과 지침이 매우 흐릿하다.


  과연 'Til Madness Do Us Part' 같은 다큐를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찍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도 촬영 허가부터도 쉽지 않을 것이며, 환자들은 물론 그 가족과 관련해서 동의를 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왕빙에게는 그 모든 것이 가능했고, 그 결과로 관객들은 광인들이 사는 세상을 '관람'할 수 있는 초대권을 받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이것을 끝까지 보았던 것은 왕빙의 다큐 제작자로서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가 엔딩 크레딧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왕빙의 카메라 앞에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거나, 때론 흥미롭게 바라보고, 어떤 환자들은 아주 친근감있게 다가선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취침 시간인데도 불 켜진 방에서 촬영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불 좀 꺼. 그러면 그가 못볼 거 아냐'라고 말하기도 한다. 때로는 환자들이 문을 닫고 들어가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찍는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은 핸드 헬드로 찍어서 흔들리며, 그렇게 매우 정신사나운 쇼트들은 어쩌면 미친 이들을 담아내는 방법이 그것 뿐이라고 강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빙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피사체를 도구적으로 담는 것이며, 거기에 그 어떤 조화나 균형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 거칠고 조악한 화면들이 왕빙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거기에 미학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을까?


  왕빙은 2014년 Jihlava IDFF 마스터 클래스에서 이 다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 병동의 환자들이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자신은 그들이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자유, 그러니까 병동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는 자유, 예를 들어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법은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이 다큐에서 관객이 느끼기를 바라는 지점은 정신 병동의 환자들이 누리는 한계를 넘어선 어떤 자유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다큐에서 온갖 종류의 광기의 나열과 아무 희망도 없는 무기력의 극치를 보았다.


  병동의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창살 밖을 바라보거나 복도를 배회한다. 왕빙이 말한 어떤 '자유'의 형태가 있다면 유령처럼 끊임없이 배회하고 출몰할 자유일 것이다. 단, 창살로 폐쇄된 방안과 복도에 한해서. 이 다큐를 본 관객들은 자신이 목격한 그 다양한 광기와 그 비인간적인 공간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하게될 뿐이다. 왕빙이 보았던 미친 자들의 특별한 자유에 대한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대다수의 관객들은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할 것이다. 더 나아가 광인들을 가두고 격리하는 그 어떤 방식이라도 찬성하는 편에 서 있게 될지도 모른다.


  왕빙의 카메라는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지만, 거기에는 피사체에 대한 그 어떤 인간적 배려나 윤리적인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다큐를 제작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촬영 대상자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의무와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찍고 싶은 것을 찍을 자유가 그 윤리적 의무 보다 앞선다면, 그리고 그렇게 찍은 다큐가 아무리 좋은 결과물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다큐는 본질적으로 심하게 어그러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 다큐의 중국어 제목은 '瘋愛', 그 뜻은 '미친 사랑'이다. 카메라에 대한 미쳐버린 사랑으로 정말로 지켜야할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의 중요한 윤리적 자세와 관점은 놓쳐버린 것이 아닌지, 왕빙의 이 다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list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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