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운동회


아침 7시 반, 운동장은 고요해
흙바닥에 선명한 흰색 분필 가루를
짓이기며 천천히 걸었어
달리기에서 1등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참 잘했어요, 애새끼와 계집아이가
사이좋게 웃고 있는 보라색 도장이
팔뚝에 찍히면 상품을 받았는데
공책와 연필 따위, 그게 그렇게 부럽더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인생이란 게 더럽게
불공평하다는 걸 어쩔 수 없이 깨달아

청군 백군 따위 병정 놀음
그딴 걸 왜 애들한테 시켰는지
줄다리기에서 지고 나면 슬퍼져
엄마가 싸준 김밥은 약간 신맛이 났어
차라리 비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야만의 시대를 지나는 것
불청객의 기억으로 가을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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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드라마(Docudrama)


이 영화는 자막이 없습니다
호주에서 만든 3시간 짜리 다큐드라마(docudrama)
다큐(docu), 라는 말이 들어갔으니까 진짜일 것 같지만
드라마(drama), 라는 말이 따라붙었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가짜, 사람들이 인생의 3분의 1은
거짓말을 하고 사는 것과 같아요

영국식 영어는 정말이지 알아먹기 힘들어요
좀 듣다 보면 적응은 되는데, 무슨 말인지 한참
있다가 알게 되죠 제일 좋은 건 말이죠, 미국식
영어에요 그게 진짜 영어죠 말에 기름이 줄줄
흐르거든요 듣기가 좋아요 그게 전부에요
아무튼, 대학 시절에 어학연수를 갔다 왔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후회가 들죠 그때 어학 연수
광풍이 불어서, 다들 빚을 내서 미국과 캐나다로
떠났어요 친구 J는 강남에 살았는데, 캐나다로 떠났죠
밴쿠버에서 나한테 엽서를 보냈어요 그 엽서가
오래된 책 상자 어딘가에 있기는 있을 건데,
J가 밴쿠버의 추위에 진절머리를 내는 동안
난 그저 도서관에서 책을 열심히 빌려다 읽었고
졸업할 무렵에는 2천 권의 대출 권수를 기록했죠

두 남자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데, 역시나
알아듣는 건 힘들군요 이게 다 어학연수를 가지
못해서 그래요 언제나 돈이 문제에요 아무튼
알아들으려고 계속 노력은 해보죠 중년의 남자는
골칫덩이 딸 때문에 괴로운데, 마누라와도 헤어진 것
같아요 그 옆의 젊은 남자는 어긋나버린 과거의 연애와
복잡한 가족사를 이야기하죠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거짓말인지는 나도 몰라요 감독만이 알겠죠 그가 각본을
썼으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글의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잘 살펴봐야 해요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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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늘 미어터지는 신경과 대기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도망 나와서
왼쪽의 정신의학과에서
우울증 환자처럼 앉아 있다

나의 왼쪽은 1년째 제멋대로 굴고
비열한 웃음을 실룩거리며 말한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어?
이건 수수께끼야 네가 풀어야 할

왼쪽은 진통제와 타협하지 않는다
왼쪽은 더러운 성질머리를 가졌다
왼쪽의 눈물은 마비되었고
왼쪽은 슬플 때 종종 침을 흘린다

자, 3개월분의 약을 처방해 드리죠
의사는 서걱거리는 소금을
조그마한 입으로 쏟아내며
5분 만에 나를 진료실 밖으로
그렇게 스트라이크!

빌어먹을, 왼쪽이
푸른 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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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를 걷는데
얼굴에 눅진한 어떤 기운이 느껴진다
가느다란 실 같은 아, 유령거미가
그 조그만 몸뚱이로 그 넓은 공간을
횡단하면서 이리저리 너는 참,
열심히도 사는구나

결국 사람을 먹지도 못할 거면서
보잘것없는 입으로 끊임없이 실을 토해내고
결국 눈물을 써내지도 못할 거면서
어떻게든 글씨를 세상에 욱여넣으며

살아야지, 1, 2, 3, 4, 숫자대로 점을 이어서
그렇게 닿을 수 있는, 내가 알 수 없는,
아주 작고 또 거대한 사물들에게 살아있다고
슬픔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하나의 실로
이어져 스러지는 우주의 가스 구름으로
흐를 거라고 밤새, 유령의 집을 지을
거미에게 자그맣게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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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시(散文詩)


산문시를 혐오한다 아주 매우 많이
요즘의 시는 거의가 다 산문시인데
나는 그 시들을 볼 때마다 플라나리아(planaria)가
떠오른다 그래, 중학교 생물 시간에 배운 그 플라나리아
몸뚱이를 칼로 잘라내어도 작은 살점에서 머리가 생기고
눈이 생기고 그렇게 작은 플라나리아가 생겨버리는,
수학의 정석(定石)과 성문 기본 영어 같은 어디서 굴러먹던
시론(
) 책을 달달 외워서는 말이지, 그걸 가지고 열심히 연습하고
기출 문제 연구하듯 그렇게 대가리 터지게 시를 써
말하자면 이런 거,

구관조를 씻기거나
고양이가 나를 먹어버렸다거나
쓰레기가 당신을 줍는다거나

리얼리즘의 시대는 진작에 가버렸다구
이제 일상을 비틀어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야지
언제까지 현실 묘사에 목을 매고 살 것이냔 말이지
자신이 창조주가 되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던가

이딴 소리를 지껄이면서, 플라나리아가 득시글거리는
산문시를 기계처럼 찍어내면서, 야, 그래서 네가 쓰는 시가
이 세계의 진보에 발가락의 티눈만큼이라도 기여를 했느냐고
너의 구멍 난 심장에 손가락이나 넣어보고 말을 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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