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옥수수


아주 맛있는 옥수수야
이게 찰옥수수 맞지?
난 어렸을 적부터 옥수수를 좋아했지
정말 맛있구나
할머니는 텃밭 가득 옥수수를 심으셨어
내가 옥수수를 좋아했으니까
아, 그런데 할머니도 돌아가셨을까
돌아가셨겠지, 그래, 돌아가셨을 거야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이제 기억들은 검은 물에 쓸려가지만
여름, 옥수수가 빼곡히 심어진
텃밭이 식탁에 주단처럼 깔리고
엄마의 건너편에는 작은 체구의
새하얀 할머니가 앉아있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어, 난
할머니가 보고 싶구나,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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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


옥수수 껍질을 벗기다가
하얗고 통통한 벌레를 보았다
아주 빠른 판단
손가락으로 꾹 눌렀을 때
물크러진 벌레의 살점
한 점의 미안함이 있다
너도 먹고 살려고 거기에
있었을 뿐인데

어스름 저녁
낡은 방충망을 뚫고
검은 모기 한 마리
부엌을 질주한다
다음 날 오후,
나는 하얀 커튼 사이
모기의 다리를 잽싸게 잡아챘다

죽어 마땅할 벌레
죽여야만 하는 벌레
죽일 수밖에 없는 벌레
죽이는 마음을 흔드는 벌레
죽이고 나서 한참은 생각나는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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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신사


그때 당신 마음을 받아줄 걸 그랬어
그깟 대머리가 뭐라고
내가 젊었을 적엔 당신이 대머리인 게
좀 마음에 걸리더군
당신 마음은 참 비단결이었는데
나한테 퇴짜 맞고
당신이 좀 상처를 받았더랬지
몇 년 후에 당신 사진을 보니까
글쎄, 가발을 쓰고 있더라
꼭 나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
근데, 그 가발은 당신한테 안 어울려

긴 시간이 흘렀지
어제 꿈에서 정말 오랜만에 당신이 보이더군
풍성해진 머리는 여전히 어색해
이제는 가발 대신에 머리를 심었나봐
난 여전히 당신은 대머리였을 때가 낫다고 생각해
당신, 괜찮은 사람 만나서 잘살고 있겠지?

머리카락 따위
사람의 외모는 피부 한꺼풀일 뿐인데
그깟 대머리가 뭐라고
난 당신의 보드라운 마음을 놓쳐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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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반점


빨간 반점이 올라왔다
가렵고 아픈
자잘하고 단단한 덩어리
그게 혈관염이라고 하더군

사람들에게 신나게 맥주를 대접했다
아주 커다란 맥주통이 바닥날 정도로
마구마구 퍼줬었지
내가 그 맥주를 마셨던가
그랬던 거 같아
맥주통 바닥에 남은 그 조금

뭘 먹는 꿈은 아플 꿈이야
그래서 빨간 반점이 올라온 거야
꿈해몽 가게를 열면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묘한 자부심이 생긴다

다리에 한 개
손등에 한 개
팔에 두 개
맥주를 들이킨 빨간 반점이
가만히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다
아프고 슬픈 술주정
장맛비가 귀에 쩍쩍 달라붙는
6월의 마지막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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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되는 시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돈이 되는 시를 써야 한다는 거죠
시인이 가난하다는 건 무능력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맞춰살아아죠
팔아먹을 수 있는 시를 써야 해요
자신이 쓰는 시를 상품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화려한 포장지도 쓰고 그래서 고객을 낚아야죠
가만히 두 손 모아 시 쓴 종이 들고 있으면
누가 사간답니까? 시인도 마케팅을 알아야 해요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죠
시 쓰는 강좌도 열어서 수업료 받고,
시 청탁 오면 청탁하는 쪽의 비위도 적당히 맞춰야죠
어느 정도 독자 모이면 월간 구독 서비스로 돈을
받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마나
많습니까? 시로 돈을 벌 방법이 말입니다
그저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시 써서 등단하고
시집 내서 독자들이 그걸 사주기만을 기다리는 건
미련한 짓이라 이겁니다 왜 글재주로 돈 버는 걸
부끄러워해요?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어찌되었든
돈 되는 건 팔아서 먹고살아야 하지 않나요?

대가리가 파란 애송이 시인은 당당하게 그렇게 말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돈을 원하면 돈이 오지 않는다
너무나도 진실되게 시를 쓰면 시가 도망가 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처절하게 돈을 생각하지 않으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며 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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