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el Kennedy - Vivaldi II
나이젤 케네디 (Nigel Kennedy) 연주 / 이엠아이(EMI)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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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이제까지 듣던 비발디의 음악은 아닐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이 음반을 듣고나니 놀라움 반, 실망 반이다. 물론 나이젤 케네디에게서 반듯하고 잘 정돈된 비발디 연주를 기대한 것이 나의 실수(?)라면 실수일 수도 있겠다. 


  협연자인 케네디와 베를린 필 단원들과의 호흡은 더할 나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너무 잘 맞았던 것이었을까? 전체적으로 템포가 매우 빨라서 기존의 비발디 연주에 익숙한 이라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법도 하다. 경쾌함을 넘어서 미끄러지듯 잡을 수 없는 음률들은 아쉬움을 남긴다.


  나이젤 케네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음반이 또 하나의 베스트에 들어가겠지만, 원전에 충실하고 보편적인 해석을 원하는 이들이라면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까지나 이 음반은 나이젤 케네디 표 비발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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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 1 책세상총서 20
볼프강 벨쉬 지음, 박민수 옮김 / 책세상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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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류 담론이란 것이 사실은 학자들의 경쟁적인 이기심이 빚어낸 외국이론의 수입 전시장처럼 생각되는 때가 종종 있다. 이제 근대에 막 진입하고 있다고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논쟁이 일어나던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니 더욱 그러한 확신은 굳어진다. 이젠 포스트 모더니즘의 인기가 시들한 대신, 라깡을 비롯한 프랑스 철학이 큰 유행이 되어버린 것 같다.


  벨쉬의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은 우리에게는 한물 가버린 것처럼 보이는 포스트 모더니즘 논의를 차근차근 명확하게 짚어가며 설명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해 이보다 더 잘 정리된 해설서를 찾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벨쉬의 학자적 안목은 빼어나다. 이 책에서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요한 철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서 각 분야에 나타난 포스트 모던적 현상에 대해 꼼꼼히 분석하고 있다.


  벨쉬는 무엇보다도 포스트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리오타르와 그의 저작들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어떤 면에서 리오타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입구이자 출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리오타르가 그토록 옹호하고자 했던 가치, 즉 다양성에의 열망과 그것의 실현은 벨쉬의 의도와도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포스트 모더니즘에는 다양성의 무조건적인 추종으로 인한 혼란의 야기라는 측면이 내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 확립된 보편과학과 근대성에 대한 메타 담론의 해체 필요성이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모던의 실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할 때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치는 유효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벨쉬는 자신의 책을 통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철학적 풍경을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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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의 원작자인 스티븐 킹의 소설에는 종종 글쓰기의 괴로움과 작가라는 직업의 압박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작품 《미저리》는 어떤 면에서 그러한 괴로움이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샤이닝”의 주인공 잭의 직업도 작가이다. 호텔의 겨울 관리인을 자청한 것도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잭이 관리인으로 있게 된 이 호텔은 알 수 없는 괴기가 서린 곳으로 잭과 그 가족은 거기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고통을 받게 된다. 당연히 잭의 글쓰기 계획은 무산되고, 잭이 미친 듯이 써내는 것이란 ‘일만 하고 놀지 않는 잭은 바보가 된다’라는 문장뿐이다.

 

  “샤이닝”이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주체할 수 없이 스크린 위를 범람하는 붉은 피와 도저히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족에 대한 끔찍한 살의는 분명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포의 심연을 들여다보노라면 거기엔 글쓰기와 가족이 주는 견딜 수 없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려고 고군분투하는 작가에게 가족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그 점은 작가의 마음에 고통과 증오를 불러온다.

 

  결국 잭의 글쓰기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기 위해서는 가족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용납될 수 없는 무의식적 욕망은 그런 이유로 꿈의 형태를 빌어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지각되지 않는 무의식의 소원성취 방식으로서의 꿈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왜곡되는 모든 꿈에서 소원은 무의식에서 비롯되며, 낮에는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 

 

  영화 “샤이닝”은 작가의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이 실현하고 싶어 하는 꿈을 충실히 구현해낸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글쓰기와 가족, 그 두 가지가 빚어낸 끔찍하지만, 안전한 악몽이 된 것이다. 

 

1)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인숙 역, 꿈의 해석, 열린 책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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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1-13 16:06   좋아요 0 | URL
전 이 영화 아직 못 봤는데요. 본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하더라구여. 님의 리뷰를 보니 더 보고 싶어지는데요.^^

푸른별 2005-11-13 18:49   좋아요 0 | URL
십년 전에 보고, 이번에 일 때문에 다시 보게 되었지요. 리뷰라는 것이 그렇지만 참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생각과 느낌이 읽는 이와 얼마나 소통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지요. 내가 써놓고 보니 지나치게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샤이닝에 관해서는 다른 유명한 리뷰들이 많은데 내 글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어서 이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DVD 발매가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삭제본인지 모르겠어요. 한번 보세요. 기이하고 참 독특한 작품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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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스크바 일기”는 도시에 대한 벤야민의 관점과 생각을 알 수 있는 단초들을 제공하기는 해도 무엇보다 그것이 일기임을 고려할 때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더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아샤 라시스라는 여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누구인가? 벤야민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이후 벤야민의 학문적 여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아니던가?


  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벤야민은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고, 아샤는 아이의 엄마였으며 동거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벤야민과 아샤, 아샤의 동거인 라이히, 이 세 사람이 만난다. 이쯤 되면 무슨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이 연상될 듯도 한데, 이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사상적 입장을 공격하며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시쳇말로 ‘쿨’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아니면 그 시대 사람들의 교양이란 덕목이 그토록 내밀한 감정들을 표현하기 보다는 응시하고 성찰하게 만든 것일까? 솔직히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들의 관계는 그리 잘 이해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일기에는 아샤를 비롯해 모스크바에서 만난 다양한 문화 예술인에 대한 단상,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한 관찰, 그곳에서의 예술적 체험도 기록되어있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은 부록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기는 벤야민이 아샤 라시스라는 여인을 통해서 본 모스크바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두 사람이 그곳에서 함께 한 순간에 대한 정밀한 기록인 것이다.


  누군가를 통해서만 어떤 장소, 도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벤야민에게 아샤와 모스크바라는 도시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으리라. 번역에 있어서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더러 발견되지만, 이십세기의 뛰어난 문예 이론가였던 벤야민의 인간적 면모를 궁금해하는 이들에게는 즐거운 책읽기의 경험을 제공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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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는 희곡 자체도 결코 쉽게 읽히는 텍스트가 아니다. 읽는 내내 독자를 의문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다가 갑작스런 결말에 이르는데, 이 결말 또한 모호하게 처리됨으로써 과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텍스트 자체에 내재된 그러한 요인들은 연극으로 상연되었을 때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과연 극의 중요한 상징인 “말(들)”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있다. 희곡을 읽으면서 연상된 “말(들)-6명의 배우가 말머리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의 이미지는 사실 기괴하고 당혹스러운 것이다. 거기에는 선정적인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너제트라는 말에 대한 알란의 집착이 그 증거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김광보가 연출한 에쿠우스의 “말(들)”은 선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 기대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그 역을 맡은 배우들은 온몸을 검은 망사로 감싸고 꽉 끼는 가죽 팬티를 입고 나오기 때문이다.

 

  과연 김광보의 관점은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는 이전부터 동성애적 코드를 깔은 얄팍한 연극적 속임수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말에 매혹당한 알란, 다이사트의 불행한 결혼 생활, 알란과 질의 성관계 실패가 암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동성애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김광보의 연출은 상당 부분 동성애 코드를 충실히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관객은 알란의 여자친구인 질 보다 “말”역의 배우들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희곡 텍스트에서 공연 텍스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에쿠우스를 Frame화하는 요소들로 “말”과 함께 “각형의 무대장치”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피터 셰퍼가 특별히 언급한 것으로 극의 성격 전체를 규정짓는 상징적인 틀이 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도 사각의 링이 아닐까 싶다. 그곳은 결투가 일어나는 곳이고 육체들 간의 부딪힘은 때로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상처마저 남긴다. 대부분 다이사트 박사의 상담실로 연출되는 그 공간에서 알란은 박사와 격렬한 심리적인 대면을 통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런가하면 이 무대는 알란이 말들과 함께 질주하는 장면에서는 드넓은 초원을 연상케 한다. 특히 제한된 공간성을 회전 장치를 통해 뛰어넘게 만드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김광보의 연출은 그런 면에서는 매우 원작에 충실한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사용된 합창은 과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까? 피터 셰퍼의 연출에 관한 노트를 읽어보면 그것은 분명히 인식 가능한 노래나 합창의 형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김광보의 에쿠우스에는 곡과 가사가 있는 노래가 나온다. 강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격렬한 움직임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극 전체의 하이라이트로 부각되며, 이것을 빼면 이 연극에서 달리 기억에 남을만한 부분은 없을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피터 셰퍼는 합창이 “새로운 신, 에쿠우스의 출현을 예고하는”것이 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김광보가 보여준 합창은 뮤지컬의 그것처럼 관객의 시청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한다. 매우 오락적인 측면에 치중한 것처럼 보이는 이 부분은 본질적인 메시지 전달에는 실패했다는 인상을 준다. 열정과 자유가 표현되어야할 이 장면에서 말들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양식화되었으며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얽매이지 않은 원시성이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한 느낌인 것이다.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는 세상에 나온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주요한 공연 텍스트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 인기는 텍스트에 내재된 혼란스러움과 기괴스러움이 가져온 알 수 없는 열광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객은 공연 내내 매혹당하지만 그 느낌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에 실패하며 공연장을 떠난다. 김광보가 연출한 에쿠우스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그러한 느낌을 지닌 채 자리를 뜨게 만든다.

 

  동성애와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는 보기 좋게 포장되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알맹이가 없다. 알란의 정신병적 열정도, 다이사트 박사의 무기력한 중년의 심리도, 현대 사회의 억압적 지배 이데올로기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원작에 충실하다는 것이 독자적인 연출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닐진대, 연출자에게 보다 과감하고 내실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참고문헌 *

Barry B. Witham, Anger in Equus, Modern Drama 22 No.1 March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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