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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평점 :
이 책을 읽었던 날은 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그제서야 빗소리가 선연히 들려왔다. 자신에게 남은 길이 죽거나, 미치거나, 종교에 귀의하는 것 뿐이라고 절규하던 소설 속의 이치로는 결국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빗소리는 더욱 처연히 들리는 듯 했다.
뜻하지 않은 계기로 치매에 걸리신 노인분들을 보살피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할머니가 있다. 그 분은 외국으로 이민을 간 아들 내외를 따라 같이 살게 되었는데 늘 혼자 집을 지키며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십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나니 마음의 병을 얻어서 결국 한국에 있는 딸에게로 오게 된 것이었다. 할머니에게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삶이나 다름없었다. 어제 분명 인사를 다하고 말도 나누었는데 그 다음날이면 나에게 누구냐고 묻는 식이었다. 그것도 아주 쌀쌀맞게 딴사람 대하듯 했다. 내가 그곳에서 얻는 깨달음이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었다. 오랜 고립과 단절이 그토록 큰 마음의 병이 됨을 보면서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서있되 누군가를 바라보고 말을 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교수인 이치로는 부인이 자신에게 냉담한 것은 자신의 동생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동생을 심하게 추궁한다.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동생에게 결백을 입증하려면 형수와 함께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라고 협박까지 한다. 동생과 아내에 대한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가고 시간이 갈수록 주변의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내면에만 침잠하면서 극심한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린다. 결국 그는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가족에게서 스스로 고립되어 자신이 만든 마음의 감옥에 기거하게 된다.
이치로가 안고 있는 마음의 고통은 언뜻 보기엔 동생과 아내의 사이에 대한 의심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데에 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대한 신념의 상실인 것이다. 과연 인간과 인간이 진정으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인간의 내면에는 순수함과 진실성이 존재하는지, 있다면 그것은 지속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회의한다. 인간은 결코 믿을만한 존재가 못되며 순수성을 간직하지도, 간직하더라도 지속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죽거나 미치거나 신앙인이 되는 것 가운데에 하나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완전하고 진정한 소통과 이해의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아니 처음부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치로를 제외한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러한 이상과 기대를 적당히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보인다. 그들은 마음의 감옥에 갇혀버린 이치로를 한편으로는 측은히,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이하게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로 언급된 맹인 여인의 사랑이야기는 참으로 서글프기까지 하다. 이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헤어진 연인이 변심한 이유를 마음에 담아두며 알고 싶어했던 여인에게 전해진 것은 진실이 아닌 연민으로 포장된 거짓과 위선이었던 것이다. 이런 짧은 이야기들이 이 책에는 중간 중간 나온다. 이것을 보면 작가는 아마도 이치로의 괴로움을 상당부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진정한 소통과 이해가 가능하지 않더라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 삶은 진실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외로움으로 병들어가는 이치로는 인간 내면에 자리한 깊은 고독과 그것이 불러오는 모순을 보여주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 마음속 감옥의 고통에 대해 그토록 섬세하고 절묘하게 그려낼 수 있는 소세키라는 작가는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