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미니 시리즈 1, 2, 5, 6편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471464

  재즈 미니 시리즈 3, 4편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429358



Jazz 7  'Dedicated to Chaos(1940-1945)' 1시간 53분         
Jazz 8  'Risk(1945-1956) 1시간 58분



  'Jazz 7편'은 2차 세계 대전 시기를 통과하는 재즈 음악계의 변화를 담는다. 1930년대를 휩쓸었던 스윙의 열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은 그 중심에서 여전히 건재했다. 그런 가운데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등장은 재즈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 1940년, 미국은 대공황의 종식과 함께 활기를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의 기운이 미국을 감싼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많은 재즈 음악가들도 군인으로 복무했다. 듀크 엘링턴과 루이 암스트롱은 군대에 가기에는 나이가 많았기에 그들은 대신 군 위문 공연을 다니며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 군 부대에서 재즈 밴드가 결성되는 일도 있었다.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은 그렇게 재즈를 시작했다.

  Home front로서 미국 본토는 전쟁 지원에 총력을 다했다. 군대에 간 30개의 재즈 밴드들을 비롯해 심지어 전시 물자에 쓰느라 악기 제조까지 중단되기도 했다. 전쟁과 재즈, 무언가 안어울릴 것 같은 이 조합은 새로운 파장을 만들어 냈다. 군대 음악으로서 재즈는 대중성을 더욱더 확장해 나갔다. 특히 유럽에서 재즈는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자유와 통합, 젊음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나치는 재즈 음악이 가진 그러한 상징성 때문에 탄압하기도 했다. 토마스 카터 감독의 1993년작 'Swing Kids'는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재즈는 더 많은 향유 계층과 음악적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전부터 존재했던 미국 사회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가 서서히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인종 문제였다. 전시와 군대에서도 인종 차별은 노골적이었다. 흑백 분리 정책은 군대 내 재즈 밴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인이었던 데이브 브루벡이 있었던 밴드만은 예외였다. 브루벡은 당시 동료 흑인 음악가들이 받았던 차별을 회상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1943년, 새로운 재즈의 중심지로 떠오른 뉴욕 할렘에서는 인종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제 흑인들은 부당한 대우에 더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이렇게 인종 간의 갈등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가운데 재즈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엘라 피츠제랄드와 듀크 엘링턴은 흑인 음악적 감성인 블루스를 재즈와 긴밀히 결합시켰다. 유럽에서는 집시 출신의 뛰어난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가 등장했다. 그리고, '버드(Bird)'라고 불리는 찰리 파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Jazz 8편'은 재즈의 전설이 된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는 '비밥(Bebop)'이라는 재즈의 파격적 문법을 들고나왔다. 초기의 비밥은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기존의 스윙 재즈가 춤에 최적화된 음악으로서 댄스홀을 중심으로 확장성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비밥에는 그러한 요소가 적었다. 매우 빠르고 다채로운 리듬감의 재즈는 청중들에게 낯설게 들렸다. 특히 찰리 파커가 선보인 신기에 가까운 속주(速奏)와 현란한 기교는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에 가까웠다. 그것은 분명 재즈의 혁명이었다. 파커는 새로운 세대의 재즈 음악인들의 우상이 되었다.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를 비롯한 파커의 동료들은 그렇게 비밥의 세계를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8편의 제목 'Risk'에 드리운 어두움이 곧 드러난다. '마약'이었다. 찰리 파커에게 마약은 음악 경력의 원천인 동시에 폭탄과도 같았다. 어떤 면에서 그가 보여준 놀라운 연주는 마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재즈 음악인은 고달프고 위험한 직업이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압박감, 청중의 기대, 경제적인 문제, 그 모든 것들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았다. 재즈 초창기에는 술과 마리화나(루이 암스트롱은 마리화나 중독자였다)가 그 어려움을 달래는 약물이었다면, 이제는 '마약'이 주류로 부상했다. 파커를 비롯해 마일스 데이비스, 스탄 게츠, 존 콜트레인과 같은 재즈 음악가들은 마약 중독에 시달렸다. 특히 파커는 마약으로 인해 음악 경력 자체가 위협받는 지경이었다. 음반 계약금을 마약으로 받기도 했던 그에게 재활 치료도 소용이 없었다. 파커는 비밥의 독창적 경지를 만들어냈지만, 그럴수록 그 자신의 삶은 벼랑 끝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비밥의 시대에 기존의 스윙 빅 밴드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그리고 대공황 시기에도 잘 나갔던 베니 굿맨의 밴드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제 빅 밴드의 시대는 저물고, 작은 규모의 특색있는 재즈 밴드들이 등장한다. 대중의 취향은 변했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사운드의 이른바 '쿨 재즈(Cool Jazz)'가 탄생했다.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그 쿨 재즈의 산파와도 같았다. 존 루이스(John Lewis)는 'The Modern Jazz Quartet'으로, 데이브 브루벡은 'Dave Brubeck Quartet'으로 쿨 재즈에 합류했다. 브루벡은 당시에 미국에 머물던 현대 음악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의 영향을 받아 클래식과 재즈를 접목시켰다. 그의 'Time Out' 음반에 수록된 유명한 'Take Five'는 그 결과물이었다.

  1950년대는 그렇게 비밥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재즈 음악이 피어나고 있었다. 1955년, 어린 딸의 죽음으로 상심한 찰리 파커의 상태가 악화된다. 오랜 마약 중독과 폭음은 파커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재즈의 심장을 차지했던 이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겨우 서른 다섯이었다. 대체불가능한 재능은 그렇게 비운의 운명 속에 사라졌다. 역시 마약 중독에 빠져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각성했다. 그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죽음과도 같은 중독의 늪에서 빠져나온다. 파커의 죽음과 함께 재즈 역사의 창 하나가 닫혔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새롭게 열린 창들 사이로 재즈는 또 다른 모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Jazz 9편'은 실험적 재즈 음악의 시대를 다룬다. 10편으로 구성된 켄 번즈의 재즈 미니 시리즈는 두 편을 남겨두고 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Charlie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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