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


5월, 한낮의 맑은 기별은
다가올 밤비를 알지 못한다
슬금슬금 눅진한 회색이
머리카락에 묻어나오는
오후, 밖이 어두워지더니
바람은 그토록 아프게 나무를
두드리고 아침엔 오늘은 맑음,
이라고 말하던 인공지능 성우의
경쾌한 목소리는 이제 뻔뻔하게도
비 올 확률 백 퍼센트라고
눙을 치는데, 이 거짓말쟁이

검게 물든 밤의 아스팔트를
고양이 한 마리 사부작사부작
녀석은 뛰어가지 않는다
검은 바탕에 하얀 점
축축한 담요가 되어버린
등거죽으로 천천히 차 바퀴
어딘가에서 잠을 청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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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희(김민희 분)는 영화사 직원입니다. 만희는 지금 칸(Cannes)에 머물고 있어요. 영화사의 일 때문에 출장을 온 거죠. 한창 바쁘게 일하던 만희는 상사인 양혜의 호출을 받습니다. 카페에서 만희와 마주앉은 양혜는 만희의 해고를 통보합니다. 양혜는 만희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말하지요. 만희는 자신의 어떤 점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지만, 양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만희는 상사의 말대로 정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까요? 도대체 상사 양혜는 무슨 이유로 5년 동안 함께 일해온 부하 직원 만희를 해고한 것일까요?

  홍상수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 2018)'는 낯선 타국의 휴양지에서 그렇게 해고 통보를 받은 만희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만희의 이야기라고 하기도 그렇군요. 만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해두죠.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분)의 카메라를 통해 전달됩니다. 클레어는 칸에 온 관광객인데 우연히 만희와 만나게 됩니다. 클레어의 우연한 만남은 만희의 상사 양혜, 영화감독 소완수와도 이어지고요. 홍상수의 영화에서 '우연'이 이야기에 색을 입히고, 그 얼개를 짜임새 있게 만드는 건 하나의 공식 같아요. '클레어의 카메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과연 만희가 해고당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양혜가 만희를 해고한 다음의 시퀀스에 그 답이 들어있습니다. 양혜와 영화감독 소완수는 칸의 해변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죠. 양혜는 만희가 소완수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소완수는 양혜가 영화사 대표로서 후원하는 감독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입니다. 소완수는 양혜에게 만희와의 일이 술에 취해서 저지른 실수라고 말해요. 그는 앞으로 그런 실수는 없을 거라는 다짐도 합니다.

 클레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입니다. 곧 칸의 관광객 클레어의 카메라는 만희, 양혜, 소 감독의 얼굴을 담아냅니다. 양혜와 소 감독은 클레어가 찍은 만희의 사진을 보게 되지요. 만희는 클레어가 보여준 사진에서 양혜와 소 감독을 발견하구요. 클레어의 사진은 잃어버린 조각 퍼즐의 일부분 같아요. 그 사진은 거기에 찍힌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진실을 담고 있어요. 양혜는 사진 속 만희의 화장한 모습에 놀랍니다. 양혜는 5년 동안 만희가 그렇게 화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만희도 클레어가 찍은 소 감독의 사진을 봅니다. 클레어는 술에 취한 소감독이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죠. 만희는 클레어가 묘사한 여자의 모습을 듣고 양혜일 거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해고된 진짜 이유가 양혜의 질투였음을 알게 되지요.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국어 wikipedia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어요. 영화에서는 배우 정진영이 소완수 감독 역을 연기하는데, wikipedia의 정진영의 캐스팅 항목에 소완수가 아닌 '홍상수 감독' 역이라고 되어있는 거예요. 아마 누군가 살짝 장난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면으로는 그 삐딱한 장난이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해요. 누가 보더라도 영화 속 소완수는 홍상수, 라는 사람 그 자체에요.

  만희는 소 감독의 옛 제자와 우연히(역시, 우연이군요) 마주칩니다. 그 제자는 소 감독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술 마시며 보냈다고 말하죠. 네, 그건 홍상수의 이야기입니다. 영상원 영화과 교수로 있던 시절의 홍상수가 그랬으니까요. 나는 홍상수가 학생들과 워크숍이나 영화 촬영 나갔을 때, 현장에는 늘 소주가 상자째 산처럼 쌓여있었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듣곤 했습니다. 홍상수의 영화는 진짜 술에 취해서, 술의 힘으로 만들어진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죠. 배우들은 술에 취한 척하는 게 아니고, 진짜 술을 마시고 연기하니까요. 영화 속 소완수 역을 연기한 정진영도 진짜 소주를 마시고 그렇게 연기했을 겁니다. 진정한 '소주 무비(soju movie, 해외 평론가들이 홍상수의 영화를 일컫는 말)'의 완성이죠. 그리하여 소완수는 클레어가 찍은 만희 사진을 보고 마음이 괴로워져서 진창 술을 마시고 취합니다.

  클레어의 카메라, 참 제목은 그럴듯해요. 그렇다면 클레어는 왜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얼굴을 마구(!) 사진 찍는 걸까요? 만희는 클레어에게 사진을 찍는 이유를 묻습니다. 클레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Because the only way to change things is to look at everything again very slowly."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걸 매우 찬찬히, 다시 잘 살펴보는 것이라서 그래요)


  클레어에게 사진은 단지 과거의 멈춰진 순간이 담긴 것이 아닙니다. 그건 찍힌 순간부터 계속 변화하고 있는 거예요. 클레어는 소완수에게 사진 속 인물이 사진에 찍히기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찍은 소완수의 사진도 그렇다고 말하면서요. 이 무슨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같은 말인가요? 클레어의 사진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 사진을 보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그 경험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이 사진을 통해 흘러나오는 거죠. 홍상수에게 '영화'는 클레어의 '카메라'로 치환될 수 있는 거겠죠.

  영화 속 만희가 만난 소 감독의 제자는 '영화는 솔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잠깐만요, 이건 '동어 반복(tautology)'이군요.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에서 배우 상원이 하는 말과 똑같거든요. 영화 속에서 전직 배우 상원(김민희 분)은 배우가 되려면 '솔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화감독, 작가로서 홍상수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에 진심을 담아서, 진짜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클레어의 카메라'는 그런 면에서 솔직한, 너무나도 솔직한 영화입니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솔직할까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배우 김민희에 대한 진심이죠, 뭐.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던 부분이 있어요. 소완수는 리셉션 파티에서 만희와 마주칩니다. 만희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죠. 소완수는 만희가 남들의 눈요깃감이나 되는, 형편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면서 비난을 퍼붓습니다. 아니, 자기가 대체 만희한테 뭔데요. 애인도 남편도 아니면서, 겨우 하룻밤 같이 잤을 뿐이잖아요. 소완수의 그런 질타를 받고는 만희가 보여주는 태도도 웃깁니다. 만희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요. 감독님 말이 다 맞다면서 고개를 떨구죠. 아, 이건 사랑에 빠진 남녀의 모습 아니던가요? 물론 클레어의 카메라는 그 순간의 만희도 담아냅니다.

  내게는 클레어의 직업이 '교사'라는 점이 나름대로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카메라를 든 클레어는 만희가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보게 만드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중요한 쇼트가 있어요. 클레어가 해변가 도로 아래의 지하로 들어가는 장면이죠. 글쎄, 관객은 그게 정확히 지하보도인지 동굴인지 잘 알 수는 없어요. 인터뷰(씨네 21, 2018년 홍상수와의 인터뷰 기사 참조)에서 홍상수는 '동굴'이라고 말하더군요. 해변으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오던 클레어는 그 동굴로 쓱, 들어가서는 갑자기 사라집니다. 다른 시각, 같은 장소를 만희도 지나가는데 만희는 그곳을 그냥 지나쳐 버리죠. 홍상수는 그 장면을 꽤나 공들여 찍었어요. 거기가 어디인지 알고서 들어가는 사람, 모르니까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차이일까요? 만희는 클레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미처 몰랐던 마음속 진실을 들여다 보게 되는 거죠. 짧은 바지를 입은 자신을 향해 길길이 날뛰는 술고래 감독에 대한 '사랑' 말입니다.

  '우린 사랑하고 있어요.' 홍상수는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를 통해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죠. 아주, 매우, 너무 솔직합니다. 홍상수는 작가로서 진실된 사람이에요. 그의 진실이 반드시 세상의 도덕과는 일치하지 않지만요. 배우 김민희와의 관계를 공식화한 이 영화를 기점으로 홍상수는 한국 영화 평단에서 차츰 지워지기 시작해요. 그에게 덕지덕지 붙여졌던 온갖 상찬(賞讚)은 가을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지더군요. 어쩌겠어요. 그건 그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따른 대가도 치루어야 하는 거겠죠. '클레어의 카메라'에 담긴 홍상수의 솔직함, 진심이 불쾌하다고 느낄 관객들도 많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영화는 홍상수의 아주 내밀한 일기의 한 부분처럼 다가옵니다. 남에게 자신의 일기를 보여주는 일도 때론 용기가 필요해요. 그 용기 하나만은 칭찬해 주고 싶더군요.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4/04/in-our-day-20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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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맛


깜빡,
가스불이 붉은빛을
내며 꺼진다 찻물이 끓어
오르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비싼 우롱차와 싸구려
우롱차, 둘 중에 어떤 것을
넣을까 잠깐 고민한다
비싼 우롱차는 단맛이 난다
싸구려 우롱차는 쓸쓸하다

단맛의 고급스러운 삶을
생각한다 때가 낀 오래되고
누런 벽지가 떨어지는 현관문을
드나들 때, 이 집을 떠나는 날을
간절히, 아주 간절히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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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사막


그곳에 갔었지 한 발짝
디딜 때마다 모래가 눈동자를
먹어버리는 곳 사이드와인더(sidewinder)의
삼각뿔 눈썹이 저 멀리에서
아주 선명하게도 보이더군
맹독의 독사는 아주 조심해야지
물리는 건 한순간이지만
죽으면 영원으로 갈 수 있으니
눈을 감으면 너의 희고 고운
손이 떠올라 모래가 사부작거리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지

달구어진 모래에 발이 타들어 가
개미귀신이 파놓은 깔때기가
한없이 아래로 꺼지고 있었지
줄줄이 사탕처럼 개미들이
그 입속으로 그렇게 안녕,
너에게 하고 싶은 말도 함께

신기루인가 멀리서 여우가
나타났어 사막에 여우가
살고 있었어 뾰족한 입에는
전갈을 물고 커다랗고 하얀
귀는 쉴 새 없이 펄럭였지
가만, 여우의 입매가 너의
입술을 닮은 것도 같아

아무리 달음질을 해도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해 부정맥에 걸린
모래 언덕은 그리운 비탄을
불규칙하게 삼키고
또 토해내지 너무나
다정한 너의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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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그 방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어 멀리서 은빛 물결이
반짝이고 청새치가 첨벙
바다오리가 철썩거리며 지나가
단풍나무였던가 날개를 가진
푸르고 붉은 잎들에는 작은
씨앗이 있었는데 그게
방 안으로 들어오곤 했지
청소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밟고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조용히 바람에 날려서 보낸
그 씨앗들의 행방이 궁금해

너는 창가에 작은 꽃나무를 하나
두었는데, 옅은 자주색 꽃에는
흰색 점들이 푸른 애벌레의
눈처럼 콕콕 박혀 있었어
그때가 쥐똥나무꽃의 달큰한 향이
퍼질 무렵이었었지 아마
이제 그 화분은 버려지고
희디흰 폴리에스터 커튼은
영영 누렇게 떠버렸지
고양이들은 더이상 말하지 않아
모든 것이 완벽한 방이었는데
너는 떠났지 아직 그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군데군데 금이 가버린
칠보 장식의 열쇠고리도 함께
아픈 창문으로 검은 물이 들어와
이제 빈방을 잠그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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