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다큐 찍는 사람들마다 만나면 그 소리야. 찍을 게 없대. 하긴 이 좁은 나라에서 뭐 얼마나 찍을 게 있겠어. 그러니까 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싶은 사건 현장에 가보면 다큐 찍는 팀들이 여럿 모여있는 거야. 일본만 해도 찍을 사람이나 이야기가 많다던데. 내가 장담하건대, 다큐의 새로운 개척지는 중국이 될 거야. 두고 봐봐. 한 10년만 지나도 다큐들이 쏟아져 나올 걸. 큰 땅덩어리에,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냐구..."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다큐 수업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중국의 다큐 감독 왕빙의 작품을 보면서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왕빙의 2013년작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Til Madness Do Us Part)'를 보았다. '미세스 팡(2017)'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 그의 작품이다. 이 다큐는 윈난 지역의 어느 정신 병동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말 그대로 3시간 50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미친 사람들만 나온다. 광인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그들의 하루 일상은 어떻게 채워지는지, 가족들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그런 모든 것들을 가감없이 다 보여준다. 꽤나 긴 러닝타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큐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에게는 각각이 가진 사연과 특색이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물론 광인과 직접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자체가 버거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다큐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해 보인다. '정신 병동에 갇힌 미친 사람들은 저렇게 지내는구나', 하는 것과 '근데 저거 어떻게 찍었지?' 하는 의문이다. 나도 그랬다. 무엇보다 어떻게 촬영 허가를 받고 찍을 수 있었나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답을 2014년 Jihlava IDFF(체코 이흘라바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있었던 왕빙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왕빙은 윈난 지역에서 작업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지역 정신 병원 의사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자신이 가진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촬영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정신 병동에 대한 촬영 허가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다큐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게는 어떻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까? 엔딩 크레딧에는 촬영에 동의해준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글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 부분이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환자의 가족들에게 동의를 얻은 것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그곳 환자들의 동의는 과연 촬영 전반에 걸친 그 모든 것에 대한 진정한 동의라고 볼 수 있는가? 병동의 환자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이성적인 사고나 판단이 가능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카메라를 들이대었을 때 별다른 거부 의사가 없으면 동의한 것인가? 아무리 미친 사람들이라고 해도 인권이란 게 있다. 대부분은 그곳에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더러는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이들이라고 해도 저렇게 찍어도 되는 건가? 도대체 나는 왕빙이 엔딩 크레딧에서 언급한 환자들의 '동의'가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이 이루어진 모든 과정에서 과연 그가 다큐 제작자로의 윤리를 얼마나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왕빙의 2017년작 '미세스 팡'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 의식을 느꼈다. 임종 직전의 치매 노인을 찍으면서 가족들의 촬영 동의는 구했지만, 정작 치매 노인 당사자에게서 동의를 구했다는 증거는 다큐 전체를 통털어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왕빙이 자신이 찍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에 대해 아주 집요한 의지와 끈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열정과는 별개로 왕빙은 자신의 촬영 대상이 되는 이들에 대한 윤리적 관점과 지침이 매우 흐릿하다.


  과연 'Til Madness Do Us Part' 같은 다큐를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찍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도 촬영 허가부터도 쉽지 않을 것이며, 환자들은 물론 그 가족과 관련해서 동의를 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왕빙에게는 그 모든 것이 가능했고, 그 결과로 관객들은 광인들이 사는 세상을 '관람'할 수 있는 초대권을 받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이것을 끝까지 보았던 것은 왕빙의 다큐 제작자로서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가 엔딩 크레딧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왕빙의 카메라 앞에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거나, 때론 흥미롭게 바라보고, 어떤 환자들은 아주 친근감있게 다가선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취침 시간인데도 불 켜진 방에서 촬영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불 좀 꺼. 그러면 그가 못볼 거 아냐'라고 말하기도 한다. 때로는 환자들이 문을 닫고 들어가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찍는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은 핸드 헬드로 찍어서 흔들리며, 그렇게 매우 정신사나운 쇼트들은 어쩌면 미친 이들을 담아내는 방법이 그것 뿐이라고 강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빙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피사체를 도구적으로 담는 것이며, 거기에 그 어떤 조화나 균형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 거칠고 조악한 화면들이 왕빙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거기에 미학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을까?


  왕빙은 2014년 Jihlava IDFF 마스터 클래스에서 이 다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 병동의 환자들이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자신은 그들이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자유, 그러니까 병동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는 자유, 예를 들어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법은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이 다큐에서 관객이 느끼기를 바라는 지점은 정신 병동의 환자들이 누리는 한계를 넘어선 어떤 자유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다큐에서 온갖 종류의 광기의 나열과 아무 희망도 없는 무기력의 극치를 보았다.


  병동의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창살 밖을 바라보거나 복도를 배회한다. 왕빙이 말한 어떤 '자유'의 형태가 있다면 유령처럼 끊임없이 배회하고 출몰할 자유일 것이다. 단, 창살로 폐쇄된 방안과 복도에 한해서. 이 다큐를 본 관객들은 자신이 목격한 그 다양한 광기와 그 비인간적인 공간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하게될 뿐이다. 왕빙이 보았던 미친 자들의 특별한 자유에 대한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대다수의 관객들은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할 것이다. 더 나아가 광인들을 가두고 격리하는 그 어떤 방식이라도 찬성하는 편에 서 있게 될지도 모른다.


  왕빙의 카메라는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지만, 거기에는 피사체에 대한 그 어떤 인간적 배려나 윤리적인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다큐를 제작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촬영 대상자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의무와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찍고 싶은 것을 찍을 자유가 그 윤리적 의무 보다 앞선다면, 그리고 그렇게 찍은 다큐가 아무리 좋은 결과물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다큐는 본질적으로 심하게 어그러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 다큐의 중국어 제목은 '瘋愛', 그 뜻은 '미친 사랑'이다. 카메라에 대한 미쳐버린 사랑으로 정말로 지켜야할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의 중요한 윤리적 자세와 관점은 놓쳐버린 것이 아닌지, 왕빙의 이 다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list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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