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팔도강산> 연작: 개발독재 시대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



팔도강산(Paldogangsan, 1967)

속 팔도강산(The Land of Korea, 1968)

내일의 팔도강산(Tomorrow's Scenery of Korea, 1971)


1.


  유선방송의 'KTV 국민방송'은 국정홍보 채널입니다. 그 채널의 대부분을 채우는 프로그램은 '우리 정부는 아주 잘 해내고 있다'를 선전하고 있죠. 그렇다고 정권 홍보물만 만들어 방영하는 건 아닙니다. 흘러간 옛날 드라마나 한국 영화도 틀어줍니다. 얼마 전에 KTV에서 한국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를 방영하더군요. 영화 '팔도강산' 연작은 박정희 정권의 국정 홍보 영화로 시작되었는데, 의외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시리즈물로 나오게 되었죠. 이후에 '팔도'라는 제목이 들어간 한국 영화 제작 붐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요. 자, 그렇다면 그 원조 격인 영화 '팔도강산' 초창기 3부작에 어떤 재미가 있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팔도강산' 3부작의 주인공은 김희갑, 황정순 부부와 그 자녀들입니다. 노부부의 자식들은 모두 결혼해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요. 부부는 자식들이 사는 모습을 살피려 여행을 떠납니다. 1편에 해당하는 1967년의 '팔도강산'은 부부의 국내 유람 편을 담고 있구요. 부부의 자식들은 각자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모두 한국의 산업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요. 말하자면 그들은 경제발전에 일조하는 충실한 산업 역군인 셈입니다. 그 모습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도 맞물려 있죠. 이 영화의 제작사가 '국립영화제작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팔도강산(1967)'은 나름 유쾌한 프로파간다 영화입니다. 그것이 그 이듬해에 제작된 '속 팔도강산(The Land of Korea, 1968)'에 이르러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나타납니다. '속 팔도강산'은 부제가 '세계를 간다'입니다. 김희갑은 서독에 있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길에 해외 유람을 하게 되죠. 그의 자녀들이 해외 각지에 살고 있거든요. 김희갑이 미국에 들렀을 때, 그는 '한국 가발'의 우수성을 알게 됩니다. '가발'은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한 수출 품목 가운데 하나였으니까요. 자랑할 것이 얼마나 없으면 '가발'을 홍보했을까 싶어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 영화가 제작될 당시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아직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한국은 경공업 제품 수출에 머물러 있을 때였으니까요. 뭔가 '뽀대나는' 수출 품목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걸 보여줬겠죠.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보여줄 건 '한국 사람'과 '개척 정신'입니다. 미국을 떠난 김희갑은 브라질 이민을 떠난 사위 박노식을 만나러 가요. 그는 사위가 대농장을 일구는 농장주가 되었음을 알고 뿌듯해하죠.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어요. 경험 부족으로 농장 개척에 실패한 사위는 주정뱅이가 되어버렸거든요. 그걸 알게 된 손아랫동서 신영균은 자신의 사업자금을 털어서 박노식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면 된다'의 정신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개발도상국 한국의 국민에게 필요한 도전 정신이 아닌가요?

  김희갑은 해외 여행길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도 들릅니다. 구한말, 망국의 비탄을 끌어안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이준(李儁, 1859-1907) 열사의 기념비를 참배하기 위해서이죠. 당신께서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고국이 이렇게 발전했습니다, 를 고하는 후손의 묵념이 이어집니다. 그쯤 되면 후대의 한국 관객 또한 비감함에 젖을 수밖에 없겠지요. 서독에서 김희갑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태권도 사범으로 활약하고 있는 일가족을 만나고요. 중간에 프랑스 파리도 경유합니다. 이 영화의 해외 촬영분을 살펴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어요. 아무리 국책 영화라고 해도 그 엄청난 제작비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싶죠. 그건 그만큼 당시의 정권이 영화를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프로파간다' 영화가 오락적인 면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속 팔도강산(1968)'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이미자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내일의 팔도강산(Tomorrow's Scenery of Korea, 1971)'에서는 패티김을 비롯해 김추자와 나훈아가 나와서 노래를 불러요. 특히 패티김이 '서울의 찬가'를 부르는 모습은 서울시 홍보 영상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는 프로파간다의 틀에 코미디 장르와 뮤지컬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고 할 수 있어요.  

  '속 팔도강산'에서 해외 유람은 실컷 했으니, 3편에서는 한국으로 돌아와야죠. '내일의 팔도강산(1971)'에서 김희갑, 황정순 부부의 국내 유람은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죠. 사위 김진규는 시멘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의 부하직원으로 나오는 구봉서가 시멘트 공장의 운영 현황을 청산유수로 읊습니다. 국가 기간 산업에 있어서 원자재인 시멘트의 중요성은 달리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이 영화에는 중공업 홍보만 나오지는 않아요. 작은 사위 신영균은 수산업에 종사하면서 번듯한 사업체를 일구어 냅니다.

  물론 약간의 실패도 필요합니다. 맏사위 허장강이 무리하게 부동산 투자를 했다가 망하거든요.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아직은 시작되지 않았던 때였던가 봅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웃음이 터지기도 했어요. 아무튼 허장강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원래 사업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죠. '내일의 팔도강산'은 수출 주도 산업과 함께 내수 진작의 토대를 놓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開發獨裁)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김희갑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를 줄줄 읊어대는 모습은 이 프로파간다 영화의 씁쓸한 일면이기도 해요.     



2.   
     
  '내일의 팔도강산(1971)'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북한 영화 '꽃파는 처녀(The Flower Girl, 1972)'는 그런 면에서 조금은 다른 결의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동명의 혁명가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김정일의 주도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죠. 이 영화의 엄청난 성공으로 북한 당국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선전 효과를 실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꽃파는 처녀'는 북한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 수출되어서 크게 흥행했으니까요. 공산국가인 중국에서의 흥행 대성공은 물론, 당시 동유럽 40개국에서 거둔 흥행 성과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영화 '꽃파는 처녀'는 시대적 배경이 일제 강점기입니다. 주인공 꽃분이의 집안은 친일파 지주의 강탈에 풍비박산이 나버립니다. 악독한 지주 때문에 꽃분이의 오빠는 감옥에 갇히고, 꽃분이의 어린 여동생은 눈이 멀죠. 그리고 어머니마저 고된 종살이 끝에 숨을 거두지요. 꽃분이와 그 가족이 겪는 수난과 고통의 서사는 관객의 정서에 강하게 호소합니다. 이 영화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영화의 끝 무렵에 이르러서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볼셰비키' 소책자를 나누어 읽으면서,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에의 길로 들어서게 되지요.

  '꽃파는 처녀'를 보고 있노라면, 프로파간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이 아니라 '정서'에의 호소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 분야 원조 맛집 주인으로는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1902-2003)이 있지요. 네, 히틀러 정권의 프로파간다 영화를 찍었던 그 여성 감독 말입니다.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 1935)'와 '올림피아(Olympia, 1938)'에서 리펜슈탈이 보여준 미학적 성취가 어떻게 나치 파시즘 정권을 홍보했는지 떠올려 보세요. 관객의 눈과 마음을 움직이고, 급기야 홀리게 만드는 것. 프로파간다 영화의 심연에는 그렇게 인간 심리에 대한 기본적 원리가 깔려있습니다.

  다시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로 돌아갑니다. '팔도강산' 연작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아우르며 박정희 정권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 영화들이 보여주는 정권 홍보는 낯간지러울 정도로 뻔하고 밋밋하기 짝이 없어요. 그럼에도 이 영화 시리즈가 당시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전쟁의 폐허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도약하는 한국 국민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흰쌀밥과 고깃굿' 보다도 '자신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는 희망 말입니다. KTV에서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가 방영된 시각은 늦은 새벽이었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나는 그 격동의 시대를 묵묵히 살아온 나의 부모 세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어요. 잘 사는 나라, 에 대한 꿈 말입니다. 영화 '팔도강산' 연작은 그 희망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구현해 냅니다.     


*사진 출처: kmdb.or.kr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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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성혜의 나라(2020)'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9살, 아직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성혜의 삶은 무척 고달픕니다. 신문 배달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죠. 성혜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합니다. 얼마 안 되는 수입에서 부모님께 용돈도 보내드리는 착한 딸이 성혜입니다. 성혜에게는 오래 사귄 남자 친구 승환도 있습니다. 승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죠. 남자 친구가 좀 의지할만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승환이 가난한 부모 탓이나 하는 말을 들으면 좀 철딱서니가 없어요. 자, 어떤가요? 이 두 연인의 앞날이 그려지나요? 정형석 감독의 '성혜의 나라(The Land of Seonghye, 2020)'는 소위 가진 것 없는 흙수저 MZ세대의 우울한 초상을 보여줍니다.

  흑백 화면으로 펼쳐지는 성혜의 일상은 숨돌릴 틈도 없이 팍팍합니다. 신문 배달을 하러 나가서는, 원치 않는 신문을 넣었다고 주민의 항의를 받습니다. 신문 보급소에서 준 스쿠터는 고장 나기 일쑤죠. 편의점에서는 어떤가요? 매번 라면 먹고 그릇을 치우지도 않고 나가는 고등학생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 성혜의 끼니는 삼각김밥입니다. 편의점에서 폐기해야 하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죠. 성혜는 남자친구와 모텔에 가서도, 무료로 제공되는 세면도구를 알뜰하게 챙겨서 남자친구에게 줍니다. 그런 성혜에게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가끔 지나치는 애견 가게의 진열장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보는 것입니다. 성혜는 휴대전화로 강아지가 노는 것을 찍습니다.

  성혜의 삶이 이렇게 고달파진 건 과거의 그 사건에서부터였습니다. 성혜는 틈틈이 입사 원서를 넣으며 취직하려고 애를 쓰죠. 그런데 전의 직장에서 인턴을 하다 그만 둔 이력이 발목을 붙잡습니다. 면접관은 성혜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죠. 성혜는 인턴 때 회식 자리에서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그 일을 고발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가해자가 처벌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일 이후로 성혜의 삶은 말 그대로 꼬여버립니다. 취직은 쉽지 않고, 힘겨운 서울살이에다, 부모님의 어려운 처지도 모른 척할 수 없죠.

  대학은 나왔지만,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삶.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옵니다. 성혜의 친구는 빈곤에 시달리다 스스로 삶을 마감합니다. 한국 청년 세대의 높은 자살률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관객은 성혜 친구의 죽음에서, 그것이 성혜가 겨우 버텨내고 있는 이 삶의 어그러진 결말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죠. 그런 와중에 성혜가 살고 있는 월세방의 집주인은 보증금을 올리겠다고 말합니다. 집값이 높은 서울에서 성혜가 구할 수 있는 괜찮은 단칸방이 있을까요?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이런 성혜의 처지를 두고 하는 말 같아요.

  성혜가 느끼는 삶에 대한 막막함은 '미래가 없다'는 침울한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성혜는 승환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승환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고 해도, 어려운 집안 형편의 승환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성혜는 승환과 결혼해서 낳을 아이의 미래를 생각했을 거예요. 그 아이에게 자신보다 못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겠죠. 현재 우리나라의 저조한 출산율은 성혜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젊은 세대가 많기 때문입니다.

  참 우울한 영화입니다. 정형석 감독은 젊은 여성 성혜의 삶을 통해 한국 청년 세대가 직면한 어려움을 다큐처럼 담아냅니다. 출구가 없어요, 성혜에게는. 꽉 막혀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이런 성혜에게 갑자기 5억이 생깁니다. 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성혜라면 그 5억을 가지고 무얼 할 생각인가요? 5억, 크다면 큰돈인데, 어찌 보면 좀 애매한 액수 같기도 하고요. 서울에서 괜찮은 월세방 보증금으로 좀 쓰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 넣어둘까요? 아니면 그동안 못 해봤던 여행도 하고, 사고 싶은 걸 맘껏 사볼까요? 그런데 정기적인 소득이 없다면, 그 돈은 언젠가 바닥이 날 게 뻔하잖아요. 성혜도 고민합니다.   

  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나는 내가 감독이라면 성혜에게 어떤 삶을 선물해 주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쎄요, 잘 떠오르지 않더군요. '성혜의 나라'에서 성혜는 5억을 신탁 연금으로 넣고, 매달 140만 원씩 받기로 결정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삶. 그것이 성혜가 꿈꾸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성혜에게 5억이 생긴 것은 과연 행운이기만 할까요? 그 무해하고도 안온한 삶은 변화도 없고, 꿈도 없는 삶이에요. 그런 면에서 '성혜의 나라'는 젊은 청년들이 희망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대해 강렬한 펀치를 날려버리죠.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래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혜만큼이나 힘든 세대는 빈곤한 노년 세대입니다. 청년 자살만큼이나 노인의 자살률도 높습니다. 그 원인은 당연히 '가난'이고요. 그런데 왜 힘들고 가난한 노인에 대한 영화나 이야기는 보기가 어려운 걸까요? 쪽방촌에 살면서 폐지 줍는 70대 독거노인 춘삼 씨가 있다고 합시다. '춘삼의 나라'라는 영화를 찍는다면, '성혜의 나라'를 보고 공감했던 젊은 관객이 공감해 줄 수 있을까요?

  영화 '성혜의 나라'는 기묘하게도 MZ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느끼는 분노와 박탈감을 떠올리게 만들어요. 그것은 성혜가 아무 것도 꿈꾸지 않는, 어쨌든 현상 유지라도 할 수 있게 만드는 5억이란 돈이 성혜의 부모가 사고로 죽음으로써 주어지는 돈이라는 점에서 뜨악하기도 하고요. 물론 이 영화가 명백한 '부친살해(Patricide)'의 코드를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주인공 성혜에게 있어 부모는 부담스러운 짐짝처럼 느껴지기까지 하거든요. 돈에 쪼들리는 성혜의 엄마는 딸이 조금이나마 돈을 보내주기를 바라죠. 인터넷에서 젊은 세대에게 통용되는 밈(meme) 가운데에는 '틀딱(노인)들이 빨리 죽어야 젊은 사람이 산다'는 말도 있죠. '틀딱'으로 대변되는 노년 세대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영화의 마지막, 성혜는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려 나갑니다. 성혜의 앞에는 느리고, 안온한, 하지만 가슴 뛰게 만드는 희망과 새로움은 없는 삶이 놓여 있습니다. 성혜는 나름 괜찮은 월세방을 구합니다. 월세가 저렴한 성혜의 집은 경사가 심하고, 높은 지대에 있습니다. 다닥다닥 모여있는 다세대 주택의 방 한 칸, 거기에서 성혜는 예쁜 강아지를 키우게 됩니다. 나는 왜 성혜가 서울을 떠나지 않는지 궁금해지더군요. 모두가 알다시피, 지방은 서울에 비해 집값이 싸잖아요. 그런데 성혜는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거든요. 성혜에게는 서울에서의 버거운 삶이 주는 긴장감이 지방에서의 따분한 삶보다 나은 것일지도요.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지방 소멸'이라는 개발 불균형의 사회 문제도 갖고 있지요. 여러모로 영화 '성혜의 나라'는 현재의 우리나라가 처한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나름의 시의성(時宜性)을 지닌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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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地圖)


서걱거리는 지도를
씹으며 부러뜨린 손가락
너의 푸르스름한 입매
번득이는 면도날이
될 수 있다면

길을 잃었어
왔던 길을 더듬어
처음으로 가야 하겠지
그 절벽에는 동굴이
너무 많아 하지만
너의 발자국이 있는
단 하나의 동굴

질기고 가느다란
실 한 가닥
입에서 뱉어내었어
읽을 수 없는
잃어버린 지도의
붉은 선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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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기원


진공청소기의 먼지통을
들여다볼 때마다
경이롭다 매일 청소를
하는 데도 어디서 그
먼지들이 나오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흰 머리카락과 회색의
솜뭉치들이 몽글몽글
며칠 전에 깎은
손톱도 하나
모래알이 자잘자잘
오리털 이불에서
나온 깃털도 있군

그 모든 것은 아주
먼 우주의 처음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속의 철이 그렇게
내게 왔듯이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갈
부드러운 살과
눈물과 노래를 생각한다
한 처음에 있었던
어떤 손짓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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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것들


세탁기 아래의 끈끈이
커다란 바퀴 한 마리가
들러붙어 있다 해마다
늦봄이면 야생 바퀴가
그렇게 들어온다 걔들은
진짜 엄청나게 크다
그 시커먼 덩어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짝을 찾아 날아다니다
우리집까지 왔을 텐데
그대로 저승길을 밟아

5월의 비가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사흘째 내리는
저녁에 작은 방 방충망에
어리는 비닐 조각 그림자
불을 켜고 보니 커다란
나방 한 마리가 비를 피해서
가만히 쉬고 있는데
난 네가 싫어,
손가락으로 방충망을
튕기며 기어코 녀석을
쫓아내었다 우리집이
아니더라도 다른집에서
잘 쉬겠지 그냥 놔둘 걸
날 밝으면 가버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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