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핀터 전집 2
해롤드 핀터 지음, 이현주 옮김 / 평민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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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 전집은 알라딘에서 볼 수가 없군요. 핀터의 전집만 있길래 그것으로 올립니다. 


  최근에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로 화제를 모았던 〈인베이젼 Invasion〉은 원작의 세 번째 리메이크 작이었다. 1957년에 나왔던 〈신체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은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이다. 이 작품은 SF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외계의 힘이 보여주는 공포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도시의 사람들은 똑같은 표정과 말투를 하며 자신들과 다른 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작품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중요한 조건은 ‘감정을 가진 존재인가’하는 것이다.

  

  베케트와 핀터가 〈게임의 종말〉, 〈덤 웨이터〉를 통해 보여주는 현대인의 초상은 어떤 면에서 앞서 언급한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은 신체강탈자들은 사람들이 자는 사이에 생각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기능을 빼앗아 가버린다. 〈게임의 종말〉의 함과 클로브, 〈덤 웨이터〉의 구스와 벤은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린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클로브는 함의 뒤치다꺼리와 무의미한 행위로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구스와 벤은 살인청부업을 아무렇지 않게 주어진 임무로 받아들여 해내고 있다. 왜 그들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은 발표된 년도가 같다. 1957년이다. 전후 깊게 드리워진 상처의 그림자를 이 두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무엇보다 전대미문의 학살극이라 할 수 있는 유대인 대량학살의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치열하고 철저한 자기 성찰의 분위기는 특히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베케트와 핀터가 자신들의 시대와 호흡하며 뛰어난 작품을 내놓은 문제적 작가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의 작품 속에서 그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임의 종말〉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부상당한 함이나 〈덤 웨이터〉의 도입부에서 나온 늙은 노인의 죽음과 어린아이의 고양이 살해 기사는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된 폭력적 현실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보여준다. 

  베케트와 핀터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보여주는 위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두 작가는 어떠한 해결책이나 구원을 제시하는 대신에 파국의 국면을 보여주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클로브는 함의 위협에 떠나지 못하고 무의미한 일상의 소극(笑劇)이 반복되는 무대(삶)에 남는다. 구스는 자신에게 끊임없는 희생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인물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반항을 선택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다. 베케트와 핀터가 보여주는 이러한 결말은 그들이 바라본 현대세계가 얼마나 우울하고, 희망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곳인지를 증명한다.

 

  〈덤 웨이터〉의 구스는 외친다. “왜, 왜 그는 이런 게임을 하는 거야? 이게 바로 내가 알고 싶은 거야. 왜 그는 이런 게임을 하는데?” 그 게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게임을 그만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하나 말해주지 않는다. 핀터는 게임에서 패배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인물에게 연민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독자와 관객에게 게임의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누구도 그 게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코 그 누구와도 진정한 감정의 소통을 하지 못하고 단절된 채, 모두가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주어진 명령에만 복종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하게 된 시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이다. 두 작가는 그 황량하고 슬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분열증적인 언어의 희곡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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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바흐 :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 전집 [2CD]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포저 (Rachel Podger) / Channel Classics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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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만약 무인도에 가게 되었는데 가져가야할 단 한가지를 선택한다면 무엇으로 하겠는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변함이 없었다. 바흐의 음반들이다. 무인도에서 바흐의 음반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아무튼, 심정적으로는 그 음반들만 있으면 아주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흐는 여전히 나의 음반 구매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번에 구입한 레이첼 포저와 트레버 피녹의 연주 음반은 정말 근래에 보기드문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쳄발로 연주자이기도 하고 지휘자로도 좋은 평가를 받는 트레버 피녹에 비한다면 포저는 내게 다소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미 음반을 구입한 이들의 호평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역시, 레이첼 포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포저가 들려주는 바흐의 선율은 정말이지 너무나 포근해서 추운 겨울의 따뜻한 외투를 연상케 한다. 유려할 뿐만 아니라 명료한 포저의 연주는 트레버 피녹의 반주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두 명의 연주자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며 놀라운 화음을 들려주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개성이 뛰어난 연주자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트레버 피녹의 반주가 돋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가을이 깊어가게 되면 옷깃을 여미게 될 날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 음반이 든든한 겨울 외투처럼 내 옆에 있어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뿌듯해짐을 느낀다. 따뜻한 바이올린의 음색과 매력적인 하프시코드와의 화음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꼭 들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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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생애 - 진실을 아는 자의 갈등과 선택
베르톨트 브레히트 외 지음, 차경아 옮김 / 두레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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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히트의 희곡 속에서의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소의 고문 도구만 보고도 겁이 나서 자신의 주장을 포기했노라고 토로한다. 막강한 종교권력과 끝까지 맞서 싸우길 기대했던 제자들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런 갈릴레이가 유약하고 비겁하다고? 어떤 이는 그렇게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의도는 갈릴레이의 행위에 대한 판단 이전에 권력 앞에 선 한 과학자의 내면적 갈등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는 듯 하다.  

 

 브레히트가 본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진리가 가져올 엄청난 파장과 그 혁명적 가능성을 감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적인 약함 때문에 그것을 권력자의 의지에 헌납하고 이후 남은 생애를 권력의 감시 속에 수인처럼 살아야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누구인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명백한 과학적 진리조차 왜곡하거나 폐기하려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영웅적 행위일 것이다. 갈릴레이의 선택은 분명 영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그러한 표면적 포기 내지는 패배 보다는 갈릴레이가 지키고자 했던 과학자로서의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인간이 치욕 속에서도 삶을 견딜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느냐고 독자와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진리에의 열망 때문에 갈릴레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브레히트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폭압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그래서 그가 그려낸 갈릴레이의 생애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의무에 대한 이야기가 된 것이다.  

 

  갈릴레이가 감시의 눈을 피해 썼던 책은 제자 안드레아의 손을 통해 국경을 넘어간다. 유약함 때문에 전 생애를 걸쳐 패배자의 삶을 살았던 한 명의 과학자는 그렇게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살아남아 삶을 견딘다는 것과 그것이 남긴 의무의 가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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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밑의 욕망 범우희곡선 19
유진 오닐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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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신의 명령을 받고 지상에 내려온 천사가 나온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 답을 찾으러 온다. 천사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으며, 타인에 대한 사랑이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유진 오닐은 그에 대한 답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서로 다른 욕망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으며, 그것이 삶의 고통의 근원이 된다. 결국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느릅나무 밑의 욕망〉은 오닐이 가진 인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농장의 상속을 두고 아버지 캐버트와 아들 에벤, 캐버트의 새아내 에비가 벌이는 암투는 지극히 속물적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과 함께 이들이 또한 사로잡힌 욕망은 성욕이다. 젊은 아내 에비에 대한 캐버트의 욕망, 에비와 에벤의 헤어날 수 없는 육체적 관계는 아이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비극을 향해 달음질쳐간다. 오닐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이러한 욕망은 인간이간 존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오닐은 여기에 캐버트의 신앙심을 하나 더 끼워넣는다. 농장을 위해 아내와 자식들을 일꾼처럼 마구 부려먹는 무정한 아버지인 그이지만 신의 존재는 거역할 수 없는 삶의 명제와도 같다. 캐버트는 신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에 대한 믿음은 도덕적이고 선량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신앙심은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캐버트가 보여주는 종교적 열정은 캐버트 자신 뿐 아니라, 그의 집안에 드리운 비극의 그림자를 막아내지 못한다. 이렇듯 이 작품에 드러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냉소와 부정은 미국 사회의 도덕적 근원에 대한 회의로까지 읽힌다. 

  

  과연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오닐은 인간의 욕망이 불러오는 비극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추한 존재일까? 어쩌면 그것은 추하다기 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인간이며, 삶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진창 속에서도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오닐은 〈느릅나무 밑의 욕망〉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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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벽에서 읽었던 작품 소개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모네가 지베르니의 마지막 시기에 그렸던 그림들이 추상 회화의 초기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지베르니에서 그린 모네 말년의 작품들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일본식 다리 연작이 그러한데, 보고 있노라면 저것이 과연 다리인가 싶을 정도로 형태와 색채의 왜곡이 심하다. 그런데 그것은 모네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모네로서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바로 그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백내장은 모네의 시력을 점차적으로 악화시켰으며 그러한 상황은 화가인 모네의 작업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어려움을 무릅쓰고 감행한 수술의 결과는 더욱 참담해서 모네 말년의 그림들은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 그런데 그렇게 그려진 그의 그림들이 추상 회화의 시초가 된다고 써놓았으니 웃음이 나올밖에. 모네의 회화적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추상이 아닌 구상에 있었다.

  전시를 보는 동안 나의 머리를 맴돈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어쩌면 모네가 추구했던 인상주의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적어도 회화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모네가 살았던 시대는 미술사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사진의 발명이란 사건이 있었다. 사진은 회화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는데, 그것은 회화가 사물의 단순한 재현이 될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남아야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 속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회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에 인상주의는 미술사에 남을 수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라지는 길목을 한번 떠올려본다. 그들의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재현을 포기한 표현주의와 추상 회화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회화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상과 추상, 그 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은 찾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회화는 다시금 재현으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 하다.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극사실적 회화도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만약 모네가 오늘날의 회화 작품들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그가 회화의 진정성이 남아있던 시대에 그림을 그렸던 행복한 작가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는 어쩌면 현대의 회화들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회화들에서 회화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찾는 일은 점차로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도, 관람객도 더 이상 그림을 통해 숭고함과 구원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회화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내면은 황폐해져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네의 그림들은 회화의 진정성, 그것을 보는 이들의 내면적 충만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회에서 특히 네덜란드의 튤립 밭을 비롯해 영국의 체링크로스 다리, 항구와 선착장 등을 그린 풍경화가 인상적이었다. 모네가 여행을 하며 느꼈던 정취가 그림을 통해 그대로 전해오는 듯 했다. 나는 모네가 보았던 풍경들 속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쁨과 충일한 감정이 마음을 잔잔히 물들였다.

  한편, 그러한 감상 외에 전시 기획과 관련하여 문제점을 지적해야겠다. 사실 이번 전시회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서양 유명 화가들의 이름을 내건 기획 전시회에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번  “빛의 화가 모네 전”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모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수련 연작의 소개에 중점을 두었다는 이번 전시에서 정작 수련 연작 작품은 몇 점 되지 않았다. 사실 모네의 수련 작품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96년 가나 아트 센터에서였다. 단 한점의 수련 연작을 보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때와 비교하여 본다면 이번 전시회의 수련 연작은 몇 점이 더 많기는 하지만, 크기나 내용 면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 보다는 모네의 가족 초상과 그의 초기 풍경화가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전시회의 어느 부분이 “모네 전”이라고 내걸만한 근거가 되는 것일까? 단지 모네 작품만 몇 점 가져와서 전시하면 되는 건가? 만원이라는 관람료는 결코 적지 않다. 매번 이런 식의 기획 전시를 보고 사기당한 기분으로 전시장을 나오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오직 상업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전시 기획사, 미술관과 갤러리, 해외의 수준 낮은 컬렉션들, 그렇게 그들이 손을 잡고 만들어낸 것이 바로 대형 기획 전시인 셈인데, 그 결과물이란 것이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다. 서울 시립 미술관의 경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매번 이런 식의 기획 전시를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미술관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절대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성과와 상업적 이윤에 대한 강박관념은 공공미술관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닌 것이 되었다. 그림을 보겠다는 관람객이 구름같이 몰려오는데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이전 전시였던  “르네 마그리트 전”의 경우엔 관람기간을 보름이나 연장해야 했을 정도로 관람객이 많았다.

  아마 이번의 “모네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러올 것이다. 빈약한 작품 구성에 실망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에서였을까? 전시가 끝나는 곳에는 다음 전시를 알려주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세상에, 다음엔 고흐가 온단다. 시립 미술관과 전시주관사인 한국일보사는 이제까지 터뜨려온 것 보다 더 큰 대박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술 전시에도 바야흐로 한탕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벌써부터 오는 11월의 고흐 전시회에 가야할지 고민이다. 이번의 모네 전과 같은 양상이라면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대형 기획 전시의 폐해를 얼마나 더 목격해야할까? 미술관의 전시 기획 풍토가 명분과 내실을 갖춘 것으로 변모해야할 필요성을 모네 전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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