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溫氣)


내가 겨울이면 몸이 아파 골골거리는 이유를 알아냈어요
그게 난방비 아끼려고 보일러를 너무 안 틀고 지내서 그런
거더라구요 중년의 여자는 커뮤니티 사이트에다 그렇게 썼다
집안이 온기로 훈훈해지니까, 뭉쳐있었던 몸이 풀리면서
좀 살만하다는 거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작년에 개별난방
전환 공사를 하면서 세대마다 보일러가 설치되었다 올겨울은
그 보일러로 난방을 시작하는 첫해였다 보일러가 돌아가면
연통에서 흰색의 연기가 폴폴 난다 나는 가끔 마루의 창가에 서서
앞 동의 보일러 연통에서 몇 집이나 연기가 나는지 세어보곤 했다
좀 추운 날이라도 해도 한낮에 보일러를 트는 집이 거의 없었다
120세대에서 기껏해서 두세 집이 전부였다 냉기를 견디는 사람들
겨울에 골골거리지 않기 위해 이제는 보일러를 맘껏 튼다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보일러를 트는 일이 너무 무서워서
겹겹의 옷을 입고 덜덜 떨고 있다는 젊은 남자의 글도 있었다
돈 생각하니 보일러를 틀지 못하겠어요, 이런 내가 나도 싫습니다
돈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사람의 행동거지며 생활 습관까지
모든 것을 철저히 지배한다 나는 보일러의 실내 설정 온도를 18도로
맞추어 두는 것을 포기했다 외풍이 심한 이 집에서 그 온도로 지내는
건 그야말로 골병이 드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찾아낸 최적의
온도는 22도이다 23도는 좀 답답하게 더운 느낌이 들고, 21도는
견딜만하지만 따뜻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22도의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가스 요금 고지서는 다음달이 되어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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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는 그만 써야지


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일기장에 올해 있었던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대해 쓴다 어제 그걸 쓰는데, 좋은 일은 겨우 2개에
불과했다 나는 시를 써서 좋았다, 라고 써놓았는데, 써놓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시를 써서 좋았는가? 그냥 나 혼자서
쓰고는 좋았다, 고 할 것이면 별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열심히, 써가지고는 어디 공모전에다 내려고 하니까
문제였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나온 시집들을 보다가 심한
이질감을 느꼈다 도무지 알아먹지 못할 정서와 시어들의
잔치판이었다 그랬다, 시에도 유행이 있는 것이다 무엇엔들
유행이 없겠는가 무슨 도급 공사 담합하듯이 기성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내세운 기준에 맞추어서 시를 써내야 등단을
하든가 할 수 있는 거였다 그 기준이라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철저한 자기들만의 패거리 리그에 들어올 멤버 찾는 것 같았다
웃기게도 거기에는 시인들의 첨삭 과외와 신춘문예 당선작
분석 강의까지 있었다 참으로 역겹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단순히 첨삭을 넘어서 거의 대필 수준의 시로 등단한 이도
있었다 등단을 하고, 자기 시를 쓸 지면을 찾고, 시 창작
강의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꾸역꾸역 시집을 내고
하는 시인의 삶이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물론 그 시작점에는 등단, 이라는 바늘구멍이 존재했고, 그걸
뚫지 않고는 일반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담벼락에다 끄적거리는
낙서 수준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1년 써보고, 이리저리 응모해서
번번이 떨어져 봤으면 되었다, 는 생각이 든다 무슨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올 한 해 동안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제는 소설 쓰기로 방향을 바꾸어야겠다, 고 마음을 먹는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겠지만, 소설이 공모나 투고의 범주에서
시보다는 더 큰 개성과 자유가 허용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든 글을 쓸 시간을 쥐어짜 내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어렵다 내가 글을 쓸 운명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써낸 글이
언젠가 독자를 만날 수 있다면, 결국 글은 써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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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층의 소녀


안녕하세요, 나를 보고 인사하는 여학생이 있다
같은 라인 6층에 사는 여학생이다 내 기억으로는
그 집에는 젊은 부부가 살았고, 자녀가 셋인지 넷인지
되었던 것 같다 부부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신자였고,
꽤나 금슬이 좋아보였다 아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인사성이
밝았다 오늘 나에게 인사하는 여학생이 그 집의 막내인지
아니면 그 막내의 언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아무튼 요즘 같은 세상에
저렇게 예의 바른 아이가 있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 신기하고
고맙고 그랬다 응, 안녕, 그렇게 대답하고 가려는데, 오늘이
12월 30일이니까 뭔가 새해 덕담을 해주어야하지 않을까,
그 생각을 했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까? 이미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버렸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건강하게 잘 지내렴, 공부는 너무 열심히 안해도 된다
집에 와서도 나는 6층의 그 아이에게 해줄 말을 혼자서
생각해 보고 있었다 공부 이야기는 괜한 말일까?
저 나이에 어른들에게 맨날 듣는 소리가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일 텐데, 나는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어른들 머릿속에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업을 얻고, 돈 많이 버는 것, 그런 사고 회로가 장착이
되어있다 돈을 많이 벌면 좋기는 하겠지 모두들 돈에 목을
매고 살고 있으니까 길 가다 넘어진 외상의 후유증으로
오늘은 안과에 다녀왔다 병원에는 환자들이 무척 많았다
3년 전 개업할 때는 3명으로 시작한 안과 병원은 이제
의사가 5명이다 이 병원은 그야말로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돈을 너무나도 잘 벌기 때문에 다들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세상은 괜찮은 걸까?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돈으로만
정해지는 세상, 나는 거기에 반박할 그 어떤 대답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도 공부를 좀 잘하지 못하는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 돈 말고 다른 가치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 그런 사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웃의 어른을 보고 깍듯이 인사를 챙기는 예의 바르고
착한 그 6층의 소녀가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면 좋겠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나무를 흔들어대는 흐린 날, 창밖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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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어제는 치과에 다녀왔다 입술의 봉합사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말수가 적고 신중한 치과 의사 선생이
상처 부위를 찬찬히 잘 살펴보았다 실밥 뽑는 것도
따끔하게 아프다 흉터가 생길 것 같냐고 물으니,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1주일 뒤에 다시 보기로 하고
치과를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누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젊은 아가씨가 탔다 작업용 앞치마를 입고
대걸레를 들고 있었다 1층인가 보네, 나는 얼른 내렸다
그런데 좀 낯설다 2층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은 열린 상태였다
나는 그냥 타려다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 예전에 어떤 여자가 안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문에 끼일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더니, 열림 버튼 눌렀어요, 아가씨가 말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아가씨에게 그 여자 이야기를 했다
매너 없는 사람이네요, 아가씨가 명쾌한 말투로 말했다
맞아, 매너가 없어, 아가씨는 매너 있는 사람이네요, 나는
웃으면서 그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이십 대 초반의
그 아가씨에게서는 젊음과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마침내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1층을 가리켰다 나는 아가씨에게
먼저 내리라고 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아가씨가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아가씨는 건물의 왼쪽 방향으로
금세 사라졌다 아마도 그녀는 이 건물 어느 가게의
종업원일 터였다 나는 아가씨가 사라진 모퉁이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내 손에 있다가 어느새 사라진
젊음의 환영(幻影) 같았다 그 젊음이 나에게 있었을 때,
나는 그렇게 많이 불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사라진 세상의 언어처럼, 무겁게
닫힌 입가의 주름으로 남았을 뿐이다 나는 다시 한번
아가씨가 사라진 그 모통이를 바라보았다 겨울 햇살이
차디찬 바람에 부서지며 조용히 우는 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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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역성(非可逆性)


불행 중 다행이야 얼굴뼈에 금이 가지도 않았고
이가 부러진 것도 아니잖아 동생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렇게 말하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어째 그게 쉽지가 않다 찢어져서
꿰맨 입술에는 봉합사가 너덜거리고 있고, 얼굴에는
듀오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철사로 이어 붙여놓은
치아는 계속 욱신거린다 그냥 가만히 정류장에서
버스나 기다릴 것이지, 뭐하러 좀 걸어간다고 길바닥에
넘어져서는 이렇게 고생을 하나, 그 생각부터 해서
땅바닥에 찰떡같이 들러붙는 운동화 때문이다, 하는 생각,
아니다, 거지 같은 SUV 차량을 피하려다 넘어졌으니
그걸 운전한 놈이 웬수다, 까지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돌아가고 싶다, 그 재수 없는 사고 이전의 시간으로,
그렇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군, 인생의 많은 것들은 결코 되돌릴 수가 없어
흰머리를 아무리 뽑아도 검은 머리는 나지 않고,
눈꺼풀은 시간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하지 어쩔 수 없는 것 투성이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로 하자 아스팔트 바닥에
되게 넘어지고도 얼굴이 부서지지 않은 것을,
아직까지 앞니가 붙어있는 것을, 마침 큰 병원이
가까이 있어서 응급실에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을,
젠장,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냥 혼자
잘근잘근 화를 씹게 된다 인생의 그 빌어먹을
비가역성(非可逆性) 따위, 그렇게 회한과 분노와 안도가
뒤엉킨 침울한 성탄 전야에 캐럴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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