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慣性)


아파트의 경비는 아침 6시에
화단의 흙을 고른다
기다란 삼각 괭이로 흙바닥을
헤집고 다시 다지고
9월 늦더위, 땀을 훔치며 열심히
저 경비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들판의 논과 밭이 펼쳐져 있을지도

푸석거리는 머리를
나일론 리본 모자로 감춘
늙은 여자는 아침 산책을 나선다
유모차에는 작은 푸들 한 마리
어찌나 앙칼지게 짖는지
여자는 강아지가 어디가 불편한지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성질 더러운 애새끼 달래듯
그런 자식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

청소부 아줌마는 1년 내내
빨강색 티셔츠만 입고 다닌다
왜 하필 빨강색일까?
기운이 나는 색이라서?
때가 덜 타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으므로
그냥 행운의 색, 이라고 생각하자

유통기한이 임박한 과일 맛 젤리를 질겅거리며
과일 맛에는 과일이 없어
사과 맛 포도 맛 딸기 맛
다 거짓부렁이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속아주는 기분
싸게 판다면 또 사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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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기(習作期)


왜 날로 먹으려 드는 거야?
너, 시를 잘 쓰고 싶다면서
그럼 돈 좀 들여서 시 창작 강의라도 들어야지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시를 쓰는 것도 기술이 있어
그걸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쓴다는 거야 말하자면
시인들은 언어를 조련하는 조련사인 셈이지 그런데
넌, 그걸 무시하잖아 시를 그냥 계속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거지? 와, 어떻게 그런 무식한
생각을 하면서 시를 쓰고 있어? 그렇게 백날 써봐라
문단에 네가 들어올 수 있을 거 같아? 여긴 그러니까
프로페셔널의 무대인데, 너 같은 초짜를 끼워주겠냔 말이지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네가 말재주가 있다면 영업을 뛰는 거야 문학판 인맥을 쌓는 거지
어떤 면에서 그것도 재능이지 별거 아닌 너의 습작 쪼가리 들고서
아양도 떨고 읍소도 하면서 그렇게 친분을 쌓아가다 보면
가늘고 기다란 연줄이 될 수도 있지 아는 사람 더 잘 봐주고 그런 거
그걸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좀 나이브하게 굴지 마

말재주도 없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게 뭘까?
아, 얼굴이 좀 되면 그걸로 어떻게 밀어붙일 수도 있겠군
시가 이미지라는 말은 이제 웃기는 소리가 되어버렸어
시인이 이미지여야 해 팔아먹을 이미지 말이지
매일 인스타로 독자와 소통하고 번지르르한 일상을
인터넷 땔감으로 집어처넣는 우리 시대의 시인,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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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詩人)을 찾는 6개의 목소리


1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언제든 연기(演技)할 준비는 되어있어요
아줌마, 아저씨, 소년, 소녀, 늙은이, 
그리고 나무와 돌멩이까지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의 연출 지시는 너무 많습니다

아름다움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슬퍼도 울면 안된다는 거예요
기뻐도 살짝 웃는 둥 마는 둥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하지 못하는
불쌍한 서자(庶子)처럼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
아, 이런 비유도 쓰면 안된다는군요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2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나에게 연기 학원(演技學院) 다닌 적이 있냐고 물었지?
연기를 하려면 연기 학원에 다녀야 해?
청소부를 연기하려면 직접 청소부 일을 해봐야지
청소부 흉내를 낼 게 아니라
당신의 머릿속은 온통 비어있는 단어로 가득해
당신은 진짜 삶을 살아낸 적이 없어
공중 부양(空中浮揚)의 삶을 살고 있지

제발, 땅으로 좀 내려와 봐

3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꽈배기의 달인
나는 똑바로 서 있고 싶은데
당신은 이렇게 말하는 거야
비틀고, 꼬고, 계속 움직여요!
그런 나를 보는 관객은
눈이 핑핑 돌아서 쓰러지고 말아
뭐, 특수 제작 안경을 쓴 소수의 관객이
나의 미쳐버린 춤을 보고
손뼉을 쳐주기는 하더군

그냥, 좀 자연스러운 춤을 추면 안되는 거야?
그나저나 당신, 춤 춰 본 적은 있어?

4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니죠?
안색이 창백해 보여요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멋진 옷도 입고
아, 돈이 없구나
그래서 나한테 부자 흉내를 내라는 건가?
말해봐요, 있어 보이는 부자의 질감(質感)이 뭔지
명품의 상표 딱지를 슬쩍 감추고
젠체하듯 걸으면 됩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 어설픈 부자 연기를 속아줄까요?

5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당신의 문제는 말이야
너무 얼굴을 따진다는 거
달걀처럼 갸르스름하고
코는 자연스럽게 오똑하고
눈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피부는 희고 매끄러워야
뭐라고요? 내가 촌스럽다고요?
점을 빼고, 쌍꺼풀 수술을 하라고요?

어이, 이봐요, 내 얼굴을
빼고, 자르고, 덧붙이고, 다듬고
이게 전문가인 당신의 기술이야?

6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나는 지쳤다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언제까지 당신의 그 말도 안 되는
연출 지시를 들어야 하지?
당신은 내 연기가 형편없다고 했지
그딴 연기를 하려면 집에나 가라고
그래, 집에 갈 거야 그러려면
당신의 말 한마디가 필요해

Ready,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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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詩集)


1월의 어느 날이었다
길을 걷는데 분홍색의 보도블록이 말했다

시를 써보렴

아픈 발을 질질 끌고서
너의 목소리를 따라
너는 언제나 갑(甲)이었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낼수록
나는 괴롭고 조바심이 났다

시를 쓰는 것이 언제나 행복한
을(乙)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가난한 콜센터 노동자인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시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가끔, 네가 싫어져
잔가시가 삐죽삐죽 나 있는
볼품없는 막대기로
너를 때린 적이 있다 그러면
너는 그 보드라운 주먹으로
나를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너는 친절했지만 사소하게 무례했다 
안녕, 이라고 말을 걸면 침묵했고
잘 가, 라고 말하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너에게 어떤 이별의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50편의 시를 가지고 강을 건넌다
누구도 얼른 떠나라고 등을 떠밀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지 않았다

시인 것과 시가 아닌 것
시가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
시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그렇게 너는 한 권의 시집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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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기분


수옥아, 너 서른다섯이라고 했지
이제 늙은 기분이 든다고 그랬지
네가 말하는 걸 들으니 웃음이 나와
그래, 웃음이 미치도록 터져 나와
겨우 서른다섯 처먹고 뭐, 늙은 기분?

조금 늘어진 뱃살 때문에
옷장에 맞는 옷이 없다며 징징거리는 게
늙은 기분이냐?
머리털 좀 빠지고 팔자주름이 생겼다고
늙은 기분이야?

야, 넌 뭐 이제 겨우 서른다섯 처먹고
그렇게 얼간이처럼 사냐?

얘야, 늙는다는 건 말이다
후우, 한숨 좀 쉬자
그러니까 말이야,
늙는다는 건 아주 기분 더러운 일이지
암, 그래, 그렇구 말구
적어도 늙은 기분을 느끼려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저녁에 졸음을 주체하지 못해
소파에 몸을 구겨 넣고
바닥을 박박 긁는 저질 체력으로
여름을 나면서 땀을 미친듯이 흘릴 때
그게 눈물인 줄 착각하는 거야

팔아먹을 게 없어서
너의 그 병신같은 서른다섯 늙음을
팔아먹고 다니니?
좀 창피한 줄 알아

좌절은 그만
이 늙은 언니가 진심으로 충고할게
정신의학과에 가서
항우울제 처방을 받아
그럼 너의 늙은 기분은
쥐죽은듯이 사라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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